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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4월, 민주주의를 생각한다

10전11기

by 붉은_달 2011. 2. 22.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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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4월 어느날로 기억합니다. 15대 총선을 앞두고 한창 선거운동이 막바지를 달릴 무렵이었습니다. 당시 대전에서 대학을 다니던 저는 총선이라는 공간을 활용해 진보적인 주장들을 펼칠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1996년 4월, 민주주의를 생각한다


1996년 4월 어느날로 기억합니다. 15대 총선을 앞두고 한창 선거운동이 막바지를 달릴 무렵이었습니다. 당시 대전에서 대학을 다니던 저는 총선이라는 공간을 활용해 진보적인 주장들을 펼칠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 때만 해도 지지할만한 진보정당도 없었고 낙선운동이란 것도 없었고 인터넷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보수정당들이 막대한 돈과 조직력을 동원해 수구, 반민주정책들로 여론을 장악하는 동안 일반국민들이 선거에 자기 뜻을 펼칠 방법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뜻있는 학생들은 나름대로 만든 포스터를 붙이거나 유인물을 돌리곤 했습니다. 하긴 선거철에 정부정책을 비판하면 구속되는 일은 요즘도 비일비재하더군요.


아무튼 선거운동이 한창일 때 뜻이 맞는 학생들과 저는 당시 김영삼 정부와 집권여당이었던 신한국당(한나라당의 전신입니다), 그리고 지역 보수정당이던 자민련(지금은 사라졌죠)을 비판하는 포스터를 붙이기로 약속을 하고 새벽에 모였습니다. 인적이 없는 새벽을 이용한 것은 공권력의 일방적 단속을 피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여당인 신한국당이나 자민련 선거운동원들을 피하자는 게 더 컸습니다. 밤늦게 감시의 눈길을 번뜩이는 이들 가운데는 돈 받고 일하는 조직폭력배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걸리면 고생을 하게 됩니다. 일행과 함께 택시를 타고 포스터를 붙일만한 공간으로 이동하는 우리는 온 몸을 엄습하는 긴장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윽고 대전 변두리에 내린 우리는 정말 100m도 못가서 습격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골목길에서 검은색 고급승용차 두 대가 다가와 우리 앞에 서더니 덩치 좋은 아저씨들이 우르르 내려 우리를 둘러쌌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밤에 차가 제 앞에서 멈춰서면 지나치게 경계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아무튼 잠시 실랑이를 벌이던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뛰어!”하고 소리를 지르자 우리는 모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아니 흩어지지 못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모두 붙잡히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한 후배만 유일하게 도망쳤는데 마치 뱀이 허물을 벗듯이 조폭에게 잡힌 잠바를 벗고 몸만 빠져나갔습니다. 그러나 이 후배는 우리가 걱정되어 주변을 돌아보다가 결국 다시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지하실에 끌려가 집단구타를 당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야당쪽 조직원으로 오해한 듯 했습니다. 그렇게 밤새 붙들려 있다가 아침이 되자 경찰들에게 인계되었습니다. 경찰의 얼굴이 보이자 어찌나 안심이 되던지요. 참 역설적인 상황이었는데 이게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경찰에 연행된 경험입니다.


진짜 민주주의란 무엇일까요


당시 자민련 후보였던 이 아무개씨는 지역에서도 알아주는 유지였습니다. 흔히 토호세력이라 불리는 인물입니다. 지역을 대표할만한 큰 건설회사도 가지고 있고 지역 상공회의소 회장도 한 지역 유지이며 이미 국회의원도 한 번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또 이씨는 고등학생 시절 한국전쟁을 겪었는데 학도병에 자원입대했다가 미국 유학까지 갔다 왔습니다. 공병대에 근무한 경험으로 나중에 건설사도 창업하였습니다. 전형적인 보수 정치인 과정을 밟은 셈입니다.


