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 이병진(양심수)
[번역자의 책 소개]
남부디리파드(1909년 출생)는 인도공산당(맑스주의) 정치국 위원이다. 그는 대학생이었던 1932년 학교를 떠나 시민불복종 운동(Civil Disobedience Movement)에 참여하였으며 1934년에 께랄라연합 콩그레스 사회주의당(the Kerala unit of the Congress Socialist Party)을 만들었다. 그는 께랄라의 콩그레스 위원회 비서를 역임하면서 인도공산당(Communist Party of India)의 창당에 기여하였다. 그는 인도공산당 총비서를 역임하며(1962-63년)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1964년 인도공산당이 정치 노선을 둘러싸고 분화되면서 남부디리파드는 인도공산당(맑스주의)1) 창당을 주도하였다. 그는 1977년부터 1990년까지 인도공산당(맑스주의)의 총비서를 역임하였다.
이 책은 간디를 지도자로 내세우는 부르주아 민족주의 독립운동을 비판적으로 보고, 계급적 관점에서 인도의 독립운동을 분석한다. 그는 인도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영국의 식민지배와 인도의 부르주아 계급이 성장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영국 제국주의자들로부터의 독립 투쟁 이후 부르주아들과의 투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도 부르주아지들과의 투쟁을 ‘2단계 민족 투쟁(the second stage of the national struggle)’이라고 한다.
이 책은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간디의 독립 투쟁 전략의 계급적 성격 즉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로서의 그의 한계와 영국제국주의자들과의 타협적 노선을 비판한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노동계급과 노동하는 대중들이 적극적인 역할을 했고, 부르주아들은 영국 제국주의자들로부터 권력을 이양받으면서 노동계급과 인민대중들의 강력한 압박과 요구로 명목상 사회주의적 요소가 포함된 “혼합경제(mixed economy system)”와 비동맹 외교노선을 견지하였다. 그러나 이는 인도의 독점자본주의를 형식상 은폐하기 위한 부르주아 지배계급의 전략일 뿐 인도는 식민지 시대부터 성장하고 발전된 독점 자본주의가 지속되었다. 인도의 지배세력은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내세워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바, 독립투쟁 과정에서 인도 부르주아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인도의 독립과 그 계급적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시각에서 서술되었으며 우리에게 시사점을 제공한다.
[편집자 주]
원주는 미주[1)2) 등으로 표기]로 역주는 각주로 처리한다. 역주는 이병진 동지의 주석에 편집부에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추가한 것이다. 이병진 동지의 초역문을 편집부에서 교정을 보고 다시 이병진 동지에게 동의를 구하는 과정을 거치지 못하였는데 문제가 있다면 전적으로 교정자의 책임이다. (최상철)
2. 영국의 지배와 변화: 그것들의 이중성
16세기 전인 1498년에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코지코드2)에 도착했다. 이때부터 인도에서 외래 자본주의의 지배가 뿌리내려졌고 이는 영국의 지배로 인해 정점에 이른다.
바스코 다 가마는 카톨릭 군주국가였던 포르투갈을 대표했다. 오래지 않아, 비(非)카톨릭 국가인 네델란드 상인들도 인도에 왔다. 나중에는 프랑스와 영국에서도 무역상인들이 왔다. 거의 200년 가까이 동안 이 4개 나라들에서 온 무역상인들끼리 치열한 경쟁을 하였다.
그 기간 동안 외국상인들은 내부무역의 영역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예를 들면, 인도 내에서 거래되는 상품). 그들은 자국(영국―편집자)에서 시장성이 있는 상품들을 (인도에서―편집자) 구매하여 본국(영국―편집자)으로 보내는 한정된 일을 하였다. 그리고 인도 시장에 팔 상품들을 수입하였다. 그래서 동인도 회사의 관할지역은 해안가였고 회사의 본사들은 항구 도시에 있었다.
