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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의 비밀전문이 밝혀준 북측의 자주노선

토론게시판

by 붉은_달 2012. 6. 15.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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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2012년 05월 28일 (월)

 

브레즈네프 집권 이후 북측과 중국의 의견충돌 

2012년 5월 16일 미국의 우드로우 윌슨 국제학술센터(Woodrow Wilson International Center for Scholars)는 ‘북코리아 국제문서 정리사업(North Korea International Documantation Project)’을 통해 발굴한 역사자료를 공개하였다. 공개된 문서들은 평양 주재 동독대사관이 1975년 4월 29일과 5월 12일 동독 외무부 극동과에 보낸 비밀전문들, 베이징 주재 동독대사관이 1975년 5월 6일 본국에 보낸 비밀전문, 1977년 11월 17일 평양 주재 동독대사관이 본국에 보낸 비밀전문이다. 원래 독일어로 작성된 이 비밀전문들은 현재 베를린 연방외교실 정치문서보관소에 소장된 것인데, 우드로우 윌슨 국제학술센터가 영어로 번역하여 공개하였다. 

지금으로부터 37년 전인 1975년에 작성된 그 비밀전문들을 다시 읽어보는 까닭은, 1975년을 기점으로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던 아시아 정세에 북측이 어떻게 대응하였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비밀전문들은 북측이 작성한 문서가 아니라 동독대사관이 작성한 것이어서 외부 시각으로 작성된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37년이라는 시간격차를 뛰어넘어 오늘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정세에 대한 북측의 대응전략방향을 말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비밀전문들이 지닌 가치가 있다. 

1975년 4월 29일 평양 주재 동독대사관이 동독 외교부 극동과에 보낸 비밀전문(이하 4.29 비밀전문으로 약칭함)은 1975년 4월 18일부터 26일까지 진행된 김일성 주석의 중국 방문에 관한 보고서다. 

김일성 주석이 1975년 이전에 중국을 방문한 때는 1961년 7월 11일이었으니, 14년 만에 다시 중국을 방문한 것이다. 1961년 김일성 주석이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조중 우호협조 및 상호원조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그로부터 14년 동안 김일성 주석이 중국을 방문하지 않은 것은 양국 관계가 오랫동안 긴장상태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당시 북중관계는 왜 긴장상태에 있었던 것일까? 두 가지 주된 이유가 있었는데, 첫 번째 이유는 당시 소련의 정치정세에 대한 북측과 중국의 견해가 정면으로 충돌한 것이었다. 

1964년 10월 14일 레오니드 브레즈네프(Leonid Brezhnev, 1906-1982)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브레즈네프의 집권은 소련의 정치정세에 큰 변화를 일으킨 사변이었다. 브레즈네프는 이른바 ‘자유화와 정치개혁’ 그리고 친미정책으로 소련공산당을 갈팡질팡하게 만들었던 니키타 후르시쵸프(Nikita Khrushchev, 1894-1971)를 반대하는 당내 투쟁을 이끌었던 사람이다. 그런 브레즈네프가 집권한 것은, 후르시쵸프가 불러온 ‘수정주의 혼란’에서 소련이 벗어나 사회주의정치노선을 회복하게 되었음을 뜻하였다. 

그리하여 북측은 브레즈네프의 집권을 긍정적으로 대하고 소련과의 관계를 복원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브레즈네프와 후르시쵸프를 똑같은 ‘수정주의자’로 규정하고 브레즈네프 집권을 부정적으로 대하였다. 브레즈네프의 집권을 수정주의 세력의 집권연장으로 보느냐 아니면 반(反)수정주의 세력의 정권교체로 보느냐 하는 것은 당시 국제사회주의진영에 매우 중대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브레즈네프의 집권을 수정주의 세력의 집권연장으로 보는 경우 소련을 계속 반대하게 되고, 브레즈네프의 집권을 반수정주의 세력의 정권교체로 보는 경우 소련과의 관계를 복원하게 되는 것이다. 당시 북측은 후자를 택했고, 중국은 전자를 택했다. 

