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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8월. 경제주권을 생각한다

10전11기

by 붉은_달 2011. 7. 1.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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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은 학생운동 입장에서 항쟁의 해였습니다. 당시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은 김영삼 정권 퇴진을 목표로 다단계 총궐기를 통한 전민항쟁을 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김영삼 정권은 초기에 금융실명제 실시, 전두환·노태우 처벌 등 일부 개혁적인 모습도 보여주었지만 집권 중반을 넘기면서 급격히 퇴행하여 과거 군사독재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정권으로 전락하였습니다. 학생운동, 노동운동 단체 등 정권에 비판적인 세력을 공권력으로 짓밟고 남북관계를 전쟁 접경으로 몰아갔으며 신자유주의의 무리한 도입으로 경제를 파국적 상황으로 가져갔습니다. 지금의 이명박 정부와 매우 흡사한데 아무튼 이런 이유로 한총련은 김영삼 정권 퇴진을 요구한 것입니다.


동석이 어딨어?


이미 1996년 여름 연대항쟁을 통해 학생운동 탄압을 전면화한 김영삼 정부는 더욱 막대한 공권력을 쏟아 부으며 학생운동을 궤멸시키려 하였습니다. 정부는 한총련 해체가 학생운동 궤멸의 핵심이라 판단하고 한총련 대의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습니다. 한총련 대의원은 각 대학의 총학생회장단과 단과대 학생회장까지입니다. 단과대 학생회장이라면 그가 무슨 일을 했건 일단 수배자가 되어야 했고 체포되면 한총련 탈퇴를 강요받았습니다. 한총련은 개인이 가입하는 게 아니라 학생회가 가입하는 것이므로 개인의 탈퇴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지만 정부는 그런 논리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한총련 탈퇴서’를 받아냄으로써 한총련을 와해시킬 수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당시 대전에서 학생운동을 하던 대전총련(대전지구대학총학생회연합) 대의원과 간부들은 정권의 탄압에 맞서 여름방학 동안 집단 농성에 돌입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방학기간 학교에 학생이 많지 않은 상황을 이용해 경찰이 학교를 침탈해 대의원을 체포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전지역의 한총련 대의원들과 간부들 백 수십 명이 충남대학교 학생회관에서 매일 밤을 지새우며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학교 정문과 후문, 쪽문에서 밤새 경비도 세웠습니다. 그러나 농성은 오래 갈 수 없었습니다.


농성을 시작한 지 며칠 후 어느 날 새벽이었습니다. 밤새 후문 규찰을 서고 해가 뜨자 저는 학생회관에 돌아가 눈을 붙이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밖이 소란스럽더니 ‘침탈이다!’는 고함소리가 들렸습니다. 밤새 출입문을 지키다 해가 뜨면 규찰을 서지 않는다는 점을 파악한 경찰들이 해가 뜨자마자 전경버스로 학내에 들어온 것입니다. 당시만 해도 전경버스가 학내에 들어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군사독재 시절에나 있던 일이 눈앞에 펼쳐졌는데 모두들 한동안 그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당시 운동장에서 아침체조를 하던 규찰대 학생들은 자기들 앞으로 전경버스가 지나가는데도 도망갈 생각을 못하고 멍하니 쳐다만 보다가 한 간부가 흙을 쥐어뿌리며 도망가라고 소리를 지르자 그때서야 도망갔다고 합니다.


아무튼 학생회관에 있던 학생들은 출구가 막힌 상태에서 혼비백산 했습니다. 그 와중에 저는 가방에 있던 문건들을 폐기해야 한다는 생각에 화장실로 달려갔습니다. 그러자 다른 학생들이 저를 따라 우르르 몰려오더군요. 아마 제가 출구를 알고 있는 줄 여겼나봅니다. 정말 황당한 순간이었습니다. 화장실에 몰려든 학생들 가운데 일부가 창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내렸습니다. 저는 겁이 나서 도저히 못 뛰어내렸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뛰어내린 사람들도 모두 밖에 있던 경찰들에게 연행됐다고 합니다. 학생회관에 진입한 경찰들은 실탄까지 쏘면서 학생들을 연행했습니다. 당시 천정에 총알구멍이 나는 걸 봤는데 그게 아직도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경찰은 연행된 학생들을 학생회관 옆 공터에 모두 무릎 꿀렸습니다. 그리고 당시 대전총련 의장이었던 김동석 학생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여기 동석이 있나? 동석이 어딨어?”하자 갑자기 제 뒤에 있던 후배가 “여기요” 하면서 손을 들었습니다. 후배 이름이 ‘봉석’인데 헷갈린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도 어찌나 우습던지... 이렇게 저의 네 번째 연행 경험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학교에 들어가면 ‘폭력행위’로 처벌받는다는 황당한 사실도 알았습니다. 누구나 들어갈 수 있게 문을 활짝 열어놓고서 아무런 제지도 안 했는데 말입니다.