무굴제국이 약화되는 정치적 상황에서, 동인도회사는 무역사무소를 유지하고 보호하기 위한 소규모의 무력이 필요하였기에 보안군을 조직했다. 그렇지만 그 군대는 2세기가 넘게 내륙의 농촌 지역에 가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무역 이익들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서만 그들은 봉건 영주들과 협력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 인도를 지배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18세기 중엽 이런 정세에 변화가 왔다. 그 무렵 네델란드가 거의 대부분의 포르투갈인을 패퇴시켰다. 네달란드와 영국의 갈등은 영국이 인도네시아에서 철수하고 네델란드가 인도를 떠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이제 영국과 프랑스만 인도에서 경쟁하였다.
이 두 나라는 무역회사들의 무역 이익 보호를 위해 인도의 행정을 장악할 필요를 고려하였고 경쟁은 첨예해졌다. 18세기 중반에 두 나라 간에 무역이익과 인도의 행정에 개입하기 위한 격렬한 투쟁이 전개되었다.
이 투쟁은 인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이 기간 중에 격렬해진 전투와 충돌이 수차례 일어났다. 바로 그때, 혁명이 프랑스에서 발생하여 낡은 사회제도를 쓰러뜨렸다. 혁명 이후, 프랑스의 새 지배자들은 유럽에서의 또 다른 전쟁을 강하게 재촉했다. 혁명 이전 프랑스 지배자들의 악행과 혁명이 야기한 전쟁으로 형성된 정세는 유럽과 인도 두 곳 모두에서 영국에 대해 프랑스를 취약하게 하였다. 그 결과는 세계각지에서 프랑스의 패배였다.
그러므로 16세기가 시작되면서 인도에 왔던 4개의 유럽 국가들 중에 영국이 최후의 승리자로 남았다. 퐁디셰리(Pondicherry)와 마에(Mahe) 같은 작은 지역이 프랑스 관할로 남았고 고아는 포르투갈의 관할로 남았다. 네덜란드는 어느 곳도 지배하지 못했다.
뱅갈의 지방관(Nawab)인 시라즈-우드-다울라(Siraj-ud-Daula)가 패배 한 1757년의 플라시 전투는 영국 무역상들의 역사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근 3세기 동안 상호 반목하던 유럽의 3개 강국은 패배하였다. “플라시는 연속적인 쇠사슬을 채우는 시작이었다. 그것은 인도의 모습을 완전히 바꿨다. 수세기에 걸쳐 지속되어 왔던 경제와 정부체제를 바꾸었다.” (미주 9. Tara Chand, History of the Freedom Movement in India, New Delhi, Publication Division, Govt. of India, 1970 Vol. Ⅰ, p. 221.)
인도의 무역상처럼 영국의 무역상들 역시 순종적이었다. 델리의 황제, 지방관들 그리고 하위 관료들에게도 호의와 양보(concessions)를 얻기 위해 존경과 겸손을 보이며 기다렸다. 영국의 무역상인들이 몇몇 다른 제후들의 편의제공과 도움을 받아가며 돈의 힘과 무력을 사용하여 일부 봉건 제후들과 대립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황제와 그 휘하 관료들의 정치적 지배에 전적으로 굴복하였다.
플라시 전투는 이런 지점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그들은 황제에 충성하는 최강의 지방관인 시라즈-우드-다울라를 패배시켰다. 그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지방관을 세웠다. 새 지방관(미르 자파르, Mir Jaffar)은 외세에 굴종하였고 배반과 폭군의 상징이 되었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이 지역을 통제하게 된 영국은 사실상의 지배자가 되었다.
사태의 전개는 빨랐다. 1764년 무굴 황제는 영국 동인도 회사를 디와니(Diwani)3)로 인정하여 벵갈, 비하르, 오디샤4) 지역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동인도 회사는 미르 자파르 대신에 넓은 지역을 직접 통제하였다. 계속해서 영국은 남인도의 마이소르 술탄(Sultan of Mysore), 서쪽의 마하라타스(Maharattas), 현재의 우타르 프라데시(Uttar Pradesh)에 해당하는 지역과 펀자브(지금은 일부가 파키스탄에 속한다)의 봉건 제후들을 패배시키고 현재의 파키스탄인 신드(Sind) 지역까지 정복하였다.