후르시쵸프 집권기에 ‘현대 수정주의(modern revisionism)’로 변질된 소련에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웠던 중국은, 자국 안에서도 수정주의 세력이 고개를 들자 그 세력을 척결하는 ‘문화혁명’을 급진적으로 밀고 나갔다. ‘문화혁명’을 급진적으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극단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 중국은 소련을 ‘사회제국주의(social-imperialism)’로 규정하였다. ‘문화혁명’ 시기의 중국이 타도하려고 하였던 ‘주적’은 ‘미제국주의’가 아니라 ‘소련 사회제국주의’였다. 중국의 극렬한 반소련 적대정책은 국제사회주의진영을 분열시키고 대립과 반목을 불러일으켰다. 이른바 중소분쟁으로 알려진 사태가 그것이다. 

중소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북측은 중국의 반소련 적대정책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1977년 11월 17일 평양 주재 동독대사관이 본국에 보낸 비밀전문(이하 11.17 비밀전문으로 약칭함)에 따르면, “조선은 국제공산주의노동운동에서 중국공산당의 분열주의 행동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제3세계에서 활동하는 마오주의 분파집단들을 상대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또한 11.17 비밀전문에 따르면, “형제적 사회주의 나라들의 고위급 대표자들과의 회담에서 조선 동지들은 중국 지도부가 소련을 ‘사회제국주의’로, ‘주적’으로 규정하는 혹독한 반소련정책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고, “조선은 사회주의 나라들의 단결과 공동보조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소련과 중국의 관계가 정상화되기를 바란다”고 언명하였다. 

그런데 중국은 한 술 더 떳다. 중국은 북측이 ‘소련 사회제국주의’를 반대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적대시하였을 뿐 아니라, 북측에게 ‘문화혁명’의 극좌노선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였다. 11.17 비밀전문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중국에서 문화혁명이 시작되자, (조선과 중국의) 관계는 때로 극렬하게 악화되었다. 그렇게 된 까닭은 중국 지도부가 마오주의(Maoism)의 지위와 원칙을 조선에게 내려 먹이기 위해 조선의 내정문제에 간섭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문화혁명’ 시기 중국의 극좌노선을 ‘교조주의(dogmatism)’라고 비판하던 북측에게 중국이 자기의 극좌노선을 받아들이라는 요구까지 들이대자, 북측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북측은 중국의 부당한 내정간섭을 ‘대국주의’로 규정하고 배격하였으니, 북측이 중국의 이념적 오류를 비판하고 중국의 내정간섭을 배격하는 자주노선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것이 1966년 8월 12일 <로동신문>에 실린, ‘자주성을 옹호하자’라는 제목의 사설이다. 이 장문의 사설은 1960년대 중소분쟁 시기 북측의 자주노선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사적 문건이다. 

사설 ‘자주성을 옹호하자’는 북측에 대한 중국의 내정간섭에 대해 “최근 년 간의 국제공산주의운동은 자기의 그릇된 로선과 견해를 다른 형제당들에 강요하며 이것을 접수하지 않는다고 하여 압력을 가하고 내정에 간섭하는 등 참을 수 없는 현상들이 근절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비판하고, “우리는 이러한 대국주의적 행동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대국주의는 형제당들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엄중한 후과를 가져오게 된다....대국주의가 허용된다면, 형제당들 호상 간에 동지적이며 평등한 관계가 유지될 수 없다”고 강한 어조로 경고하였다. 사설 ‘자주성을 옹호하자’에서 북측이 내정간섭을 배격하고 자주노선을 천명한 때로부터 46년의 긴 세월이 흐른 지금, 국제사회주의정치사는 북측의 판단과 행동이 옳았고 중국의 판단과 행동이 그릇된 것이었음을 증언한다. 