보수정당에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몇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이씨처럼 돈이 많아서 정치에 뛰어든 사람, 검사나 군인, 고위공무원을 하다 정치인들에게 발탁된 사람이 예전에는 다수였는데 요즘에는 전문적으로 정치인 준비를 한 인물들도 많더군요. 돈이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재산을 모으기 위해 정치인과 결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치자금을 대주면 정치인은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손을 쓰는 식으로 공생관계를 유지합니다. 그러다 나이가 들면 기업을 자식이나 부하들에게 넘겨주고 직접 정치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정치를 하는 것이 돈과 명예를 더 크게 쥘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이런 사람들이 주로 모여 정치를 하기 때문에 한국 정치는 결코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은 ‘민주주의’를 ‘선거’와 동일시합니다. 즉 자유, 평등, 비밀의 원칙이 보장되는 선거가 실시되면 그것이 곧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나아가 자치단체장과 지역의회 의원, 교육감까지 선거로 뽑는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에 몇 점이나 줄 수 있을까요? 군부독재에서 벗어나며 그나마 점수가 좀 오르다 이명박 정부 들어 다시 떨어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무래도 선거를 많이 한다고 민주주의 수준이 높아지는 건 아닌가 봅니다.


신영복 교수는 자신의 저서 ‘더불어 숲’에서 민주주의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제우스의 심복인 크라토스(힘)를 데모스(人民)가 쟁취하는 것. 이것이 데모크라시입니다. 정대권력에 대한 인민의 도전, 귀족에 대한 평민의 저항, 이 도전과 저항이... 곧 민주주의라는 선언입니다.”


민주주의를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백성(民)이 주인(主)이 되는 이념인데 주인이라면 당연히 그 사회에 대한 지배권, 결정권이 있고 이를 행사할 권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국민들 모두가 직접 주인 역할을 하기엔 수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국민들은 선거를 통해 자신들의 대표자를 뽑고 이 대표자들에게 자기 역할을 위임합니다. 이런 제도를 간접 민주주의 혹은 대의 민주주의라고 합니다.


그러면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정말 국민을 대표하고 있을까요? 별로 그래보이진 않습니다. 앞서 본 것처럼 선거로 뽑힌 사람들은 대부분 다수 국민을 대표하기보다는 소수 권력자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이를 확인하는 방법은 단순합니다. 국회의원 출신 성분 비율을 보면 됩니다.

 

가장 최근인 18대 국회의원(2009년 10.28 재보선 이후)의 출신 직업을 분석해보면 법조인이 20%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정당인(당 간부나 의원 보좌관 출신 등)으로 15%, 일반 공무원 14%, 언론인 12%, 교수 등 지식인 8.5% 등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노동자(도시 근로자) 출신은 3명으로 고작 1.0%, 농민 출신은 1명으로 0.3%에 불과합니다. 노동자가 우리나라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지만 노동자 출신 국회의원은 거의 없습니다. 요즘은 그나마 민주노동당이라는 진보정당 덕에 몇 명 있지 과거에는 전무하다시피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선거라는 제도 자체에 맹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선거는 돈, 조직, 바람이 있어야 이긴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조직도 돈이 많아야 확장을 쉽게 할 수 있고 바람은 언론을 틀어쥔 집권층이 일으키기 쉽기 때문에 결국 선거 결과는 민심의 반영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역학관계의 반영이기 쉽습니다. 쉽게 말해 재벌들이 누구를 지지하는지, 강남 땅 부자들이 누구를 지지하는지가 선거 결과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말입니다. 나아가 우리나라에 이해관계가 있는 미국, 일본의 입김도 중용합니다. 대통령을 하려면 미국에 잘 보여야 한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닙니다. 또 미국 유학은 기본이죠.


그나마 요즘은 교육수준이 올라가고 인터넷이 발달하여 국민들이 현명한 판단을 하는 편입니다. 과거에 비해 진정한 민심이 많이 반영된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여전히 선거 결과를 보면 국민을 진정으로 대변하는 당선자가 극소수입니다.