플라시 전투 이후 100년이 지나면서 인도 전 지역은 영국의 족쇄를 받아들이도록 강제되었다. 이 점은 군사적 관점에서 미묘한 성과였다. 모든 전투에서 인도인들이 우세했기 때문이다. 인도 봉건 군대의 병력구성과 동인도 회사의 병력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5) 인도 군대는 특히 포병을 이끄는 유럽 출신 장교가 이끄는 소규모 파견대와 그들에게 훈련받은 인도인 병사, 그리고 전통적 방식의 기마병과 대규모 보병들로 구성되었다. 동인도회사 군대도 유럽 파견대와 유럽인들에게 훈련받은 인도 보병들로 짜여졌다; 세 번째 요소인 비정규군은 부재했거나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유럽과 인도인 장교들의 지휘를 받는 인도 왕자들의 군대는 유럽인과 인도인의 지휘를 받는 유럽인과 인도인으로 구성된 동인도 회사 군대와 싸웠다. (미주 10. Ibid, p. 231)
동인도 회사의 군대도 비슷하게 구성되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영국은 한 가지 단순한 형태의 전투만으로 인도를 지배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도의 병사를 포함하여 인도군에서 봉사하는 계층을 포섭하였다. 그러면서 차츰 인도 봉건 제후들을 복종시켜나갔다. 그들은 이 목적을 위해서 다양한 전술을 이용하였다. 무자비한 전투, 외교적 행동 그리고 우호적인 관계, 경찰력을 이용한 지배를 공고히 하려고 하였다. 이런 모든 전략들이 인도의 종속을 위해서 기술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들의 성공 원인을 셀 필요는 없다. 인도의 제후들은 수 세기 동안 유지되었던 낡은 사회 체제의 대표자들이었다. 반면에 외국 무역상들은 빠르게 발전하는 사회체제를 의미했다. 점점 소멸하는 것과 발전하는 사회체제 사이의 투쟁에서 후자의 대표자들이 승리했다.
이 승리에 따른 변화는 이중적인 성격을 갖는다. 쇠퇴하는 사회체제는 그 체제의 대표자들이 군사적으로 패배하자 총체적인 국면의 파괴에 직면한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완벽하게 파괴된다. 그러나 이 경우에 외국의 새 지배자는 군사적인 승리만을 원했을 뿐 낡은 것의 파괴를 원치 않았다. 왜냐하면 영국이 달성했던 것처럼 인도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그들의 이익을 위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맑스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인도인들은 영국에서 산업 프롤레타리아트가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대체될 때까지 또는 힌두인 자신들이 영국의 족쇄를 끊어낼 만큼 강해질 때까지 영국 부르주아지들이 그들에게 뿌려놓은 새 사회의 열매들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미주 11, On the First War of Independece, p. 38.)
영국의 인도 지배와 인도 독립투쟁을 추적하면 이러한 사회 혁명의 이중성을 발견하게 된다. 사회 혁명의 이중성은 인도에서 다시 두 가지 형태의 독립운동을 성장시켰다. 1857년과 1857-59년 투쟁 이후부터 시작된 운동을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이 사회 혁명의 성격 및 그것이 드러나는 형태, 그리고 다양한 사회 생활의 영역에 끼친 영향을 분석하자.
우리는 1757년 플라시 전투가 인도에서 영국의 지배가 발전하는 데 전환점이었다는 것을 보았다. 그후에 델리의 황제에게 공식적으로 디와니로 인정받은 1764년, 영국 동인도 회사는 사실상 인도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것은 인도 사회 전체에 영향을 주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외국 무역상들이 오기 전의 인도의 사회와 행정체제는 위계적이고 자급자족적인 자치행정에 기초한 마을 공동체였다. 예를 들면, 맨 아래에는 마을들이 있고 조세 징수와 전쟁시 군역을 제한적으로 책임지는 봉건제후가 중간에 위치했다. 그리고 왕과 황제가 맨 꼭대기에 있다. 인도의 사회와 행정체제는 자본주의가 발전했던 영국의 그것과는 성격이 매우 달랐다. 그 결과 법률 제정과 집행절차 그리고 이 두 제도 아래에서 사람들의 의식과 관념 간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과 모순이 있었다. 서로 다른 제도 사이에서 충돌이 시작되었을 때, 무굴 황제가 동인도 회사를 디와니로 인정한 1764년, (힘의 균형이 깨져: 번역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손쉽게 지배하였다. 그것은 외국에서 들어온 체제의 우월성이, 몇 세기 동안 상대적으로 변하지 않고 존속했던 것을 휩쓴 것이다.