지금 남측의 진보정치세력은 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성을 확립하려고 투쟁하고 있는 데 비해, 1960년대 북측은 중국의 내정간섭을 배격하고 자주노선을 견지 수호하는 투쟁을 벌였다. 만일 북측이 대중관계에서 자주노선을 견지하지 못하고 중국의 대국주의 영향권에 포섭되었더라면, 중국이 1980년대에 자본주의세계체제에 자신을 개방하여 ‘시장사회주의(market socialism)’로 넘어갈 때 북측도 그 뒤를 따랐을 것이며, 그렇게 되었더라면 1990년대에 미국과 남측이 밀어붙인 강력한 대북 흡수통합 연합공세를 막아내지 못하였을 것이고, 따라서 오늘 세계 지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나라는 없을지 모른다. 이런 역사적 맥락을 생각하면, 북측이 “자주성은 곧 생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수사적 표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북측의 반미노선과 중국의 반소노선 

1960년대 후반기에 국제사회주의진영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었다. 국제사회주의진영의 시각에서 보면, 북베트남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을 적극 지원하는 것은 미국의 제국주의 침략을 반대하고 반제노선을 견지하는 응당한 행동이자 의무였다. 그리하여 1965년 2월 브레즈네프 집권기의 소련은 미국의 제국주의침략에 맞서 싸우는 북베트남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을 지원하기 위한 사회주의 집권당들의 국제회담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소련의 수정주의적 태도를 지적하면서 그 회담을 거부하였으며, 1968년 10월에는 한 술 더 떠서 북베트남에게 소련과의 관계를 단절하라고 요구하였다. 이것은 명백한 내정간섭이었다. 북베트남이 중국의 내정간섭을 거부하자, 중국은 그에 대한 보복조치로 1968년 11월부터 북베트남에서 자국 군대를 철수하였다. 

북측은 사설 ‘자주성을 옹호하자’에서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것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윁남 인민의 투쟁을 지원하는 것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하는 것은 실제 투쟁 속에서 검열될 것이며 명백하여질 것”이라고 지적하고, “미제를 반대하고 윁남 인민을 지원하기 위한 국제적인 반제공동행동과 통일전선의 형성을 위해 최대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베트남 군역사 연구원(Military History Institute of Vietnam)이 2001년에 하노이에서 펴낸 ‘반미구국항전사 1954-1975’ 제5권 ‘총공세와 봉기’에 수록된 바에 따르면, 1966년 9월 북측은 북베트남과 파병협정을 맺었고, 1967년에 연대 규모의 인민군 비행사들과 2개 연대 규모의 방공포 부대를 북베트남에 파병하여 북베트남 공군 조종사들을 훈련시켰을 뿐 아니라 공중전에 참가하고 하노이 상공을 방어하였는데, 미그 17기 20대와 미그 21기 10대를 몰고 출격한 인민군 비행사들은 미국군 공군 조종사들과 맞붙은 여러 차례 공중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2009년 11월 18일 평양출판사에서 펴낸 도서 ‘선군의 어버이 김일성 장군’에 수록된 바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갱도시설을 건설해달라는 호치민(Ho Chi Minh, 1890-1969) 베트남 국가주석의 요청을 받고 즉각 인민군 공병부대를 파견하고 설비와 자재를 전량 공급하여 당중앙위원회와 국방부가 들어갈 갱도시설을 건설해주었으며, 1967년 5월 20일 하노이 상공에서 인민군 전투기 8대가 미국군 전투기 32대와 맞선 4 대 1의 공중전에서 미국군 전투기 12대를 격추하고 1대를 격상하는 놀라운 전과를 올렸다고 한다. 북측이 베트남 전선에 파병한 인민군 비행사들이 미국군 공군 조종사들과 맞붙은 공중전에 대해서는 2010년 3월 1일 <통일뉴스>에 발표한 나의 글 ‘미국이 공중전에서 패한 두 전쟁’에서 논한 바 있다. 

북베트남이 자기들에게 소련과의 관계를 단절하라고 요구한 중국의 내정간섭을 거부하자, 중국은 베트남 전선에서 미국군과 싸우는 것을 포기하고 철군하더니, 한 술 더 떠서 미국과 싸우기는커녕 거꾸로 북측에 대한 도발을 기도하였고 소련과는 무력충돌까지 벌였다. 

