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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당정치, 분열정치는 반드시 망한다

토론게시판

by 붉은_달 2012. 8. 23.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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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동기 우리사회연구소 상임연구원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에 여러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대통령 선거가 자리잡은 1990년대 이후, 한국정치사를 살펴보면 분열주의 정치는 기필코 몰락한다는 것이 일관된 교훈이다. 

탈당정치, 분열정치란 한때 손을 맞잡고 의기투합했던 동지들을 버리고 딴 살림을 차리는 것으로 정치적으로 자기부정이다. 자기자신을 부정하는 정치인을 국민들이 신뢰할 리 없다. 한국사회에서 탈당행위는 그 무슨 거창한 명분을 들이대더라도 “철새정치인”으로 귀결될 뿐이다. 

탈당정치, 분열정치는 필패한다는 교훈은 진보, 중도, 보수를 떠나 일관된 흐름이다. 한국정치사에서 분열정치 행각을 살펴보자. 

분열하다 지리멸렬한 진보신당 

지난 2007년 대선에서 패배하자 이른바 "평등파(PD)"인사들이 민주노동당을 탈당해 만든 진보신당은 탈당정치, 분열정치의 대표적 예이다. 창당 이후, 진보진영을 분열시키는 끝없는 논쟁과 파열음만을 이끌어왔던 진보신당은 창당 4년만인 2012년 총선에서 정당지지율이 1.13%의 지지에 그쳐 정당등록이 취소되고 말았다. 2007년 당시 진보신당의 탈당 논란을 살펴보자. 

2007년 대선에서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의 득표율은 3.0%로 기대 이하로 저조하였다. 민주노동당 문성현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는 2007년 12월 29일, 대선 결과에 책임을 지고 총사퇴하였으며,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를 가동해 당 쇄신 작업에 나서기로 했다. 

그러나 문제는 엉뚱하게도 민주노동당 쇄신이 아니라, 당내 노선투쟁과 패권논란으로 불거졌다. 이른바 “평등파(PD)”는 민주노동당 혁신의 전제조건으로 1) 북한핵시험을 비판하고 2) 이른바 “일심회” 조작사건 관련 당원을 제명할 것과 3) 2008년 18대 총선 비례대표 인선을 포함한 당권을 내놓을 것을 당 지도부에 요구하였다. 

"평등파(PD)"의 혁신요구는 상식적 선에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안을 “혁신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교묘한 분열주의 행각이라 할 수 있다. 

진보정당은 진실에 입각한 활동을 생명처럼 중시한다. 그런데 “평등파(PD)”는 미국의 한반도 긴장고조의 과정에서 발생한 한반도 핵위기를, 온전히 북한의 잘못인 것처럼 비판해야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해괴한 논리로 민주노동당 지도부에 북한핵시험 비판에 동참할 것을 강요하였다.

"평등파(PD)" 인사들은 또한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혁신의 의지가 있다면, 이른바 “일심회” 조작사건 피해자들을 당에서 제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공안검찰에 의한 과도한 수사로 이미 피해받은 당원들을 위로하지는 못할망정 공안기관의 발표에 발맞춰 제명하자는 논리는 진보정치인으로서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사안이다. 당시 “자주파(NL)"는 이 문제에 대해 “진보정당에서 국가보안법 피해자를 제명한다는 것은 정체성에 맞지 않는다”며 격렬하게 반발했다. 

뿐만 아니라 "평등파(PD)"는 민주노동당이 진정 혁신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2008년 총선 비례대표 후보를 1번부터 8번까지 전략공천하고 그 대상은 심상정 비대위가 임명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하였다. 민주노동당의 비례 국회의원을 모두 평등파와 가까운 외부인사로 구성해 당내 다수세력인 자주파가 국회 비례의원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아보겠다는 의중이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평등파(PD)"의 황당무계하고 비정상적인 혁신요구는 당시 언론을 등에 업고 무차별적으로 전개되었다. 심상정 의원은 “대선 참패는, 자주파 패권에 대한 국민의 엄중한 심판임을 인정해야 하며, 그것이 당 혁신 의지를 모으는 출발점”이라며 평등파의 황당한 혁신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당 지도부를 “소통불능”이라 공격하며 탈당수순을 밟아나갔다. 



