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1997년 2월. 신자유주의를 생각한다

10전11기

by 붉은_달 2011. 5. 24. 06:41

본문

 

신자유주의 도입 후 길거리에는 노숙자가 급증했습니다. 평생직장이란 개념은 사라지고 사오정, 오륙도 같은 가슴 아픈 유행어가 난무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반면 부유층은 더 부유해지는 극심한 양극화 현상도 나타났습니다...


[알림] 5월 24자 <불철주야>는 사정상 <10전11기>로 대체합니다. 27일 금요일 <불철주야>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중국 방문을 분석할 예정입니다. 양해바랍니다.


1997년 2월. 신자유주의를 생각한다


동북아의 문

http://namoon.tistory.com


공포의 크리스마스 선물


1996년 크리스마스 밤을 보내고 다들 잠이 든 새벽, 김영삼 정부는 전 국민에게 기상천외한 선물을 안겨주었습니다. 이른바 ‘노동법,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라는 선물입니다. 당시 여당이었던 신한국당의 국회의원 155명이 모두가 잠든 12월 26일 새벽, 국회에 몰래 기어들어가 안기부법과 노동관계법 개정안 등 11개 법안을 7분 만에 기습 날치기 통과시킨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다음날 아침, 국민들은 뉴스를 통해 이 황당한 소식을 들어야 했습니다.


안기부법 개정안의 골자는 안기부가 국가보안법상 고무·찬양과 불고지죄에 대한 수사권을 다시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과거 안기부가 국가보안법 수사를 한다면서 무고한 시민들을 불법 연행하여 갖은 고문 만행을 저질러 결국 안기부의 수사권을 박탈했는데 김영삼 정부가 이를 되살렸습니다. 노동법 개정안의 골자는 복수노조 금지 연장, 대체근로 허용, 정리해고제, 변형근로시간제 등입니다. 이게 무슨 내용인지는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신한국당의 날치기 통과 소식이 들리자 노동자들은 즉각 총파업에 돌입하였고 수많은 시민사회단체들도 연일 거리 집회를 하면서 김영삼 정권 퇴진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여론조사를 보면 날치기 통과가 잘못이라는 국민이 88.4%에 달했고 노동자 파업은 54.5%가 지지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노동자 파업을 지지하는 국민이 이렇게 많은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결국 국민들의 투쟁에 밀려 신한국당은 날치기 통과한 법안들을 철회하고 야당과 재논의에 들어갔으며 바닥에 떨어진 지지율로 인해 당명까지 ‘한나라당’으로 바꿔야 했습니다. 지금 국민들의 지탄을 받는 ‘한나라당’이 탄생한 배경입니다. 국민들의 눈총을 피해 당명을 바꿨으나 그다지 변한 건 없어 보입니다.


아무튼 당시 대학생들도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법,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를 규탄하는 거리 시위를 연일 벌였습니다.


아마 1997년 2월이었을 것입니다. 그날도 대전지역 대학생들이 대전 한남대학교에 모여 노동법,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 김영삼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를 하였습니다. 집회를 끝내고 거리에 진출하려는 학생과 이를 막는 경찰 사이에 교문에서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충남대 단대 회장 한 명이 경찰에 연행되는 불상사가 일어났습니다. 당시는 개학도 하기 전인데 벌써 연행이 돼서 자칫 구속이라도 된다면 그 단대에는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지요. 그래서 집회에 참석했던 대학생들은 서둘러 교문 대치를 정리하고 항의방문을 하러 경찰서로 이동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교문 충돌 과정에서 한 가지 특이한 상황이 있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됐습니다. 바로 경찰서장 지프차가 파손된 것입니다. 창문에 금이 가고 몸체 곳곳이 찌그러진 정도로, 크게 파손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 사건으로 경찰서장이 매우 화가 났었다고 합니다. 그런 사정도 모르고 수십 명의 학생들은 무방비상태로 경찰서 앞에 항의방문을 갔다가 전원 연행되고 말았습니다. 정말 어이없는 일이었는데 거기에 저도 섞여 있었습니다. 제 일생의 세 번째 연행이었습니다. 물론 항의방문 자체는 법적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아 그날 밤 모두 풀려났습니다. 문제의 단대 회장도 다행히 풀려났습니다.


당시 학생들과 노동자들, 그리고 전 국민을 분노하게 했던 노동법 개악은 한국에 본격적인 신자유주의 도입을 알려주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쉽게 듣고 말하지만 당시만 해도 신자유주의라는 말은 참으로 낯설었습니다.


