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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 정치예속을 생각한다

10전11기

by 붉은_달 2011. 11. 8.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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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국내에 광범위한 정보망과 친미 인맥을 구축하고서 정부를 자신들 마음대로 쥐락펴락합니다. 그런데 정작 한국은 현행법상 미국을 위해 복무하는 이런 ‘간첩’들을 처벌할 수 없습니다.


2008년 8월. 정치예속을 생각한다


촛불과 국민주권시대


2008년은 촛불의 해였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광우병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제한을 없애려고 하면서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입니다. 생존의 문제가 달린 문제라서 더 적극적이었겠지만 근본에는 미국이란 나라에는 굴욕적이면서도 국민들에게는 폭압적인 이명박 정부의 행태가 국민들을 더 자극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연일 수 많은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촛불을 들었고 서울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도 촛불의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가히 촛불항쟁이라 부를만한 규모였습니다. 국민들의 요구는 그리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쇠고기 수입 협상을 다시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이 단순한 요구를 끝끝내 거부하였고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시민들에게 군홧발과 물대포로 응답했습니다. 정부의 탄압은 인터넷에서도 이어졌습니다. 정부 정책을 비판한 누리꾼들이 듣도 보도 못한 법에 걸려 경찰에 끌려가야 했습니다.


이런 정국에서 저도 매일같이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갔습니다. 하루는 딸과 함께 촛불을 들고 있는 장면이 뉴스에 나오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촛불의 기운도 정부의 탄압에 점차 힘을 잃기 시작했고 이를 되살려보려는 전국적인 열망에 8.15 광복절을 계기로 큰 규모의 촛불을 준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드디어 운명의 그 날, 전국에서 모인 수많은 국민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왔습니다. 경찰은 색소와 최루액을 첨가한 물대포를 쏘며 진압에 나섰고 사람들은 이를 피해 서울 시내를 휘젓고 다녔습니다. 그러다 동대문운동장 근처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도로를 점거한 채 사람들이 집회를 정리하려고 기다리는 중에 갑자기 경찰들이 기습을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였고 경찰들은 색소물총을 쏘아가며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연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집회가 끝났다고 방심했던 저는 온 몸에 색소물을 뒤집어쓴 채 동대문시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뒤따라온 사복경찰들에게 붙들려 끌려나오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제 여덟 번째 연행 기록이 추가되었습니다. 다행히 불구속 기소가 되었고 이 재판은 아직도 보류상태로 있습니다. 당시 대구에서 올라온 학교 선생님과 같은 유치장에 있었는데 연행 사실이 알려지면 학교에서 해고될까봐 걱정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선생님과 한국 교육 현실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경찰 조사는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도 알려주었는데 유치장에서 풀려난 후 어찌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2008년 촛불항쟁은 한국 현대사의 한 획을 그었습니다. 이 사건은 여러모로 큰 의미를 담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국민주권시대의 개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국민들이 더 이상 정치인에게 정치를 맞기지 않고 스스로 자신들의 권리를 찾고 목소리를 내기 위해 행동에 나선 것입니다. 그 전만 해도 대다수 국민들은 자신의 입장을 대변해줄 정치인을 찾아 그들에게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그런데 기성 정치인들은 더 이상 자신을 제대로 대변해주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직접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큰 규모의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선 것은 그 때가 세 번째입니다. 맨 처음은 2002년 효순이, 미선이 사건이 계기였고, 2004년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이 계기였습니다. 첫 촛불이 주한미군 문제, 불평등한 한미관계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핵심이라면 두 번째 촛불은 국민 위에 군림하면서 부정부패에 찌들고 구태를 벗지 못한 보수정치인들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핵심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어쩌면 이 두 가지가 결합된 촛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국민보다 미국을 섬기는 정부


국민들이 이명박 정부에게 분노한 것은 국민들의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서 미국의 요구라면 자존심도 버려가며 맹종했기 때문입니다. 후에 위키리크스에 의해 폭로되었지만 쇠고기 수입 문제는 오래 전부터 미국이 요구해온 사안이었고 정부는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해가며 미국에게 온갖 약속을 다 하고 있었습니다.