1967년 10월 20일 평양 주재 동독대사관이 본국에 보낸 ‘폴란드 인민공화국 대리대사 푸디쉬(Pudisch) 동지와의 1967년 10월 9일 대화 비망록’에 따르면, 문화혁명기에 홍위병들은 “홍위병들과 중국 동북지방의 조선족들이 충돌한 직후인 1967년 가을, ‘하찮은 수정주의자들아 봐라 너희들 운명이 이렇게 될 것이다’고 쓴 글발을 써 붙이고, 지붕에 조선족 시신들을 내걸어놓은 화물열차를 중국 단둥에서 조선 신의주로 운행하였다”고 한다. 

1967년 11월 13일 평양 주재 동독대사관의 1등 서기관 디트리히 자르크(Dietrich Jarck)가 본국 외무성 과장 쿠르트 쉬나이드빈트(Kurt Schneidewind)에게 보낸 보고서는 “1967년 11월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사회주의 10월혁명 50주년 기념행사에 김일성 주석이 참석하지 못한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김일성 주석이 소련을 방문하는 경우 조선과 중국의 국경지대에서 충돌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었다고 기술하였다. 

1984년 5월 31일 김일성 주석이 당시 북측을 방문한 독일민주공화국 국가수반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 1912-1994)와 만나 진행한 정상회담을 수록한 동독측 비망록에 김일성 주석이 이렇게 말한 내용이 들어있다. “문화혁명 기간에 압록강에서는 우리를 반대하는 (중국측의) 대규모 선전활동이 있었다. 1969년 우수리강에서 중조충돌이 있었던 시기에 북코리아에 대한 (중국측의) 도발행동들이 있었다. 내가 지방에서 요양하고 있을 때, 중국 군대가 두만강을 건너 우리쪽으로 오고 있다는 사회안전부의 전화보고를 받았다. 나는 그들을 우리 영토에서 체포할 수 있으니 그들에게 발포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리고 현지에 군대를 보냈다. 그러자 중국 군대는 물러갔다. 소련을 수정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한 중국은 심지어 우리까지 그렇게 비난했다. 우리에 대한 그들의 비난은 근 5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 때문에 평온을 유지해야 하였다. 우리는 인내하여야 했다.” 

1969년 3월 2일 중국인민해방군은 중국과 소련의 국경하천인 우수리강에 있는 젠바오섬(珍寶島, 러시아 지명은 다만스키섬)에 주둔하는 소련군 국경수비대를 습격하고 그 섬을 점령하였다. 불의의 습격을 당한 소련군 국경수비대 병력 58명이 전사하였고, 94명이 부상 당했다. 보복에 나선 소련은 3월 15일 우수리강 유역에 주둔하는 중국인민해방군 기지를 공습하고 T-62 전차를 동원하여 포격하였다. 중국은 그 섬을 9월까지 점령하였다. 

그처럼 중국이 베트남 전선에서 철군하고 북측에 대해 도발을 기도하고 소련과 무력충돌을 벌이고 있을 때, 북측은 베트남 전선에서 미국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국제사회주의진영의 시각에서 1960년대 북중소 3국 분쟁사를 돌이켜보면, 당시 북측의 반미노선이 옳았고 중국의 반소노선이 그릇된 것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보인다. 

14년 만에 이루어진 김일성 주석의 중국 방문 

1975년 4월 18일 김일성 주석은 1960년대 중반 이후 악화되었던 북중관계를 뒤로 하고 중국을 방문하였다. 김일성 주석은 4월 19일에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 중국 국가주석과 회담하였고, 4월 20일에는 저우언라이(朱恩來, 1898-1976) 총리와 회담하였다. 

4.29 비밀전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김일성 주석의 방중일정은 긴급히 조정된 것이었다. 같은 시기에 레오 틴더만스(Leo Tindemans) 당시 벨기에 총리가 중국을 방문하고 있었는데, 두 나라 국가수반이 동시에 중국을 방문한 이례적인 일정은 김일성 주석의 중국 방문이 긴급히 추진되었음을 말해준다. 김일성 주석이 14년 만에, 그것도 방문일정을 긴급히 조정하여 중국을 방문한 것은, 당시 동아시아 정세가 급변하고 있었던 사정과 관련이 있다. 