당시에 제가 ‘신자유주의 반대한다’는 현수막을 두고 비판한 적도 있었습니다. 구호는 대중들에게 우리 주장을 직관적으로 알려주는 수단인데 도대체 학생회 간부들도 그 뜻을 잘 모르는 ‘신자유주의’라는 표현을 왜 구호에 쓰냐면서 말입니다. 지금이야 일반 국민들도 신자유주의의 뜻은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당시에는 그만큼 어려운 용어였습니다.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의 등장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은 1970년대 말 등장한 사조로 각종 규제를 완화하여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보장해야 한다는 노선입니다. 신자유주의는 나라마다 조금씩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데 한국에서는 주로 노동시장 유연화, 작은 정부, 시장경제 중시, 규제 완화, 자유무역협정(FTA) 중시, 공기업 사유화, 공공산업과 공공서비스 사유화 등으로 나타납니다.


신자유주의는 보통 세계화와 짝을 이루는데 세계화란 쉽게 말해 국가 간 장벽을 낮춰 자본과 상품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보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과거 우리나라는 외국 자본이 들어와 투자를 하려면 여러 제약조건 때문에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97년을 거치면서 규제가 대폭 완화되어 지금은 외국 자본이 자유롭게 들어와 주식 투자도 하고, 기업도 인수합니다.


신자유주의 이전에는 케인즈주의가 주류였습니다. 그리고 그 전에는 자유주의가 있었습니다. 즉, 자유주의에서 케인즈주의로, 다시 신자유주의로 넘어온 것입니다.


자유주의란 초기 자본주의 시절에 정부가 자본가들의 경제활동을 간섭하면 안 된다는 주장입니다. 당시는 자본주의 초창기라 실제로 제대로 된 규제가 없었습니다. 자본가들은 값싼 어린아이들을 고용해서 하루 종일 일을 시키고 밥값도 안 되는 임금을 주었습니다. 최저임금 같은 개념이 없는 건 당연하지요. 그러다 아이가 영양실조로 죽어도 고용주는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이런 무질서하고 무절제한 자본의 자유가 바로 자유주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 통제가 안 되니 기업들의 경쟁이 심해지고 결국 과잉생산으로 인해 물건이 팔리지 않게 됩니다. 물건을 사야할 노동자들은 저임금으로 인해 물건을 살 수 없고, 물건이 팔리지 않아 기업은 이윤이 줄어들고, 이윤이 줄어들어 기업은 노동자 임금을 삭감하거나 해고하고, 이로 인해 소비는 더 위축되는 악순환이 계속되면서 기업에 대출해준 금융기관도 파산하고 마침내 공황이 찾아옵니다.


이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케인즈주의가 등장했습니다. 케인즈주의는 쉽게 말해 정부가 경제에 적극 개입하여 무질서한 상황을 통제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정부가 재정지출을 늘려 죽어가는 기업을 살리거나 인수하여 국영기업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사회복지예산을 늘려 국민들의 소비를 촉진합니다. 케인즈주의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면서 자본주의의 위기를 막았고 60년대 고도의 성장을 이끌어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70년대 중반부터 세계적인 스태그플레이션(인플레이션과 경기후퇴가 동시에 나타나는 현상. 다시 말해 경기 불황인데 물가가 계속 오르는 현상)이 시작됩니다. 지나치게 비대해진 과잉자본이 더 이상 이윤을 창출하지 못하고 정체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호시절이 끝나고 경제가 어려워지자 자본들은 정부 규제에 화살을 돌리며 자유를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윤을 늘려야 하고, 이윤을 늘리려면 정부 규제를 없애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대처리즘, 미국의 레이거노믹스가 이렇게 탄생합니다. 1979년 집권한 영국의 대처 총리는 노조와 정부가 영국경제를 뒤처지게 했다면서 집권기간 내내 노조 약화, 정부개입 축소 정책을 펼쳤습니다. 1980년 집권한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인플레이션, 생산성 정체, 국가경쟁력 상실을 막는다며 규제완화, 감세, 노동의 유연화를 추진해 복지예산을 대폭 축소하고 부유층의 세금을 감축하고, 노동조합을 파괴하였습니다.