한국인에게 굴욕을 안긴 IMF 사태


아무튼 한총련이 기를 쓰고 타도하려 했던 김영삼 정권은 기어이 한국 경제를 다 말아먹고 결국에 가서 IMF(국제통화기금) 사태를 일으켰습니다. 당시 재정경제원 차관이던 강만수씨는 이명박 정부 초대 기획재정부 장관을 하더니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이 되었습니다. 친일파들도 해방 후 한자리씩 해먹으며 부귀영화 누리더니 IMF 주역들도 지금 다들 잘나갑니다. 어떤 잘못도 용서하는 관용 넘치는 금수강산입니다.



IMF 사태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한 가지 공통된 건 ‘굴욕적’이라는 점입니다. IMF에게서 돈을 빌리려면 IMF가 요구하는 경제정책을 펼쳐야 합니다. 공기업 민영화가 대표적이지요. 그래서 많은 이들이 IMF 사태로 인해 한국이 경제식민지가 됐다고 개탄했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볼 문제가 있습니다. IMF 사태 전에는 과연 우리가 경제주권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혹시 IMF 사태와 무관하게 처음부터 우리가 경제식민지에서 살았던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IMF를 졸업했다고 하는 지금은 과연 온전한 경제주권을 가지고 있을까요?


나이가 많지 않은 사람들은 보통 우리나라가 원래부터 자본주의 국가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자본주의가 이 땅에 자리 잡은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해방 직후 한국은 낙후한 농업국가였습니다. 정치제도는 미국의 영향을 받아 자본주의 국가의 제도를 본 따왔지만 경제구조는 여전히 봉건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상태는 이승만 정부는 물론 박정희 정부로 넘어가도 크게 달라지지 않다가 1970년대 산업화가 급격히 일어나면서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변화하게 됩니다. 그리고 꾸준히 농업 규모가 축소하고 공업 규모가 확대되면서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경제 규모가 세계 10위권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사실 불과 2~30년 전만 해도 한국은 갓 자본주의 국가 대열에 들어선 후발국가에 불과했습니다.


예속경제로 이어지는 원조경제


그런데 이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도, 자연스럽지도 않았습니다. 흔히 한강의 기적이라 부를 만큼 급격한 경제 구조 변화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자발적으로 이뤄진 게 아니라 미국의 선택과 결정 아래 이루어진 것입니다. 미국 정책을 기준으로 한국 경제 변화를 시기 구분하면 ▲무상원조 시기 ▲유상원조 시기 ▲직접투자 시기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미국은 원조를 통해 한국 경제의 자립적 발전을 가로막고 미국 경제에 의존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는 미국이 제3세계 국가들을 경제적으로 예속하기 위해 사용하는 일반적인 수법입니다.


역사학자 김기협 씨는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에 연재 기고한 글 “대미 예속을 향한 ‘원조 경제’의 길”(2011.3.4)에서 “해방 당시 한국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기반 조건은 아시아 국가 중 그리 나쁜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군정 기간에 빠진 ‘원조 경제’의 수렁이 한국을 수십 년간 미국에 대한 예속 상태에 붙잡아놓게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당시 한국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미국은 사실 한국 경제 발전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한국을 소련, 중국, 북한 등 사회주의권을 견제하기 위한 군사기지 정도로만 여겼습니다. 그런데 60년대 사회주의권의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합니다. 북한만 해도 전쟁으로 인해 최악의 상태에 있다가 천리마운동을 통해 불과 10여 년 만에 동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공업국으로 성장합니다. 당시 북한의 공업총생산액이 36%씩 성장했다고 하니 엄청난 속도였지요.


이런 상황을 본 미국은 체제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일명 ‘쇼윈도 자본주의’를 도입합니다. 한국 경제를 급격히 발전시켜 사회주의보다 자본주의가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자는 것이지요. 이를 위해 미국은 박정희 정부에게 엄청난 차관을 대줍니다.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 교수는 신동아 2007년 2월호(통권 569호)에 연재 기고한 “38선 획정에서 남북정상회담까지”에서 박정희 정부 시절 경제 성장에 대해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을 쌓고 한국을 자본주의 발전의 쇼윈도로 만들려는 미국의 도움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인”이라고 분석하며 외자유치를 통한 수출지향적 개발전략을 택한 결과 “지나친 대외의존적 경제구조를 갖게” 되었으며 “박정희가 암살당했을 때 거대한 외채 앞에 대한민국은 거의 망할 지경”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처럼 한국 경제는 IMF 사태 훨씬 전인 건국 초창기부터 미국에 구조적으로 의존하는 예속경제였습니다.