1975년 5월 12일 평양 주재 동독대사관이 본국에 보낸 비밀전문(이하 5.12 비밀전문으로 약칭함)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과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과의 회담,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와의 회담에서는 아시아 정세에 대해 논의하였는데, “특히 남베트남과 캄보디아에서 새로 전개되는 상황과 그것이 남측의 정세발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논의하였다고 한다. ‘남베트남과 캄보디아에서 새로 전개되는 상황’이란 베트남 전쟁의 종전을 뜻한다. 

1975년 4월 30일 새벽 5시 남베트남 주재 미국 대사 그레이엄 마틴(Graham Martin, 1912-1990)이 군용헬기편으로 비상탈출하였고, 오전 10시 24분 당시 남베트남 대통령이었던 두옹반민(Duong Van Minh, 1916-2001)이 남베트남군에게 전투중지 명령을 내리면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그로부터 20분 뒤, 북베트남군 전차가 남베트남 대통령 관저인 독립궁 정문을 부수고 들어가고, 그 뒤를 따라 진입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병사들이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깃발을 독립궁에 게양하였다. 중국, 프랑스, 일본, 미국의 잇따른 지배와 점령으로 116년 동안이나 불행과 고통을 겪어온 베트남 민족의 긴 수난사는 그렇게 극적으로 막을 내렸다. 김일성 주석은 베트남 전쟁이 끝나기 12일 전에 중국을 방문하여 베트남 전쟁 종전 이후의 정세발전방향을 중국 지도부와 논의하였던 것이다. 

1955년 11월 1일부터 1975년 4월 30일까지 무려 19년 180일 동안 베트남에서 계속된 전쟁은 세계사에 베트남 전쟁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제국주의 지배에서 벗어나 민족해방을 실현한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 전쟁은 명백하게도 민족해방전쟁(national liberation war)이었다. 베트남 민족해방전쟁은 제국주의 미국의 패전과 남베트남 친미예속정권의 붕괴, 그리고 사회주의 북베트남의 승전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집권으로 종결되었고, 곧바로 베트남 통일정부 수립과 통일국가 건설로 이어졌다. 

베트남 민족해방전쟁의 승리적 결속과 제국주의 미국의 패전은, 커다란 상처와 충격과 압박을 미국에게 안겨주었다. 특히 미국은 한반도가 제2베트남처럼 되지 않을까 하고 크게 우려하며 정신적 압박을 받고 있었다. 4.29 비밀전문에는 “여러 가지 지표들은 인도차이나에서 일어난 정세발전 방향을 가리키고 있으며, 조선의 지도부는 미국이 남조선에 대한 (지배적) 지위를 포기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는 것에 대해 분명한 평가를 내렸다”고 쓰여 있다. 

1975년 5월 6일 베이징 주재 동독 대사관이 본국에 보낸 비밀전문은, 1975년 4월 19일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 지도부의 환영연회에서 김일성 주석이 연설한 내용 중에서 중요한 대목을 이렇게 인용하였다.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위한 우리 인민의 현 투쟁은 세계 반제민족해방투쟁에서 중요한 련결고리입니다...만일 남조선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경우, 우리는 같은 민족성원으로서 팔짱을 끼고 구경하지 않을 것이며, 남조선 인민들을 힘있게 지원할 것입니다. 만일 적들이 무모하게 전쟁을 시작한다면, 우리는 전쟁으로 결정적인 대답을 줄 것이며 침략자들을 완전히 소멸할 것입니다. 이 투쟁에서 우리가 잃을 것은 군사분계선이요, 우리가 얻을 것은 조국의 통일입니다. 오늘 조선에서 전쟁이냐 평화냐 하는 문제는 궁극적으로 미국의 태도에 달려있습니다. 남조선의 권력을 틀어쥐고 주인행세를 하는 것은 미국입니다....남조선 인민들이 바라는 대로, 남조선에서 미군이 철수하고, 민족적 양심을 가진 민주인사가 집권하면, 우리는 조선의 항구적인 평화에 대한 확고한 보장을 얻게 될 것이며, 우리 조선사람들끼리 평화적인 방법으로 조선의 통일문제를 성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혁명과 전쟁인가, 철군과 통일인가 