영국과 미국에서 신자유주의가 먼저 시작된 이유는 양국의 노동자들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노조가 힘이 없어서 먼저 당한 것이지요. 이들 나라는 케인즈주의가 실현될 때에도 노동권 보장이나 사회보장수준이 다른 나라에 비해 취약했습니다.


이처럼 신자유주의의 배경에는 경제위기와 함께 더 많은 이윤을 원하는 자본가가 있습니다. 부자가 더 큰 부자가 되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욕구입니다. 하지만 한 명의 더 큰 부자가 탄생하기 위해 수 만 명의 서민들이 가난해져야 한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흔히 신자유주의를 두고 20:80의 사회라고 합니다. 사회의 20%는 점점 부유해지고, 나머지 80%는 점점 가난해지는 양극화사회가 바로 신자유주의 사회입니다. 왜 그럴까요?


노동시장의 유연화인가, 방임화인가


먼저 신자유주의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축소합니다.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대표적입니다. ‘유연화’라는 표현은 상당히 긍정적인 표현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여기에는 굉장히 무서운 내용이 숨어있습니다.


노동시장이란 노동자를 사고파는 시장을 말합니다. 노동자는 사람인데 지금이 노예시대도 아니고 어떻게 사고팔까요? 사업주가 노동자를 고용하면 그게 노동자를 사는 것이고, 해고하면 그게 노동자를 파는 것입니다. 노동시장은 눈에 보이는 시장이 아니지만 실제 시장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실업자들은 자신을 사달라고 이곳저곳에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보러 다닙니다. 사업주는 입장에서 보면 물건 파는 것보다 노동자 파는 게 더 쉽겠죠? 해고하면 그만이니까.


물론 물건을 사고파는 것과는 다릅니다. ‘노동자’라는 사람을 사고파는 게 아니라 엄밀하게 말하면 노동자의 ‘노동력’을 사고파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노동력’을 제공하는 건 사람입니다. 사업주는 ‘노동력’을 사고팔지만 현실에서는 ‘노동자’라는 사람이 여기저기 팔려 다니는 꼴이 됩니다. 해고당한 노동자와 가족들은 당장 생계를 꾸릴 수 없습니다. 이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시장에 최소한의 규제를 합니다. 즉, 함부로 노동자를 해고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럼 노동시장 유연화가 뭘 뜻하는지 짐작이 가시죠? 바로 노동자를 쉽게 해고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정리해고’입니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정리해고도 함부로 할 수 없게 되어있지만 현실에서 사업주는 간단한 편법을 써서 쉽게 정리해고를 합니다. 요즘은 정리해고가 유행이라 우리 주변에서 정리해고 당한 사람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기업은 정리해고 대신 자발적 퇴직을 ‘강요’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리해고를 남발하면 정부에서 불이익을 주기 때문이죠. 퇴직할 때까지 한직으로 쫓아내고 왕따 시키는 식으로 사실상의 정리해고를 합니다.


한국에 정리해고제가 도입된 이후 수많은 노동자들이 해고를 당해 길거리로 쫓겨났습니다. ‘노숙자’가 급격히 늘어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지금도 많은 노동자들은 언제 해고될지 몰라 두려움에 떨며 일하고 있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평생직장’이란 개념이 일반적이었지만 지금은 ‘사오정(45세가 정년)’, ‘오륙도(56세까지 직장을 다니면 도둑)’ 같은 가슴 아픈 유행어가 난무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노동시장 유연화는 노동자 고용도 쉽게 하도록 해줍니다. 바로 파견근로제와 비정규직을 통해서 말입니다. 파견근로제는 파견업체가 노동자들을 고용한 다음 원하는 기업에 노동자들을 파견해주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하면 파견업체가 중간에 월급의 일부를 가져가니까 노동자들 입장에서는 손해입니다. 하지만 취업이 어려우니 이렇게라도 직장에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노동자들은 기업에 고용된 게 아니라 파견업체에 고용된 것이므로 기업을 대상으로 월급을 올려 달라, 처우를 개선해 달라 요구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노동자들이 파업이라도 하면 기업은 파견업체를 바꾸면 그만입니다.


비정규직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일을 시키는데 월급은 반만 줘도 되고 해고도 쉽습니다. 계약기간 끝나면 계약 연장을 안 한다는 문자메시지 하나 보내면 끝입니다. 게다가 같은 사업장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일하기 때문에 차별대우를 통해 둘 사이를 이간질하기 쉽습니다.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보며 상대적으로 안정된 자신의 처지를 위로할 수 있습니다. 사업주 입장에서는 정규직의 불만도 잠재우고, 노동자들을 분열시켜 파업도 무력화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라 할 수 있습니다.