위키리크스 폭로 전문에 따르면 2007년 6월 5일 버시바우 주한미대사와 만난 이명박 당시 대통령 후보는 “한국 소는 미국산 사료를 먹기 때문에 한국 쇠고기는 진짜 한국산이 아니며 한국 쇠고기를 살리자고 주장하는 것은 이미 물 건너간 것”이라고 했답니다. 2008년 1월 16일에도 이 대통령은 버시바우 대사 등과 만나 “기자들이 없으니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다. 미국산 쇠고기가 좋고 싸기 때문에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또 2008년 1월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일하던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과 현인택 전 통일부 장관이 버시바우 대사에게 4월 한미정상회담 이전에 쇠고기 수입을 재개할 것을 약속했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당시 정부는 한미정상회담이 미 쇠고기 수입개방과 무관하다고 주장했는데 거짓임이 드러난 셈입니다. 2008년 6월 26일자 전문에는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쇠고기 협정이 실행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데 대해 이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에게 감사하고 있다”며 “쇠고기 시위로 부시 방한이 연기된 것은 유감스럽다”고 하였답니다. 대통령부터 여러 장관, 위원장들이 쇠고기 하나에 매달려 미국에게 예쁘게 보이려고 참 별 소리를 다했습니다.


쇠고기 문제만이 아닙니다. 이명박 정부는 인수위 시절부터 이른바 ‘어륀쥐’ 사건을 통해 영어몰입교육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당선 직후 미국을 방문해 부시 미국 대통령이 탄 차를 운전하며 자신이 미국을 위해 봉사하고 있음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습니다. 2011년 10월 방미 때는 미국산 전쟁무기를 무려 14조 원이나 구매하기로 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또 방미 과정에서 “아시아 국가들이 상당히 중국을 두려워하고 있다”, “중국을 견제하기를 원하고 있다”, “한미 FTA는 양국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중요하지만, 이 지역에서 미국의 재관여(reengagement) 메시지를 알리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미국이 동북아에 관여하여 중국을 견제해달라는 매우 위험천만한 의미입니다. 이미 한국의 최대 통상 상대국인 중국에게 무슨 보복을 당하고 싶어서 이러는 걸까요? 미국에 잘 보이려다 나라를 망쳐먹을 지경입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대통령을 하지만 사실은 뼛속까지 미국인인 인물이 바로 이명박 대통령인 듯합니다. 위키리크스 폭로 전문에 따르면 2008년 당시 이상득 국회부의장이 버시바우 주한미대사에게 “(이 대통령은) 뼛속까지 친미, 친일이니 그의 시각에 대해선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고 하니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이전 정권들은 어땠을까요? 안 됐지만 역대 정부 가운데 미국과 평등한 관계를 유지한 정부는 없는 듯합니다.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모두 미국의 요구라면 굴욕적인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정부뿐 아니라 주권기관인 국회와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한국 정치가 얼마나 미국에 예속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즉, 대통령이나 고위 관료, 여당 정치인들의 성향과 무관하게 제도적으로, 체계적으로, 역사적으로 미국의 요구가 관철되는 게 한국의 정치질서입니다.


미국이 점지하는 한국 대통령


이는 역대 대통령이 어떻게 정권을 잡았는지 과정을 보면 분명합니다. 한국의 정치제도는 대통령중심제로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됩니다. 따라서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대통령은 국민들이 자신들의 뜻대로 뽑기보다는 미국이 점지한 인물로 결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처음 이승만 대통령이 정부를 세울 때부터 모든 것이 미국 뜻대로였습니다. 미군정 시절 다른 정치세력들은 모두 탄압을 받아서 제대로 활동하기는커녕 살아남기도 어려웠고 결국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승만 세력이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여 분단정부가 들어선 것입니다. 당시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던 백범 김구 선생은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가하여 통일독립국가 수립에 합의한 후 미국의 눈 밖에 나서 결국 미군 방첩대(CIC) 요원이었던 안두희에게 암살되고 맙니다.


이처럼 미국의 선택으로 집권한 이승만 정권이었지만 결국 미국의 버림을 받아 쫓겨나고 맙니다. 이승만 정권은 집권 내내 각종 부정부패와 독재, 그리고 무능한 국정 운영으로 국민들의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 1960년 3.15부정선거를 계기로 4.19혁명이 일어났고 국민들은 이승만 정권을 몰아내기에 이릅니다.