위에 인용한 김일성 주석의 연설내용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남측에서 혁명이 일어나면, 북측은 그 혁명을 적극 지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남측의 민주세력에 대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탄압은 극에 달했으나, 그것이 곧 혁명적 상황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활동과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고, 언론사전검열과 대학휴교조치를 강행하였다. 1973년 8월 8일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일본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을 저질렀으며, 1974년 4월에는 ‘민청학련 사건’을 일으켜 각계 민주인사와 학생운동 참여자 180여 명을 이른바 ‘국가변란’을 기도하였다는 ‘죄목’을 씌워 구속수감하였고, 1975년 4월 9일에는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을 조작하여 진보정치활동가 8명을 사형하였다. 

1967년 12월 8일 평양 주재 동독대사 브리(Brie)가 베를린에 있는 동독 사회주의통일당(SED) 외교담당 비서 겸 동독 제1외무상 헤겐(Hegen)에게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 지도부가 생각하는 세 가지 민족문제 해결방안”은 “남코리아 인민대중이 대규모 혁명봉기를 일으키는 것”, “박정희를 반대하는 군부세력이 군사정변을 일으키는 것”, 그리고 “미국군이 남코리아 정권을 지원하지 못할 만큼 국제정세를 악화시키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제1해결방안과 제2해결방안은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북측은 제3해결방안에 노력을 집중할 것으로 보았다. 

둘째, 만일 미국이 북침전쟁을 도발하면, 북측은 미국군을 격퇴하고 조국통일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미국의 북침전쟁 도발이 북측이 말하는 무력통일의 전제조건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1976년 8월 18일에 ‘판문점 사건’이 일어난 직후, 미국은 방대한 무력을 한반도에 집결시키고 북침전쟁을 도발하려고 하였다. 북측의 시각으로 보면, 미국이 북침전쟁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던 당시의 긴박한 군사상황은, 북측에게 무력통일을 실현할 기회로 되었다. 

그러나 북측과 미국의 무력충돌을 바라지 않은 중국은 당시 고조된 미국의 북침전쟁위협에 대해 침묵하였다. 11.17 비밀전문에 따르면, “중국은 조선반도에서 긴장이 고조되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1976년 판문점 사건에 대해서도 매우 절제된 반응을 보였다”고 하였다. 또한 4.29 비밀전문에 따르면, 당시 미국과 일본을 상대로 관계개선을 추진하고 있었던 중국은 한반도에 불안정한 상황이 조성되는 경우 북측과 미국의 대결, 북측과 남측의 대결에 중국이 휘말려 들어갈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여 북측의 대미정책과 대남정책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셋째, 주한미국군이 철군하고, 남측에서 “민족적 양심을 가진 민주인사가 집권하면” 평화통일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북측의 시각에서 보면, 평화통일의 전제조건이 주한미국군 철군과 남측의 민주정권 수립이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우선 여기서, 주한미국군 철군은 평화통일의 전제조건이지 무력통일의 전제조건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북측이 말하는 무력통일의 전제조건은 주한미국군 철군이 아니라 미국의 북침전쟁 도발이다. 주한미국군이 철군하면 남측의 친미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민족적 양심을 가진 민주인사”가 집권할 것이므로 북측은 철군 이후에 등장할 새로운 민주정권과 협상을 통해 평화통일을 실현하면 되는 것이지, 남북 쌍방에 전쟁피해를 가져올 무력통일을 강행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1967년 11월 20일 박성철(1913-2008) 당시 북측 외무상과 안드레이 그로미코(Andrei Gromyko, 1909-1989) 당시 소련 총리의 회담내용을 정리한 러시아 외교정책 문서에 따르면, “미군 철수 이후 북코리아가 남측을 공격하여 군사적 수단으로 통일문제를 해결하려 할 것이라고 말할 만한 근거는 없다”고 지적하였다. 