2008년 1월 11일, 민주노동당 부산 해운대 지역위원회 소속 당원 51명이 탈당한 것을 계기로 이른바 “평등파(PD)”의 집단 탈당이 이어졌다. 이들의 탈당은 사실상 선도 탈당파와 후속 탈당파가 헤쳐모여식으로 탈당해 제3지대에서 연대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조승수 의원 등이 주도해서 먼저 탈당한 '새로운 진보정당운동' 모임과 후속 탈당모임인 '진보신당제안모임'은 2008년 2월 24일, ‘진보신당 건설을 위한 연대회의’를 공식 제안하였다. 

‘진보신당제안모임’ 관계자는 "8만2000여명의 당원 중 최대 2만명까지 탈당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민주노동당 내 탈당세력 뿐 아니라 사회 부문별, 진보세력을 아울러 새 진보정당을 만들어 총선을 치르고 총선 결과를 바탕으로 ‘유일 진보정당’의 위상을 확립해 나가겠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당시 천영세 민주노동당 대표 직무대행은 당내 탈당 움직임을 ‘분열주의적 행위’로 규정하고 강력하게 대응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진보신당연대회의는 3월 2일, 서울 백범기념관 컨벤션 홀에서 창당 발기인 대회를 열어 심상정, 노회찬 의원 등을 공동 대표를 선출하는 등의 본격적인 창당 궤도에 올랐다. 

"평등파(PD)"는 민주노동당을 스스로 뛰쳐나와 진보신당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분열정치로 시작한 진보신당은 유일 진보정당의 위상을 확립하기는커녕, 총선 성적이 갈수록 초라해지고 말았다. 

2008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지역구에서 2석과 더불어 정당득표 5.68%의 지지로 3석의 비례의석을 추가해 5석의 의석을 얻는데 그쳤지만 진보신당은 2.98%로 단 1석의 의석도 획득하지 못하였다.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두고 진보신당은 다시 분열하였다.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 등 당내 유력인사들이 “새정치 통합연대”를 결성하며 통합진보당으로 돌아오면서 진보신당은 대중의 관심에서 완전히 멀어져 버렸으며 총선 정당득표가 1.13%까지 추락해 정당등록이 취소되고 만 것이다.

아무리 진보를 표방하고 국민의 눈높이를 이야기 하더라도, 국민들은 한솥밥을 먹던 동지들을 손가락질 하며 당을 떠나는 사람들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진보신당 사태가 주는 교훈이다. 

미래연합 박근혜 

분열하면 지리멸렬한다는 한국정치의 법칙은 진보정당 뿐 아니라 보수정당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 대표적 예가 한나라당을 탈당해 “미래연합”을 창당했던 박근혜 의원이다. 

1998년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정계에 입문한 박근혜 의원은 대선주자로 진출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2002년 4월, 16대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기 위한 한나라당 경선구도가 짜여지던 시점에, 박근혜 의원은 이회창 총재의 한나라당 개혁이 미흡하다며 탈당을 결행했다. 

4월 26일, 박근혜 의원은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한국미래연합' 창당발기인 대회를 열고, 본격적인 신당 창당 작업에 들어갔다. 정광모 한국소비자연맹 회장, 최필립 전 뉴질랜드 대사 등 38명이 창당발기인에 이름을 올렸다. 박근혜 창당준비위원장은 "한국미래연합에서도 반드시 대선 후보를 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당의 의미가 없다.“며 대선출마 의지를 불태웠다. 



