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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통령은 어떻게 뼛속까지 친미가 되었나

불철주야

by 붉은_달 2011. 9. 9.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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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8일 미군이 이 땅에 진주한 후 한국은 한 번도 미국에게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리고 66년이 지난 오늘도 우리는 이명박 대통령이 “뼛속까지 친미·친일”이라는 ‘자랑’을 듣고 있다.


한국 대통령은 어떻게 뼛속까지 친미가 되었나


동북아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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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08년 이상득 당시 국회부의장이 자신의 동생인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뼛속까지 친미·친일이니 그의 시각에 대해선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버시바우 당시 주한 미대사에게 말했다고 한다. 동생에 대한 얘기니 상당히 정확한 내용일 것이다. 국회부의장이면 대한민국의 주권기관인 국회를 대표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인데 그가 자국 대통령에 대해 ‘뼛속까지 친미·친일’이라며 외국 대사에게 자랑스럽게 소개한 사실은 자못 충격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사실이 언론에 공개됐는데도 다들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점이다. 마치 당연한 소식을 들은 것처럼.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뼛속까지 친미’라는 대단한 이명박 대통령


어제(9월 8일)는 미군이 인천 앞바다를 통해 한반도에 진주한 날이다. 1945년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후 미국은 소련과 사전 합의에 따라 38선 이남의 한반도에 진주하여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조선총독부를 넘겨받았다. 조선총독부에 내걸린 일장기는 성조기로 바뀌었고 미군은 한반도 38선 이남에서 미군정을 실시한다고 발표하였다.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한 목적은 단 한 가지다. 소련을 봉쇄하기 위한 극동 대륙 기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지정학적 요충지로 오랜 옛날부터 강대국의 침략을 받아왔다. 미국 역시 한반도가 갖는 대양과 대륙의 관문이라는 지정학적 성격을 파악하고 눈여겨보아 왔으며 마침내 기회를 잡은 것이다.


▲아시아와 태평양을 잇는 한반도


한반도에 미군 기지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면 한국을 미군이 직접 지배하는 것이 가장 좋고 그래서 미국은 군정을 실시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후 식민지가 사라지고 독립국 건설이 큰 흐름으로 조성되고 있었기에 언제까지나 미군정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미국은 ‘뼛속까지’ 친미 인사였던 이승만을 내세워 한국을 독립국가로 만들고 대신 한국을 대대적인 친미 국가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펼쳤다. 이런 작업은 국방,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복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를 하나씩 살펴보자.


1. 친미 군대 만들기


미국을 비롯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다른 나라를 예속화하는 주된 이유는 경제적 혜택을 누리기 위해서다. 자원이 풍부한 나라를 장악하여 자원을 싼 값에 가져간다거나, 인구가 많은 나라를 장악하여 물건을 비싼 값에 판다거나, 노동력이 풍부한 나라를 장악하여 값 싼 임금을 주고 부려먹는다거나 하는 식이다.


그런데 한국은 그런 나라들과는 달랐다. 미국이 한국을 장악한 것은 경제 문제가 아니라 군사적 필요성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한민국 친미 국가 만들기 프로젝트’의 핵심은 국방 분야에 있다. 이에 대해 한홍구 교수는 한겨레21에 실은 글 ‘그들은 왜 말뚝을 안 박았을까’에서 “미국이 한국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막대한 자금을 투여해가며 직접 육성한 기관은 군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미국은 한국 군대의 창설부터 지휘까지 도맡아 사실상 한국군의 ‘실소유자’ 노릇을 하고 있다.