디와니라는 힘을 갖게 된 영국 동인도 회사는 벵갈을 접수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봉건적인 카스트 제도와 농업과 수공업 사법체제를 개혁이라는 미명아래 해체하여 이 지역의 행정력을 장악하였다. 행정권력이 동인도 회사에서 영국 왕으로 이전된 이후에도 이런 과정은 더욱 계획적으로 진행되었다.
무굴 황제의 지배하에서 토지 관계는 비록 인도 전체가 통일된 제도는 아니었지만 발전된 형태에 이르렀다. 토지 제도는 다양했지만 하나의 공통 요소가 있었다. 행정권력은 토지의 소유권(ownership rights)을 수립하기 위한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이들의 권리를 제한하려는 시도도 없었다. 봉건 제후들은 스스로를 주어진 비율에 따라 토지세를 징수하는 일에 한정하였다. 봉건 대지주 역시 토지 점유자들에게 지세만 거두었을 뿐 토지 소유의 권리나 특권을 가지고 간섭하지 않았다. 대지주 또는 행정기관에 지불해야 될 세금액은 관행에 따라 고정되었다. 이 제도는 몇 세기 동안 존재했었다.
그런데 새 지배자는(동인도 회사) 그들 본국에 이미 존재하는 토지 소유와 관련된 개념과 법을 인도에 이식하려고 했다. 새 지배자의 한 측에서는 소유권이 왕이나 지배자들에게 있다는 개념을 갖고 통치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측에서는 지배자와 실제 토지 점유자 사이에는 대지주가 있어야 된다는 이론을 신봉했다. 지배자는 토지 소유제를 적용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 몇 가지 변형된 형태도 있었지만 자민다리(Zamindari), 로트와리(Ryotwari) 그리고 마할와리(Mahalwari)라는 3 가지의 토지 소유제도가 서로 다른 지역에 생겼다.
종류는 다양했지만, 모든 제도는 토지 점유자들을 착취하고 빈곤하게 한다. 자민다리 제도 아래서 고정된 지세를 정부에 납부하는 대지주는 토지 점유자로부터 그들이 원하는 대로 징세하였다. 다른 두 제도에서는 일정한 비율로 늘어나는 세금을 정부가 점유자로부터 직접 징수했다. 두 가지 형태의 조세제도에 따른 징세의 최종 결과는 소작농을 증가시킨다.
예를 들면, 로뜨와리 제도를 실시했던 총독령 마드라스(Madras Presidency)에서는, 1810-11년에 징수했던 토지세는 100만 파운드 스털링이었다. 1825-26년에는 400만 파운드 스털링으로 늘어났다. 뭄바이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은 1817년 80만 파운드 스털링에서 이듬해에는 115만 파운드 스털링으로 늘었고 1837-38년에는 186만 파운드 스털링으로 증가했다.
앞서 말했듯이, 영국 동인도 회사가 처음으로 지배했던 곳이 벵갈이었다. 동인도 회사는 그곳에 자민다리 제도를 도입하였다. 무굴 황제의 대리자들은(동인도 회사: 번역자) 1764-65년에 81만8천 파운드 스털링을 징수했는데 1765-66년에는 147만 파운드 스털링으로 1790-91년에는 286만 파운드 스털링으로 늘어났다.
세금의 명목으로 정부가 직접 징수하는 돈 또는 지주들이 받아가는 지대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거두어 가려는 법의 집행은 인도의 농촌 경제를 붕괴시켰다. 외국 지배자는 모든 토지는 반드시 소유자가 —지배자이거나 대지주 또는 대체자로서 토지 점유자— 있어야 된다는 이론에 기초해서 토지 관계법을 집행했다. 이것은 전통적인 인도인의 개념들과 민중들의 관점에서는 저주스러운 일이다. 오래된 인도식 마을 제도에서는 비록 토지 점유자들, 지주, 봉건제후 그리고 지배자들이 자신의 소유에 대해서 어떤 권리가 있을지라도 토지에 대해서 무제한적인 권리를 갖는 사람은 없었다.