그럼 IMF를 졸업한 지금은 어떨까요? 다수의 전문가들은 ‘여전하다’고 평가합니다.


IMF를 졸업해도 예속성을 벗어날 수 없어


우선 대외의존도가 너무 높습니다. 국민총소득(GNI) 대비 수출, 수입 비율을 나타내는 대외의존도는 2002년 71.6%에서 2008년 117.7%로 급증했습니다. 이는 미국이나 일본의 3~40%에 비교해 3배 가량 되는 수준입니다. 또 2009년에 IMF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공동 작성한 G20주요 경제지표에 따르면 한국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수출, 수입이 차지하는 비율이 모두 1위라고 합니다. 이 때문에 세계 경제가 위축되면 수입, 수출에 막대한 차질이 생기면서 국내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또 외국인 투자가 급증하여 국민경제의 근간을 지배하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1997년 외국자본의 직접투자가 119억 달러, 주식투자가 256억 달러였는데 10년 후인 2007년 외국자본 직접투자는 1196억 달러, 주식투자 2480억 달러로 거의 10배가 증가하였습니다. 한국 총자산 대비 외국자본 비율도 6.9%에서 14.2%로 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투자하는 외국자본은 미국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직접투자의 경우 1962년부터 2008년까지 실적을 종합하면 미국이 32%를 차지하여 독보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주식시장에서도 특정 기업에 그 기업 주식의 5% 이상을 집중 투자한 외국자본의 국적을 분석하면 미국 자본이 전체의 절반을 넘습니다.


그리하여 현재 한국에는 한국 회사라고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2007년 11월 기준 외국인 총지분율을 보면 삼성전자 47.4%, 포스코 49.8%, SK텔레콤 47.5%, KT 47.1%, KT&G 51.7% 정도이며 금융회사의 경우 국민은행 82.3%, 신한금융지주 58.1%, 삼성화재 57.2%, 하나금융지주 78.3% 등으로 주요 기업들의 지분을 50% 내외, 심하면 80% 이상 외국, 특히 미국에게 넘겨준 실정입니다. 그리하여 2010년에는 외국인 투자자가 배당금으로 챙긴 액수만 4조9700억 원으로 전체 배당금 총액의 36.83%나 된다고 합니다.


이처럼 한국 경제는 미국 주도의 외국 자본이 철저히 장악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앞으로 한미 FTA가 국회 비준, 발효되면서 경제 예속성이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는 점입니다.


만신창이가 돼도 2등이라 좋다?


경제 예속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농업 문제입니다. 정부의 농업 경시로 인해 한국 농업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특히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잉여농산물이 무분별하게 밀려들어와 식량자급률은 2009년 기준 25.3%에 불과합니다. 그나마 주식인 쌀(자급률 95.8%)을 제외하면 5% 수준으로 떨어집니다. 농가인구도 전체 인구의 7~8% 수준에 불과합니다. 농업은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에 모든 국가가 전략적으로 보호하고 있으며 일반 자본주의 국가들은 대체로 100% 안팎의 식량자급률을 유지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말 심각한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 기후변화로 인해 식량이 국가 안보 문제로까지 비화될 수 있는데 여기에 대해 완전히 무방비상태인 셈입니다.


고전 명화 가운데 ‘벤허’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박진감 넘치는 전차경주는 이 영화의 명장면으로 꼽힙니다. 워낙 유명한 장면이라 나중에 스타워즈 에피소드1에서 포드레이스로 부활할 정도입니다. 이 전차경주를 보면 선수들끼리 전차를 타고 서로 싸우는데 그러나 상대편 전차에 매달려 질질 끌려가기도 합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어떤 교수님께서는 이 장면을 언급하시며 한국 경제가 딱 그 꼴이다, 미국 전차에 매달려 질질 끌려가면서 만신창이가 됐으면서도 자기가 2등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다 줄이 끊어지면 순식간에 꼴등으로 밀려난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1등으로 달리던 미국 전차가 고장 나서 뒤처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뒤에 매달려 거치적거리는 한국을 떼버릴 것 같습니다. 단물만 빼먹고 버리는 것이지요. 우리도 이제 우리 전차를 타야 하지 않을까요? (2011.7.1)



<10전11기 목록>

1996년 4월. 민주주의를 생각한다

1996년 8월. 분단을 생각한다

1997년 2월. 신자유주의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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