미국 역시 이승만 정권에 대한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정전협상에 나선 미국을 곤란하게 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는 내용의 ‘에버레디’ 계획을 세울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을 대신할만한 반공 지도자를 찾지 못했기에 수 차례에 걸친 쿠데타 계획을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에 친미반공 정부가 존속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4.19혁명이 일어나자 결국 미국은 이승만 정권을 포기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습니다. 4월 26일 아침, 월터 매카나기 주한미대사가 김정렬 국방장관에게 전화해 “빨리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재선거를 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게 하라”고 지시하였고 몇 시간 뒤에는 직접 이승만을 방문하여 하야를 촉구하였습니다. 미국의 버림을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권좌를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 후 미국은 이승만을 대신할 친미반공인사를 물색하였습니다. 1959년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 의장 폴 브라이트는 “(한국에서) 정당 정치가 실패할 경우에 군인 정치에 의한 교체를 실현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한국 국민들의 분노를 억누르려면 군사독재를 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박정희 정권입니다. 1964년 5월 3일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 덜레스는 영국 비비시(BBC) 방송에 출연하여 “내가 재임중에 CIA의 해외활동으로서 가장 성공을 거둔 것은 5․16쿠데타였습니다”고 발언하였습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도 결국 이승만 정권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버림을 받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미국의 버림을 받은 이유는 크게 두 개로 꼽을 수 있는데 첫째는 군사독재에 대한 국민들의 거센 반발로 더 이상 정권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은 YH사건이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1979년 8월 9일 가발수출업체인 YH 무역의 여성 노동자들이 회사의 폐업조치에 항의하여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시위를 벌였습니다.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늘 그랬듯이 2천여 명의 경찰 병력을 투입해 강제로 해산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여공 1명이 추락사하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한편 당시 박정희 정권은 자신의 정적이었던 김대중씨를 가택연금하고 있었는데 김영삼 신민당 총재마저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이에 YH사건 당시 경찰 진압에 저항한 것을 계기로 김영삼 총재를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정국은 급격히 얼어붙었고 특히 부산, 마산 주민들의 분노를 불러와 마침내 부마민중항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미국은 이를 보며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다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미국이 박정희 정권을 버린 이유는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박정희 정권은 미국이 자신을 버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대비해 1970년대부터 코드명 890이라는 이름 아래 핵무기를 개발했습니다. 미국은 핵독점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친미 국가라 하더라도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몇 차례 미국의 경고를 받고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하고서도 미국 몰래 핵무기 개발을 계속했습니다. 물론 각종 정보기관을 통해 한국 내정을 샅샅이 파악하고 있던 미국이 이를 모를 리 없었지요. 미국은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박정희 정권을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물론 10.26 사건과 관련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결정적 증거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정황상 미국이 박정희 대통령 제거를 원하고 있었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백악관은 한국보다 먼저 박정희 대통령 암살 사실을 발표하였는데 한국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고 잘못 발표하였습니다. 이를 두고 일본의 산케이 신문은 미국이 쿠데타를 준비했던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또 10월 29일에는 휘류빈 소련 외무차관이 “박 대통령은 미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KCIA(중앙정보부) 부장에게 살해된 것”이라 말했다고 하는데 미국 배후설이 다른 나라에도 널리 퍼져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자 전두환 신군부가 쿠데타로 집권했습니다. 이 역시 미국의 지원으로 가능했습니다. 1980년 5월 15일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 위컴은 한미연합사령부 지휘를 받는 20사단의 출동을 승인하여 전두환의 쿠데타를 지원했습니다. 그는 “한국민은 들쥐와 같은 민족이어서 누가 지도자가 되던 복종할 것이며, 한국민에게는 민주주의가 적합치 않다”는 발언을 했고 또 AP통신과의 기자회견에서 “한국의 10월 사태(10.26을 의미) 이후 미국의 대한정책에서 가장 성공한 일 중의 하나는 전두환 정권이 수립된 것이다. 우리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으며 우리의 보람도 크다”고 하였습니다.


대선에도 개입한 미국


87년 6월항쟁의 성과로 직선제 개헌이 이뤄진 후 대통령은 국민들이 직접 투표로 선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이 한국의 대통령선거에 개입하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1987년 대선에서 미국은 당시 여당이었던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6월항쟁이 한창이던 6월 22일 에드워드 더윈스키 미 국무부 차관이 한국을 방문했는데 김현욱 국회외무위원장을 만나 “민정당이 더 좋은 이미지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어려운 과정이겠지만 노태우 후보는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부드러운 방법으로 멀어져야 한다”는 식으로 충고하였습니다. 또한 대선을 앞둔 9월에 노태우 후보를 초청, 레이건 대통령이 직접 면담을 하였습니다. 미국은 선거 개입 논란을 막기 위해 대통령이 외국의 선거 후보를 만나지 않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기에 매우 이례적인 일로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1971년 1월 당시 김대중 후보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닉슨 미국 대통령이 면담을 거부한 전례가 있습니다.