박근혜 의원은 한나라당 외의 정치세력들을 묶어 정치권 합종연횡을 타진하였다. 2002년 5월 1일, 박근혜 의원은 SBS 라디오에 출연해 "이인제 전 민주당 고문과는 (서로) 맞는 것이 꽤 있다"며 "김종필 자민련 총재를 비롯해 누구든 자유롭게 만날 수 있다"고 밝혀, 이들과의 연대 가능성을 내비쳤다. 때마침 5월 3일, 김종필 총재와 이인제 고문의 골프회동이 예정된 터라 박근혜-이인제-김종필의 3자연대는 2002년 대선의 한 변수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대선을 위해 자기 당을 탈당한 박근혜, 이인제 두 대선후보가 서로 의기투합하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박근혜 의원은 자민련을 뛰쳐나와 이번에는 민주당을 기웃거리게 된다. 당시 민주당은 노무현 후보의 돌풍에 반대하는 인사들이 정몽준 후보를 영입하며 새로운 신당을 만들자는 흐름이 있었다. 2012년 8월 11일, 박근혜 한국미래연합 대표는 민주당이 추진하는 신당과 관련해 “새로운 정치와 노선에 대한 의기투합이 가능하면 참여할 수 있다”고 조건부 참여 의사를 밝힌 것이다. 박근혜 미래연합 대표는 어릴적 초등학교 동창이었다는 인연을 내세우며 정몽준 의원과의 연대를 타진했다. 그러나 민주당 일각에서 추진되던 무소속 정몽준 의원 등 제3후보군의 영입을 전제로 한 거대 신당 추진구상이 사실상 무산되면서 박근혜 의원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고 말았다. 

결국 박근혜 의원은 한나라당을 탈당한 지 8개월만인 10월 22일, “이회창 후보가 정당개혁안을 받아들인 점을 평가한다”며 당대 당 통합 방식으로 한나라당으로 돌아왔다.  

2002년의 분열행각이 뼈아픈 경험이었을까? 박근혜 의원은 그 뒤로 2007년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석패했고, 이후 친이계의 집중견제를 받았지만, 한나라당을 탈당하지 않고 참았다.

연이은 탈당으로 몰락한 이인제 

분열정치는 한 때 민주당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이인제 의원의 정치인생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제16대 대선을 앞둔 2002년 1월 1일, 동아일보는 민주당 이인제 상임고문이 이회창 총재와 맞대결에서도 오차범위 내의 접전을 벌이는 33.1%의 지지율을 나타내 야권에서 가장 유력한 대선주자라고 보도하였다. 당시 이인제 민주당 상임고문(40.1%)은 20, 30대 응답층에서는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30.8%)를 무려 9.3%나 앞서기도 하였다. 1997년 대선에서 ‘이인제 돌풍’을 일으키며 492만표(19.2%)를 얻었던 득표력과 1998년 8월 국민회의에 합류한 이후 동교동계 구파로부터 받았던 전폭적 지원이 원천이었다. 



이른바 "이인제 대세론"이 정계를 지배하였다. 1월 9일에는 자민련의 김종필 총재가 먼저 이인제 상임고문에 대해 “마음에 들고 믿을 만하며 대한민국 대표가 될 만하다고 판단되면 내각제를 전제로 협력하는 데 인색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정치연합의 뜻을 타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인제 상임고문은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이 시작되자 예상치 못했던 “노무현 돌풍”에 밀리기 시작하였다. 3월 9일, 10일에 제주와 울산에서 잇따라 열린 민주당 경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전체 유효 투표수 1683표 가운데 423표(25.1%)를 얻어 394표(23.4%)를 얻은 이인제 후보를 29표 차이로 누르고 1위를 차지했다. 특히 3월의 광주경선에서 노무현 후보는 영남출신임에도 불구하고 1572표 중 595표(37.9%)로 1위를 차지, 491표(31.3%)에 그친 이인제 후보를 100표차로 따돌리는 대이변을 낳았다. 

노무현 돌풍은 진보적 정책에 목마른 유권자들의 필연적 선택이었다. 광주에서 시작된 노풍은 전국을 강타하였다. 

그런데 이인제 후보는 대선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본인의 패배를 인정하지 못했다. 이인제 후보는 경선과정의 불공정성을 문제시하며 경선 포기 가능성을 흘리기 시작하였다. 3월 26일, 이인제 후보의 측근인 원유철 의원 등은 이날 밤 서울 자곡동 자택으로 이 후보를 찾아가 만난 뒤 "경선 판세가 기운 상태에서 더 이상 경선에 참여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견해가 진영 안에 많다"고 말했다. 