이처럼 선거는 국민들에게 민주주의가 구현되고 있다고 믿게 하는 눈속임의 효과가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선거를 하지 말자는 얘기는 아닙니다. 선거만으로는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다운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민주주의의 핵심은 표현의 자유입니다


우선 국민들이 정치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어야합니다. 정치참여가 꼭 정당 활동을 하거나 선거에 출마하는 걸 뜻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견해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부터 정치입니다. 따라서 저는 민주주의 구현에서 가장 중요한 건 표현의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표현의 자유하면 사상의 자유가 항상 따라다닙니다. 생각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표현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겠죠. 또 표현하지 못하면 생각은 아무 소용없고 생각 자체도 발전 할 수 없습니다. 생각, 사상은 개인이 하기도 하지만 집단적으로 이뤄질 때 더 빨리 성장하니까요. 집단지성이라고 하죠. 그래서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는 항상 쌍으로 다닙니다.


일단 우리나라는 표현의 자유가 무척이나 제약받고 있습니다. 당장 가까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작년 11월에 서울에서 G20 정상회의 홍보 포스터에 쥐 그림 낙서를 했다는 이유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일이 있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황당해하였습니다.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을 낙서로 표현한 것인데 공권력은 낙서조차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검사는 낙서를 한 강사를 재판에 붙였습니다. 이 사건은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억압받는지 잘 보여줍니다.


익명성이 보장되기에 표현의 자유가 가장 잘 보장된다는 인터넷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2010년을 뒤흔든 ‘천안함 사고’와 관련해 정부 공식 발표에 비판적인 글이나 UCC를 올린 이들이 수사대상이 되고 심지어 구속까지 당한 사례가 있습니다. 공무원이 대포폰을 사용해 파문을 일으킨 영포게이트 민간인 사찰 문제도 발단은 정부를 비판한 인터넷 게시물이었습니다.


표현 가운데 가장 적극적인 형태 가운데 하나인 집회와 시위도 심각한 제한을 받고 있습니다. 헌법과 ‘집회 시위에 관한 법률’은 분명 집회를 ‘신고제’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집회를 하고 싶으면 신고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허가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온갖 제약조건을 들이대며 집회 신고를 받지 않는 편법을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항상 경찰이 언론에 나와 ‘불법시위를 엄단 하겠다’고 협박합니다. 집회 시위가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보장할 의무가 있는 경찰이지만 이들은 모든 시위를 일단 불법으로 간주하는 못된 습성이 있습니다. 2008년 장엄한 촛불도 다 ‘불법’이라며 탄압받았습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다보니 ‘시위는 원래 불법’이라는 인식까지 생겼습니다. 한 선생님이 자기반 학생들에게 물어보니 절반 정도가 ‘시위는 원래 불법’으로 알고 있었으며, 시위가 헌법에 보장된 권리라고 알려줬더니 다들 놀랐다고 합니다.


이 밖에도 학문·예술·언론·출판 등 여러 분야에서 표현의 자유가 침해받고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법도 다양합니다. 과거에는 주로 국가보안법에 의존했습니다. 국가보안법에는 ‘고무·찬양’이라는 무시무시한 죄목이 있는데 그 활용방도는 무궁무진합니다. 정부 마음에 들지 않는 표현물(글이든 예술품이든 뭐든)이 있으면 그 내용이 북한의 주장과 동일하다며 북한을 ‘고무·찬양’했다고 하면 그만입니다.


예를 들어 천안함 사고 원인이 북한이 아닌 것 같다고 인터넷에 글을 올려봅시다. 북한은 천안함 사고와 자신들이 무관하다고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인터넷에 올린 글은 ‘이적표현물’이 되고 글쓴이는 ‘고무·찬양’을 했기에 처벌받습니다. 그 글을 자기 블로그에 퍼 올리면 이적표현물 소지죄가 됩니다.


심지어 가사가 없는 연주곡을 파일로 가지고 있어도 북한 연주곡이면 이적표현물 소지죄가 성립합니다. 선율만으로 어떻게 ‘고무·찬양’하냐고요? ‘선율에도 사상이 있다’는 대법원 판례가 최근에 나왔습니다. 과연 대법원은 ‘선율에도 사상이 있다’는 이론이 북한의 음악 이론이라는 것도 알았을까요?