노동시장 유연화를 통해 기업가들은 노동자들을 일단 정리해고 한 다음, 필요한 수만큼 비정규직으로 다시 고용합니다. 그러면 노동자들에게 들어갈 돈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윤을 늘립니다. 이윤이 늘어나면 배당도 늘어나니까 주주들도 좋아하고 주가도 오릅니다.


자본가들에게는 환상적인 제도지만 노동자들에게는 지옥 같은 제도가 바로 노동시장 유연화입니다.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파업과 같은 정당한 권리도 행사할 수 없고, 낮은 임금으로 궁핍한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제도를 ‘유연화’라는 긍정적 단어로 표현하는 게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아니라 ‘노동시장의 방임화’ 정도가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노동시장 유연화와 함께 신자유주의는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인 파업의 권리를 가로막습니다. 앞서 본 파견근로제나 비정규직 제도도 파업권을 가로막습니다만 직접적인 제도로 대체근로 허용 제도가 있습니다. 이 제도는 노조에서 파업을 할 때 사업장에 다른 노동자들을 투입하여 일을 계속 시킬 수 있는 제도입니다. 즉, 노조가 파업을 하든 말든 기업주 입장에서는 별다른 타격이 안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노조의 파업을 무력화할 수 있는 무서운 무기입니다. 노동자의 파업권은 헌법이 보장한 노동3권 가운데 하나인데 이를 무력화한다는 건 결국 헌법을 무시하고 노동권을 짓밟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 밖에도 변형시간근로제를 통해 사업자가 필요에 따라 근무시간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즉, 일이 많을 때는 하루 10시간을 일하고, 일이 적을 때는 하루 6시간만 일하는 식입니다. 물론 전체 작업시간 총량은 정해진 시간을 초과할 수 없습니다. 사업자 입장에서는 효율적이겠지만 노동자 입장에서는 매우 힘든 제도입니다.


이처럼 신자유주의는 노동자들을 생의 벼랑 끝으로 밀어내는 무서운 제도입니다. 우리나라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의 삶이 어려울수록 서민들의 삶도 빈곤으로 빠지고 양극화는 더욱 심해집니다.


공기업 민영화인가, 사유화인가


신자유주의는 노동자와 서민에게만 피해를 입히는 게 아닙니다. 나라 경제 전체를 파멸로 몰아넣습니다. 공기업 민영화와 시장개방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공기업 민영화는 국가가 소유한 기업을 민간인에게 넘겨 경영 효율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추진됩니다. 물론 공기업은 경영을 잘하든 못하든, 즉 수익을 내든 말든 세금으로 먹고살 수 있기 때문에 경영이 방만하기 쉬운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를 민영화하는 게 올바른 해법일까요? 이는 애초에 공기업을 만든 기본 취지에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공기업은 국가의 주요 산업이나 공공의 이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분야를 국가가 직접 통제하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즉, 국익과 공익을 위해 만든 게 공기업입니다. 따라서 공기업은 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민간 기업과는 근본부터 다릅니다. 공기업 민영화는 이런 목적에 배치되어 결국 심각한 문제를 일으킵니다.


예를 들어 미국 캘리포니아 주는 2000년에 전력산업을 민영화하였는데 단 1년 만에 전력 도매요금이 10배, 피크 때 최대요금은 약 30배 급등하였습니다. 그런데 도매가격만큼 소매가격을 올릴 수 없어서 결국 전력회사들이 파산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마침내 2001년 1월 18일 캘리포니아 시내에서 단전으로 인해 공장과 사무실이 멈추고 샌프란시스코, 새크라멘토 등에서는 교통신호와 자동현금인출기가 멈추는 등 대규모 전력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약 천만 명의 시민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결국 캘리포니아 주의회가 엄청난 공적자금, 즉 세금을 투입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 밖에도 철도, 수도, 우편, 통신 등을 민영화했다가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하여 결국 다시 국유화하는 경우도 세계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처럼 문제 많은 공기업 민영화를 정부는 자꾸 추진하는 걸까요? 투자처를 원하는 자본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존 산업은 이미 포화상태라 넘치는 자본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투자처를 요구합니다. IT 산업, 벤처붐도 이런 이유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또 BRICS(미래 성장이 기대되는 신흥 국가들인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지칭하는 용어)에 투자붐이 일어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튼 공기업은 보통 규모가 크기 때문에 공기업을 민영화하면 많은 민간 자본을 흡수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일각에서는 공기업 민영화라는 표현 대신 ‘공기업 사유화’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공익을 위한 기업을 사익을 위한 기업으로 전락시켰다는 뜻이지요.