토지 소유에 관한 영국식 개념이 인도에서 실행되자 소유자—법이 실행되어 만들어진 자민다르 또는 지주 또는 토지 점유자—는 (토지를: 번역자) 저당 잡히거나 토지의 권리를 팔 수 있었다. 점유자들의 토지는 대지주에게 주는 지대나 정부에 내는 세금이라는 체납금(default in payment)으로 강제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지주와 토지 점유자는 고리 대금업자(the money-lender)의 손아귀로 들어갔다. 뭄바이의 조세조사관인(Revenue Survey Commissioner)인 윈게이트 경(Captain Wingate)에 의하며, “새끼 고리대금업자들이 빠르게 일어나는 중이다. 그들은 단기간에 작은 돈에 높은 이자를 붙여 마을에서 돈을 빌릴 정도의 신용이 없는 최하층 사람들에게 빌려준다.” (미주 12, From the report of Capt. Wingate quoted by Tarachand. op. cit. p. 299.)
그래서 대지주들과 고리대금업자들도 영국 동인도 회사가 도입한 토지 개혁으로 생겨난 계층인 농촌의 다수의 농민과 다른 농촌의 빈민을 약탈하는 데 동참하였다. 약탈물의 많은 몫을 영국 동인도 회사에 주는 관행은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 몇 세기에 걸쳐 인도에서 발전한 수공업과 그 공예품에 기초한 외국 무역업이 점차 쇠락했다. 예를 들어, 인도산 섬유는 1795-96년 212만2319 루피를 수출하였다. 1829-39년 섬유수출액은 69만5725 루피로 감소했다. 반면에 1814년 영국에서 인도가 수입한 금액은 180만 파운드였고 1829년에는 450만 파운드였다. 그러므로 인도의 수공업제품 수입시장이 감소하였다 하여도 외국 상품을 위한 시장은 커졌다. <노사과연>
1) Communist Party of India(Marxist). 약칭 CPI(M).
2) Calicut. 남부 께랄라주 북부의 도시. 캘리컷은 코지코드의 옛 명칭이다.
3) 편집자 주: 디와니. 이슬람 국가의 관청. 특히 토지에 대한 세금 등을 징수하는 행정임무를 담당하는 관청을 뜻하는 ‘디완’이라는 말에 추상명사를 만드는 접미사 이(ī)가 붙은 것으로, 지조(地租) 징수 등의 행정기능을 행사하는 권리를 의미한다.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1765년에 벵골 지방의 태수(太守:나와브)로부터 벵골·비하르·오리사 지방의 디와니를 획득함으로,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화하는 첫걸음이 되었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4) Odisha. 원문은 오리사(Orissa). 현재 지명이 바뀌었다.
5) 영국 동인도 회사의 군대는 인도인 용병을 고용하였다. 영국인들은 이들을 ‘세포이’라고 부른다. 1857년도 영국 동인도 회사의 병력은 27만 9796명이었다. 그 중 소위 ‘세포이’라고 부르는 인도인 용병은 23만 2224명으로 전체 병력의 83%였다. 세포이의 성격에 관해서는 ≪정세와 노동≫(2011년 2월, 제65호)에서 “아프가니스탄 4월혁명”의 글을 참조하라.
* 출처 :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정세와 노동> http://lodong.org/
북측이 미국에 보낸 서릿발 경고 (0) | 2011.12.05 |
---|---|
통합진보정당의 강령은 어떠해야 하는가 (0) | 2011.12.01 |
친미중독증 걸린 도둑정치, 재앙협정을 강요하다 (0) | 2011.11.30 |
[한미FTA저지] 대안 품은 저항으로 나서야 (0) | 2011.11.28 |
미일연합함대 위협한 북측 공군연합부대 (0) | 2011.11.23 |
유럽 경제위기 진단과 평가 (0) | 2011.11.20 |
99%운동이 제기한 세계경제위기의 뿌리 불평등 (0) | 2011.11.18 |
주한미군의 세 가지 특권 (0) | 2011.11.17 |
집단기억과 정보조작에 국민들은 속고 있다 (0) | 2011.11.15 |
한국전쟁 종전선언을 다시 보자 (0) | 2011.1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