미국은 1945년 11월 13일 미군정 법령 제28호로 국방사령부를 설치하였으며 1946년 1월 14일에는 미군 장교와 한국인 보좌관을 중심으로 남조선 국방경비대를 창설했다. 국방경비대 장교에는 독립군 출신을 철저히 배제하고 독립군을 토벌하던 일본군, 만주군 출신으로만 채웠는데 이는 일본에 충성한 이들이 미국에도 충성하기 마련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국방경비대 행진 모습


미국은 1950년 7월 14일 한국전쟁 와중에 이승만 대통령에게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이양 받았다. 일반적으로 전쟁 중에 동맹군이 참전한다고 해서 동맹군에게 자국군의 작전통제권을 넘겨주는 경우는 없다. 이는 전쟁 당사국의 지위를 포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은 미군이 가지고 있으며 한국군은 미군의 지휘를 받는 신세가 되었다. 물론 미국은 1994년 평시 작전통제권을 한국군에 이양하였으나 전시 작전통제권은 여전히 미군에 있고, 전시 상태를 판단하는 자격이 미군에 있으므로 여전히 한국군은 미군의 지휘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6개항으로 구성된 연합권한위임사항(CODA)을 통해 평시에도 사실상 미군이 작전통제권을 행사하도록 보장하였다.


▲맥아더 원수를 만나 기뻐하는 이승만 전 대통령


미국은 작전통제권 확보 외에도 한국군에 대한 통제를 확고히 하기 위해 다양한 장치를 마련하였다. 일단 1953년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주한미군을 무기한, 무제한 주둔시킬 수 있게 만들었다. 또한 1978년 한미연합사령부를 만들어 주한미군사령관이 한미연합사령부 사령관을 겸임하도록 하여 한국군을 체계적으로 지휘할 수 있게 하였다. 또 1971년 한미 연례안보협의회(SCM)를 구성하여 미국의 군사정책을 한국에 강요하는 체계를 만들었다.


또한 국방에서 중요한 물질적 토대가 되는 무기 체계를 철저히 미국에 의존하도록 하여 미군 없이는 한국군이 독자적으로 국방을 실현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한국은 미국산 무기를 압도적인 비율로 수입하고 있다. 70년대 이후 수입무기 가운데 미국산은 76%로 압도적이며 90년대 이후에는 84%로 증가했다. 정점에 이른 98년에는 91%에 달했다. 전체 한국군 무기에서 미국산 무기가 차지하는 비중도 90년대 이후 73.9%로 압도적이다. 이런 실태니 미국의 협조 없이는 무기 운용을 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다.


▲한국이 세계적인 무기수입국임을 보여주는 도표


게다가 국방 정보를 주한미군에 의존하고 있어 독자적인 작전을 펼칠 능력이 없다.


한국군 장교들의 친미 성향도 심각하다. 현 육군사관학교의 모태는 미군정이 세운 군사영어학교이며 이곳 출신이 초기 국방장관직을 독차지하였다. 미국은 한국군 장교들에 대한 교육에 많은 공을 들였는데 1950년대에만 무려 9천여 명의 한국군 장교들이 미국의 각종 군사학교에 가서 교육을 받았다. 이는 1953년부터 1966년까지 미국에 유학을 간 학생이 6368명밖에 안 되는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인원이다.


이처럼 미국은 한국군을 철저히 장악하였고 그 결과 ‘주한미군 감축’, ‘전시 작전통제권 이양’ 같은 이야기만 나와도 보수세력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게 되었다.


이것이 보수세력이 입만 열면 이야기하는 한미동맹의 실상이다. 한미동맹은 누가 보더라도 평등한 관계에서 정상적으로 이루어진 동맹이 아니며 그저 미군의 요구에 한국군이 복종하는 비굴한 동맹에 불과하다.


2. 친미 정권 만들기


주한미군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면 한국 정권의 보장이 필수적이다. 필리핀의 경우 상원에서 미군 주둔기간 연장안이 부결되는 바람에 1991년 필리핀 주둔 미군이 철수하게 되었다. 물론 피나투보 화산 폭발로 미군기지를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이 미군철수의 주된 이유지만 만약 한국에서도 정부나 국회에서 미군철수를 요구하면 미국 입장에서는 상당히 난처할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정부와 국회를 친미 인사들로 채워놓고 다양한 제도와 기구를 활용해 반드시 이들을 장악해야 하였다.