국가보안법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데 여전히 좋은 도구지만 남용한다는 비난이 계속 나오기 때문에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새로운 법을 많이 활용합니다. 대표적으로 2008년 ‘미네르바’ 사건으로 유명해진 전기통신기본법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인터넷을 위축시키는데 매우 효과적입니다. 시위를 탄압할 때도 도로교통법 따위를 적용해 집회 시위에 관한 법률 상 무죄가 나와도 벌금형을 내릴 수 있도록 올가미를 걸어놓습니다.


이처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법들을 제거해야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국가보안법은 그 남용 사례가 너무 많아 하루 빨리 폐지해야 합니다. 혹자들은 국가보안법이 사라지면 간첩을 못 잡는다고 하는데 형법으로도 충분히 잡습니다. 국가보안법 없는 나라들은 간첩을 어떻게 잡겠습니까?


이렇게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질적 도약을 이룰 것입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면 국민들이 자기 주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지만 그 영향력은 여전히 미미합니다.


여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건 역시 언론입니다. 인터넷의 발달로 영향력은 줄었지만 여전히 언론의 힘은 막강합니다. 그래서 언론을 제3의 권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수 언론은 국민들의 목소리를 올바로 대변하지 않습니다. 정부와 재벌의 눈치를 봅니다. 정부에게 잘못 보이면 세무조사를 당하든 뭔가 보복당할 수 있습니다. 재벌에게 잘못 보이면 광고가 끊깁니다. 실제로 2008년에 국민들의 목소리를 왜곡한 수구언론인 조선일보(혹자는 언론이 아니라 찌라시라고도 합니다만)를 압박하기 위해 누리꾼들이 조선일보 광고주들을 압박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둔 사례도 있습니다(광고주 제품 불매운동은 불행이도 불법으로 판결을 받았습니다. 군사독재시절은 물론이고 일제 강점기에도 물산장려운동이라고 하여 일제 상품 불매운동을 했는데 말입니다).


이명박 정부도 언론을 길들이기 위해 가장 먼저 자기측근인 최시중씨를 방송통신위원장에 앉히고 미디어법을 개악하려고 국회에서 대리투표까지 저질렀습니다. 지금 대부분의 방송, 신문들이 이명박 정부의 홍보기관으로 전락한 상황입니다.


따라서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는 언론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언론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언론이라 부를 수도 없는 사이비 언론들을 퇴출시켜야 합니다. 조중동 구독거부 등을 통해 이들을 심판해야 합니다. 나아가 위헌적인 미디어법 등 잘못된 법·제도, 정책을 바로잡고 부적절한 언론분야 관료들을 교체해야 합니다. 정권의 하수인으로 된 각 언론사의 낙하산 인사를 거부하는 언론사 노동조합의 활동을 지지하는 것도 필요하겠습니다. 궁극적으로 헌법을 손봐야 한다고 봅니다. ‘언론의 자유가 있다’가 아니라 ‘언론은 진실을 말할 자유가 있다’ 이렇게 말이죠. 언론에게 거짓을 말할 자유까지 줄 수는 없죠. 실제로 베네수엘라는 저렇게 헌법을 바꿨다고 합니다.


경제에도 민주주의가 있습니다


자, 표현의 자유도 확보했고 언론도 바로잡았으니 민주주의가 완성된 걸까요?


아직 부족합니다. 많은 성과인건 맞지만 여기까지는 정치분야의 민주주의에 불과합니다. 경제분야에서도 민주주의가 실현되어야 합니다. 정치분야의 민주주의가 ‘국민이 정치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면 경제분야의 민주주의는 ‘국민이 경제의 주인이 되는 것’이겠죠? 경제력은 물질적 힘입니다. 경제력이 있어야 정치에서도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재벌들이 국민들보다 정치에 훨씬 막강한 영향을 발휘하는 이유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경제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재벌들이 경제를 쥐락펴락하고 있죠. 재벌과 유착된 정치인들도 재벌들을 위해 경제정책을 펼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주요 기업이나 은행이 경영을 방만하게 하여 망할 지경이 되면 정부는 국가 경제에 타격이 된다면 국민의 혈세인 공적자금을 투입해 기업, 은행을 살려놓습니다. 그렇게 살려서 민간에 다시 매각합니다. 이를 통해 채권단은 막대한 이득을 남깁니다. 외국 투자기업이 기업, 은행을 사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들을 알짜기업을 헐값에 사들여 비싸게 되파는 수법으로 막대한 차익을 남기고 사라집니다. ‘먹튀’하는 거죠. 정부는 이 모든 과정을 적극 지원합니다.