공기업 민영화는 국민 전체가 누려야 할 공익을 훼손하는 것 말고 국부를 유출하는 문제도 가지고 있습니다. 민영화 과정에서 외국자본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2001년 한국담배인삼공사가 KT&G로 민영화된 후 8년이 지난 2009년에 외국인 지분율이 무려 62.1%나 치솟았습니다. 공기업은 아니지만 자본주의 경제에서 핵심적인 기능을 하는 은행들도 모두 외국자본에 넘어갔습니다. 현재 국민은행, 신한은행, 하나은행, 외환은행 등 주요 은행을 소유한 금융지주회사의 외국인 지분율은 50%를 넘고 심지어 75%를 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국가의 주요 산업과 공익을 위해 보호해야 할 산업이 외국인들에게 넘어가고 맙니다. 2010년 외국인 투자자가 배당금으로 챙긴 액수만 5조 원 가량 된다고 합니다.


공기업 민영화보다 더 무서운 건 따로 있습니다. 바로 의료와 교육까지 시장경제 논리로 취급된다는 점입니다.


의료는 인간의 생명과 직결되며 교육은 개인의 운명은 물론 국가의 미래가 달린 일입니다. 따라서 의료와 교육만큼은 시장논리가 적용되지 않으며 국가가 책임지고 국민들에게 보장합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가 들어오면서 의료도 민영화되고 개방되어 국민들의 건강주권이 사라지고 돈 많은 자 고급 의료서비스를 받고 돈 없는 자 병원 밖에서 죽어야 하는 세상이 열리고 있습니다.


교육은 더 심각합니다. 교육을 하나의 서비스산업 취급하면서 ‘소비자’가 ‘비용’을 지불한다는 논리로 학생들에게 엄청난 교육비를 요구합니다. 대학은 기업이 입맛에 맞게 교육과정과 학사행정을 바꾸고 있으며 대학생들은 해년마다 급등하는 등록금을 감당하지 못하고 아르바이트 전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 좋은 학벌을 위해 초등학생, 유치원생들부터 사교육에 매달리고 입시공부를 합니다. 이 모든 게 바로 신자유주의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된 결과입니다.


신자유주의의 대안은 무엇인가


이처럼 무시무시한 신자유주의도 이제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이 2008년 금융공황으로 파산 지경에 이르고, 미국을 추종하던 미국과 여러 국가들이 동반 몰락하면서 여기저기서 신자유주의의 종말을 이야기합니다. 아니, 신자유주의를 넘어 자본주의의 최후를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실 신자유주의는 무절제한 탐욕과 비인간적 상품화 등 자본주의의 문제점들을 극대화시키는 제도로 결코 오래 유지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문제는 신자유주의의 대안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다시 케인즈주의로 돌아가면 될까요? 물론 일부 경제학자들은 ‘다시 케인즈주의’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실패한 제도를 이제 와서 되살리는 건 임시방편은 될지 몰라도 결코 좋은 처방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세계는 신자유주의의 대안이라며 등장한 새로운 경제이론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 기본소득 제도, 중국식 해법, 21세기 사회주의, ... 문제는 신자유주의가 나라마다 다르게 적용된 것처럼 신자유주의의 대안도 결코 동일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우리 처지에 맞는 처방을 해야 합니다. 이제껏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가다 이지경이 됐는데 똑같은 오류를 반복할 수는 없지요.


그럼 우리 처지에 맞는 대안은 무엇일까요? 저는 신자유주의의 대안을 제시할 만큼 대단한 능력자는 아닙니다. 다만 대안을 찾는 데 중요하게 고려할 단편적인 고민들만 제시해보겠습니다.


첫째, 원인에서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지금의 경제 위기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이 상품이 거래되는 시장에 모든 것을 맡겨버린 시장만능주의에서 출발합니다. 따라서 사회와 국가의 역할을 높여 시장의 횡포, 더 정확히는 자본의 횡포를 막아야 합니다. 그것이 경제가 살고, 국가가 살고, 심지어 자본도 망하지 않는 길입니다. 아이를 억압하지 않고 자유롭게 키우는 게 좋아 보이지만 그렇다고 자유방임 식으로 키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람과 짐승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자본도 적절히 통제하지 않으면 야수처럼 난폭해집니다.