급기야 이인제 후보는 뒤처지는 당심에 초조하였는지 같은 당 동지에게 도저히 할 수 없는 색깔론 공세를 퍼붓기 시작하였다. 이인제 후보진영의 김윤수 공보특보는 4월 3일, 기자실에 들러 일요신문 기사 복사본을 뿌렸다. 노무현 후보의 장인이 한국전쟁 때 동네를 점령한 인민군에 부역했다가 1953년 이후 옥살이를 하다 71년 교도소에서 옥사했다는 내용이다. 

나아가 이인제 후보는 김대중 대통령까지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동아일보는 이인제 후보가 4월 8일 오전 참모회의에서 “경선 과정에서 노무현 후보는 김대중 대통령의 꼭두각시로 비쳐져 영남에서 득표하기 어렵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하였다. 또한 이인제 후보는 4월 8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그분(노무현 후보)은 급진좌파 노선을 갖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자기 노선을 갖고 가야하고, 저는 중도개혁노선을 갖고 당에 헌신하고 노력할 것”이라고 말하며 노무현 후보와 차별성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이인제 후보가 자신이 속한 민주당을 스스로 끌어내리면 끌어내릴수록, 이인제 후보의 경쟁력은 더욱 떨어질 뿐이었다. 4월 17일, 이인제 후보와 노무현 후보의 표 차이는 1512표로 벌어지고 말았다. 이인제 후보는 결국 민주당 대선후보에서 전격 사퇴하고 말았다. 

이인제 후보는 경선에서 사퇴한 직후, 실망감이 너무나 컸던 나머지 민주당 탈당을 모색한다. 5월 3일, 김종필 총재와 골프회동을 가지며 중부권 신당 창당을 논의한 것이다. 이인제 의원은 5월 6일, 민주당 고문직을 거절하였으며 다가오는 6·13 지방선거에서 자민련 김종필 총재를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결국 이인제 후보는 민주당을 탈당, 자민련으로 당적을 옮겼다. 그의 탈당 경력은 매우 화려하다. 이인제 의원은 민주당 국회의원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지만 14대 국회에선 민자당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1998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국민신당으로 출마하였다. 2000년 총선에서는 다시 민주당에 돌아왔다가 2004년엔 자민련으로 옮겼으며 2007년 대통령 선거에는 작은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득표율은 고작 0.7%에 머물렀다. 이후 이인제 의원은 2008년에는 자유선진당으로 옮겼으며 지금은 선전통일당의 국회의원이 되어 있다. 

그야말로 철새정치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인제 의원의 탈당 횟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이인제 의원의 대중지지율도 정확히 탈당 횟수에 비례해 현저히 줄어들고 말았다. 

분열주의는 필패 

선거결과가 기대 이하라고 자신이 몸담고 있던 정당을 험담하다 못해 뛰쳐나가는 행위는 누가 보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민주노동당을 스스로 탈당한 평등파는 탈당 4년만에 사분오열되어 정당등록요건도 갖추지 못한 처지가 되었다. 대권을 넘보고 한나라당을 스스로 깨고 탈당한 박근혜 의원도 근 8개월간 중도정당을 전전하는 야인신세를 경험했다. 유력 대선주자였던 이인제 의원 역시 민주당을 스스로 깨고 나간 결과 “철새정치인”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2008년 총선 결과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총선결과에 실망한 일부 통합진보당의 인사들도 “진보는 이제 다 죽었다”며 불과 6개월 전에 스스로 지었던 집에 도끼질을 해대고 있다. 

자기가 지은 집인데도 고칠 생각도 없이 오로지 깨부수려고만 하는 사람에게 집을 지어달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분열정치는 저급한 정치수준을 나타낼 뿐이다. 그것이야 말로 국민의 눈높이에 전혀 맞지 않는 후진정치 방식일 뿐이다.


* 출처 : 우리사회연구소 http://urisociety.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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