이렇게 국민의 혈세가 재벌과 외국 투기꾼들에게 밑 빠진 독에 물 들어가듯 흘러 들어가지만 누구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고통분담’이란 명분으로 힘없는 노동자·서민·자영업자들만 직장을 잃고 파산하여 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경제의 주인이어야 할 국민들이 고통 받는 동안 재벌과 외국 투기꾼들은 계속 부를 축적합니다. 대표적 사례가 수년 전 파란을 일으킨 론스타 사태입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분야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면 이른바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해 민영화된 공기업들을 다시 국유화하고 외국 투기자본을 통제해야 하며 재벌을 개혁해야 합니다. 농지는 농사짓는 농부가 소유해야 하고 집은 거주하는 사람이 소유해야 합니다.


특히 주요산업을 국유화하는 게 중요합니다. 공기업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기업이며 국가 경제의 명맥이 되는 주요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업입니다. 따라서 사익을 추구하는 민간기업에게 넘겨주면 국민 전체가, 국가 전체가 피해를 입게 됩니다. 수도를 민영화했다가 수도요금이 폭등한 사례, 전기를 민영화했다가 기업 파산으로 전기공급이 중단된 사례, 철도를 민영화했다가 비용절감을 위해 안전검사를 하지 않아 대형 열차사고로 이어진 사례 등 공기업 민영화의 폐해를 보여주는 해외 사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주요 산업이 국유화되어야 소수에게 이익이 집중되지 않고 국민 전체가 혜택을 볼 수 있습니다.


재벌 개혁도 중요합니다. 재벌의 무분별한 사업확장과 독과점은 사회양극화를 유발하고 중소규모 토착기업들과 자영업자들의 몰락을 불러오고 있습니다. 재벌들의 과도한 무역의존도 문제입니다. 비싼 값에 원료를 수입해 완제품을 만든 위 국내 내수시장엔 비싸게 팔고 수출은 싸게 하는 방식으로 국부를 유출하고 있습니다. 또한 외국기업과의 다양한 제휴·합작, 대기업 주식의 상당량이 외국 투기자본 소유라는 점 등을 보면 재벌이 과연 우리나라 기업인지 의심스럽기까지 합니다. 재벌 개혁을 통해 중소규모 토착기업을 보호·육성하고 내수시장을 키우는 게 한국 경제 체질을 튼튼하게 하는 길이며 소수 부유층이 아닌 국민 전체를 위한 경제를 만드는 길입니다.


경제분야 민주주의 실현에서 강조하고 싶은 건 반드시 정치분야 민주주의 실현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경제분야 민주주의 실현 목표를 보면 재벌과 부유층들의 완강한 저항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정부가 강한 의지를 갖고, 정치권이 강력히 호응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이에 비해 정치분야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바라는 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이며 극소수 극우·수구 독재세력만 반대할 내용입니다. 따라서 정치분야 민주주의를 실현한 후 힘을 키워 경제분야까지 민주주의를 확대해야 하겠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정치분야 민주주의를 실현할 때까지 경제분야 민주주의를 추진하면 안 된다는 건 아닙니다. 추진은 같이 하지만 실현순서가 있다는 말입니다.


정치·경제분야 민주주의 실현과 함께 그밖에 산적한 사회 전반에 대한 민주주의도 실현될 때 비로소 우리나라가 ‘국민이 주인된 사회’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한 명 한 명이 나라의 주인이 되겠다는 자세와 적극성을 가진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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