또한 지금의 경제 위기는 외국의 간섭과 외국 자본에 대한 의존에도 원인이 있습니다. 애초에 한국의 신자유주의는 외국의 압력에 의해 강제 이식된 부자연스러운 신자유주의였습니다. IMF 사태에 미국이 의도적으로 개입했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몸이 아프다고 짐승의 장기를 이식하니 몸이 낫기는커녕 거부반응 때문에 더 허약해졌습니다. 이제는 외국 자본에 의존하지 말고 자립 경제로 돌아설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외국의 경제 압력에 무방비로 당하지 않을 길을 찾아야 합니다.


둘째,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말자는 것입니다.


지금의 경제 위기는 경제 정책 몇 가지 조정한다고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임시방편으로 환율이니, 금리니, 세금이니 손본다고 해결될 문제면 왜 세계 각국이 이 난리겠습니까? 이제는 경제 정책 몇 가지 가지고 옥신각신할 게 아니라 과감한 경제 노선 변화를 고민해야 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일부, 특히 현 기득권 세력들은 피해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불가피합니다. 석유 산업으로 먹고 사는 이들을 위해 대체 에너지 개발을 금지하면 어떻게 될지 뻔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현 기득권 세력들은 지금의 경제 위기에 결코 책임이 없지 않습니다.


과감한 경제 노선 변화가 기득권 세력의 피해를 불가피하게 불러오기 때문에 기득권층은 언제나 ‘개혁’이라는 단어에 민감합니다. 심지어 기득권 세력은 초등학생 무상급식 같은 복지 확대정책을 두고도 사회주의 정책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저 조금이라도 서민들을 위해 경제 정책을 바꾸자고 하면 사회주의니, 친북좌파니 떠듭니다. 이런 비난을 일일이 신경 쓰며 주저하다가는 결코 진보할 수 없습니다.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말자는 데는 시야를 넓히자는 뜻도 있습니다. 한국 경제만 생각하니 대안이라고 나온 게 ‘한반도 대운하’ 같은 허황된 공약입니다. 이제는 눈을 키워 한반도 경제, 민족통일경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남북경제공동체는 이미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에서 합의한 내용입니다. 지금이야 이명박 정부의 등장으로 중단됐지만 남북경제공동체는 경제 성장에 미치는 효과만 고려해도 반드시 실현해야 합니다.


셋째, 경제에서 서민이 중심에 서야 한다는 점입니다. 즉, 경제에서도 민주주의를 하자는 것입니다. 경제에서 민주주의는 링컨식 표현대로 하자면 서민의, 서민에 의한, 서민을 위한 경제 정도가 되겠지요.


제가 왜 국민이 아니라 서민이란 표현을 썼을까요? 지금의 경제는 기득권층의, 기득권층에 의한, 기득권층을 위한 경제이기 때문입니다. 기득권층이 차지한 경제를 서민들이 되찾아올 때 진정 경제 민주주의가 실현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서민들의 대표가 대통령이 되고, 서민 출신이 장관이 되고, 서민을 대변하는 정당이 국회 다수당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실제 서민들의 뜻에 따라 경제 노선과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해야 합니다. 국익과 공익에 직결되는 주요 산업은 국유화하거나 사회가 소유하도록 해야 합니다. 경제 성장의 성과를 서민들이 누릴 수 있게 하여 다시 성장을 촉진하는 선순환이 이루어지게 해야 합니다.


신자유주의 시대는 끝이 났습니다. 더 이상 사회 양극화로 비관 자살하는 서민들이 나와서는 안 됩니다. 21세기는 새로운 시대입니다. 신자유주의가 아닌, 서민들이 경제성과의 혜택을 받는 그런 사회가 등장하기를 기대해봅니다. (2011.5.24)


동북아의 文은 진실이 담긴 문장으로 동북아 정세를 분석합니다.

동북아의 門은 동북아의 평화번영으로 향하는 문입니다.

동북아의 Moon은 어둠을 밝히는 달처럼 동북아 미래를 밝힙니다.


<10전11기 목록>

1996년 4월. 민주주의를 생각한다

1996년 8월. 분단을 생각한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