일단 미국은 대한민국 정부를 세우는 데서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택된 것은 전적으로 그의 친미 성향 때문이었다. 1904년 처음 미국에 건너간 이승만은 1910년까지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여 박사학위를 받는다. 일제 강점기의 상당부분을 미국에서 보낸 그는 1919년 대한인국민회 파리 강화회의 한국대표로 임명되었고 이 때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의 위임통치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보냈다. 하지만 1925년 이 사실이 드러나면서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탄핵 당하였다. 이후에도 주로 미국에서 지낸 이승만은 1945년 광복 후 10월에 귀국, 김구, 김규식 등의 남북협상을 반대하고 반공노선을 견지하였다. 이처럼 뼛속까지 친미 반공인 인물이었기에 미국은 이승만 정부를 적극 지지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한 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도 친미 정권이었다. 사실 쿠데타 자체도 미국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당시 미 중앙정보국장 덜레스는 1964년 5월 3일 영국 비비시(BBC) 방송에 출연하여 “내가 재임중에 CIA의 해외활동으로서 가장 성공을 거둔 것은 5.16쿠데타”라고 발언하기도 하였다.


▲존 덜레스 전 CIA 국장


이처럼 미국이 사실상 집권을 좌지우지하였기에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관료와 핵심 정치인들은 모두 미국 유학파에 친미 성향 인사들로 채워졌다. 이제는 대통령 하려면 대선 전에 한 번, 당선 후에 한 번 미국을 반드시 다녀와야 하는 게 일반화되었다.


미국은 다양한 기구와 제도를 통해 한국 정치의 막후 세력으로 존재한다. 미국 내에서 대한정책을 결정하는 곳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며 실무책임은 국무부 동아태차관보가 맡고 있다. 예를 들어 전두환 정권 시절 미국무부 동아태차관보는 개스턴 시거였는데 6.29선언도 그의 작품이나 마찬가지다. 1987년 7월 1일자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1987년 6월 30일 미 연방하원 청문회에서 스티븐 솔라즈 하원의원이 “이번 일의 주역인 개스턴 시거에게 노벨평화상을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미국 정부의 대한정책을 관철하기 위해 개입하는 기구로는 미대사관을 들 수 있다. 이번 위키리크스 공개 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미대사관은 일상적으로 한국 정치인들을 만나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본국에 통보하며 이에 기반하여 다양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위키리크스에서 공개한 2006년 7월 25일자 전문(06SEOUL2505)은 대표적인 사례다. 이 전문은 주한미대사가 미국무장관 등에 보고한 것으로 당시 한국의 한미FTA 협상 대표였던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주한미대사와 전화통화를 통해 한국정부의 약가적정화방안 발표에 대해 미국 정부에 미리 알리고, 미국이 의미 있게 의견을 제출할 시간을 주며, FTA 의약품 작업반에서 협상할 수 있도록 한다는 등, 그 내용이 미국 측에 유익한 것으로 평가되는 사항들을 관철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fighting like hell)’는 내용이 나온다.


▲한미FTA 졸속 과정을 규탄하는 기자회견 장면


한국 정부 관료가 한미 통상 협상을 하는데 미국을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고, 청와대 회의 내용을 주한미대사에게 보고하는 일은 사실상 ‘간첩’ 행위라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정부가 이를 문제 삼지 않는 것은 이런 현상이 정부와 정치권에 만연해 있기 때문일까?


이처럼 역대 정권과 기성 정당들은 정도의 강약은 있어도 결국 미국의 요구와 간섭에 ‘예스맨(yes man)’으로 존재하였으며, 이를 두고 미국 대통령들은 한국을 ‘이지맨(easy man)’으로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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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 상 경제, 문화 분야는 다음에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주 화요일(13일) 불철주야는 추석 연휴 관계로 생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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