그런데도 남측의 친미독재정권은 주한미국군이 철군하면 북측이 남침할 것이라는 헛소문을 끊임없이 퍼뜨려왔다. 그것은 친미독재정권이 정말로 철군 이후 북측이 남침하리라고 믿기 때문에 그런 헛소문을 퍼뜨린 것이 아니라, 철군으로 자기들이 정권을 잃어버릴 것을 우려한 나머지 허구적인 ‘남침설’을 퍼뜨려 정권을 계속 유지하여야 했기 때문에 그런 헛소문을 퍼뜨렸던 것이다. 그로부터 근 4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남측의 친미수구정권은 주한미국군이 철군하면 북측이 남침할 것이라는 헛소리를 계속하고 있다. 

5.12 비밀전문에 따르면, 중국 방문 기간에 김일성 주석은 “조선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남조선에서 미군이 철수하는 것”이라는 점을 중국측에 강조하였고, 중국측은 김일성 주석이 제시한 “(조국통일) 3대 원칙과 5대 방안이 조선문제 해결을 위한 조선의 평화적 방안으로 된다고 인정하고 이를 지지하였다”고 하였다. 얼핏 생각하면, 김일성 주석이 주한미국군 철군문제를 강조한 것과 중국측이 평화통일 방안을 강조한 것 사이에서는 아무런 견해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 중국은 북측이 강하게 제기한 주한미국군 철군문제를 사실상 외면하고 있었으므로, 김일성 주석이 중국 방문 중에 다시 제기한 주한미국군 철군문제에 대해 지지의사를 한 마디도 표명하지 않고, 그 대신 김일성 주석이 제시한 평화통일방안에 대해서만 지지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11.17 비밀전문에 따르면, 중국은 1977년 8월 사이러스 밴스(Cyrus R. Vance, 1917-2002)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주한미국군 철군계획에 관한 카터 행정부의 조치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렇다면 중국은 왜 주한미국군 철군문제에 지지의사를 표명하지 않은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는 11.17 비밀전문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비밀전문에 따르면, “최근 몇 해 동안, 조선은 중국이 남조선에서 미국군을 철수시키려는 자기들의 투쟁을 진정으로 지원해주지 않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중국은 반소련 정책의 연장선에서 아시아에 미국군이 주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당시 중국은 미국이 아니라 소련을 ‘주적’으로 삼고 소련과 적대관계를 유지하면서 미국과의 적대관계를 해소하려고 하였으므로, 당연히 주한미국군이 철군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중국이 미국과 관계정상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대만 주둔 미국군 철군 요구를 관철시켰으면서도 주한미국군 철군문제를 사실상 외면한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주한미국군이 철군하고, 남측에서 “민족적 양심을 가진 민주인사가 집권하면” 평화통일이 실현된다고 했을 때, 북측이 말한 ‘민족적 양심을 가진 민주인사’는 누구였을까? 당시 북측이 남측에서 새로운 집권세력으로 등장해주기를 바랐던 민주인사는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싸운 민주세력의 지도급 인사 김대중(1924-2009)이었다. 북측은 그의 집권을 평화통일의 전제조건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23년이 지난 1998년 2월 25일 마침내 김대중 정권이 등장하였다. 북측의 시각으로 보면, 2000년 6월 1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과 6.15 공동선언을 채택한 것은, 그로부터 25년 전에 김일성 주석이 제시한 평화통일의 전제조건을 마련한 역사적인 사변이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의 등장과 6.15 공동선언 채택은 평화통일의 전제조건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만 충족시킨 것이었다. 주한미국군 철군이라는 또 다른 평화통일의 전제조건은 여전히 충족되지 못하였다. 

2008년 2월 25일에 등장한 이명박 정권이 6.15 공동선언을 전면 부정하고 남북관계를 파탄에 몰아넣은 것은, 평화통일의 전제조건 가운데 한 가지만 충족시킨 정치정세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지를 현실로 입증하였다. 오늘 한반도 정세는 주한미국군이 이 땅에 남아있는 한, 평화통일이 실현될 수 없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출처 :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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