이후로도 미국은 각종 선거에 개입하였습니다. 그런데 선거 개입 논란을 피하기 위해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모습보다는 누가 당선되든 미국의 요구에 복종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방식을 선호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어 1997년 대선 때 미국은 당시 이슈였던 국제통화기금(IMF) 지원 문제와 관련해 이회창 후보측과 김대중 후보측을 고루 만나 IMF 프로그램의 성실한 이행을 요구하였습니다. 또 선거 막바지에 이르러 김대중 후보가 IMF 재협상을 추진하겠다고 하자 주한미대사관 부대사와 공사참사관이 김대중 후보측 핵심인물들을 만나 “그러한 주장은 한국 경제의 신뢰 회복을 어렵게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김대중 후보는 자신의 입장을 후퇴합니다.


또 후보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어떤 후보가 자신들에게 유익할지 분석하는 작업도 빠짐없이 합니다. 2007년 대선 때는 주한미대사관 관계자들이 KBS 보도본부장과 고위급 기자들을 만나 선거전망과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전달받았던 사실이 위키리크스 폭로 전문에서 드러났습니다. 특히 KBS 보도본부장은 전문에 ‘빈번한 대사관 연락책’으로 분류되어 있었는데 미 대사관이 그를 주요 정보원으로 활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이 이처럼 한국 정치에 깊숙이 개입할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 철저한 준비를 했기 때문입니다. 김민웅 성공회대 교수는 <한겨레21> 제397호에 기고한 ‘미국이여, 낙점하소서?’라는 글을 통해 미국이 어떤 식으로 비밀공작정치를 펼치는지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첫째는 친미세력을 포섭하고 장기간에 걸쳐 육성하는 방식을 씁니다. CIA는 미국에 순응할 세력과 인물, 그리고 유사시 제거 내지 진압해야 할 세력에 대한 정교한 인사파일을 작성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친미인사들을 발굴하고 이들을 미국 유학으로 받아들여 친미, 공미 사상을 주입하는 식이지요.


둘째는 각종 비리사건 정보를 축적하는 방식을 씁니다. 만약 미국의 요구를 거부하는 정치인이 있으면 언론에 비리 사실을 흘리는 것으로 그만입니다. 이명박 대통령도 BBK 사건과 관련해 미국에게 결정적인 약점을 잡힌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습니다. 뭐 약점이 없어도 뼛속까지 친미인 건 변함없지만 말입니다.


셋째는 경제봉쇄로 위협하는 방식을 씁니다. 미국은 원조중단, 국가신용등급 강등 등으로 정치인들을 쉽게 협박할 수 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당선 직후 미국의 신용평가사 무디스가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강등할 수 있다고 하는 바람에 급격히 미국에 굽실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문에 국민들의 비난이 쏟아지자 노 대통령은 동네 부랑배의 바지가랑이속을 기어간 한신의 고사를 거론하며 자신의 처지를 변호하기도 했었죠.


이처럼 미국은 국내에 광범위한 정보망과 친미 인맥을 구축하고서 정부를 자신들 마음대로 쥐락펴락합니다. 그런데 정작 한국은 현행법상 미국을 위해 복무하는 이런 ‘간첩’들을 처벌할 수 없습니다. 형법 제98조에 따르면 ‘적국’을 위하여 간첩행위를 한 사람만 처벌할 수 있는데 미국을 적국으로 분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2006년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이 미국 간첩 행위를 했다고 폭로되었지만 처벌은커녕 조사도 받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한국의 현실이지요.


한국 사회에는 갖가지 모순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선거를 통해 정권을 바꿔 이런 모순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미국에게 구조적으로 예속되어 있는 이런 현실을 간과한 채 정권만 바꿔서는 국민들이 바라는 새 세상을 만들 수 없습니다. 미국이 이 땅에 펼쳐놓은 온갖 간섭의 틀을 제거하고 또 국민들의 요구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실현하는 정부를 세웠을 때 진정한 국민주권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2011.11.8)


<10전11기 목록>

1996년 4월, 민주주의를 생각한다

1996년 8월. 분단을 생각한다

1997년 2월. 신자유주의를 생각한다

1997년 8월. 경제주권을 생각한다

1998년 4월, 집권을 생각한다

1998년 5월. 학생운동을 생각한다

1999년 3월. 미군문제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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