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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명의 북한 주민은 왜 가족을 만날 수 없는가

불철주야

by 붉은_달 2011. 3. 11.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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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남북 사이의 쟁점인 북한 주민 송환 거부 문제는 마치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정부가 전쟁이 멈추는 것을 막고 전쟁을 더욱 부추기기 위해 반공포로석방사건을 일으킨 것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미국의 개입 방식이다...


4명의 북한 주민은 왜 가족을 만날 수 없는가


동북아의 문

http://namoon.tistory.com


이승만 정부의 휴전 방해 작전, 반공포로석방사건


1953년 6월 18일, 세계 유수의 언론들이 한반도 발 긴급 뉴스를 타전하고 있었다. 이승만 정부가 반공포로석방을 강행한 것이다. 불과 10일 전인 6월 8일 북한 인민군과 미군이 포로송환협정을 극적으로 체결하여 정전협정의 최대 고비를 넘겼으나 이 사건으로 인해 협상이 무산될 심각한 위기가 조성되었다.


당시 미 국무장관이었던 덜레스는 이승만 정부가 유엔군의 권한을 침범했다고 언명했으며, 처칠 영국수상은 대단히 놀라며 감정이 상했다고 표명하였다. 뉴욕타임스는 이승만 대통령의 일대 실패라고 혹평하였고 런던타임스는 용서할 수 없는 처사라고 비난하였다. 심지어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은 사건 당일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열고 “위험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하고 신속한 방법은 쿠데타”라며 이승만 정부를 제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로 당시 미 행정부 내에서는 쿠데타를 통해 이승만 정부를 제거하는 내용의 에버레디작전(Ever ready operation)을 입안하였다. (중앙일보 2011년 1월 28일자 보도 ‘반공포로 석방 충격 아이젠하워... 이승만 제거 쿠데타 준비했다’ 참조) 하지만 한국 내에 이승만을 대신해 친미 정부를 이끌만한 친미반공인사를 찾지 못해 결국 쿠데타 계획은 무산되었다.



왜 미국과 세계는 이승만 정부의 반공포로석방에 강하게 반발했을까? 이는 당시 정전협상에 매달린 미국과 유엔군의 처지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3년 동안 지속되면서 미국과 다른 참전국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군사편찬연구소(구 국방부 국방군사연구소)가 2005년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미군 인명피해는 13만7250 명이며 이 중 사망 3만6940 명, 부상 9만2134 명, 실종 3737 명, 포로 4439 명이다. 이는 15년 동안 지속된 베트남전쟁에서 미군 사망자가 5만8000 명, 부상자가 27만 명임을 고려하면 상당한 규모(산술적으로만 따지면 한국전쟁의 피해 규모가 베트남전쟁의 약 3배)라고 할 수 있다. 인명피해 외에도 막대한 전비지출로 인해 미국 경제가 큰 타격을 입었으며 한국전쟁 종식을 공약으로 내건 아이젠하워 후보에게 트루먼 대통령이 대선에서 패배하는 이변도 속출했다. 영국을 비롯한 다른 참전국들도 미국 주도의 한국전쟁에 대해 강한 회의감을 갖고 있었다.


이런 처지 때문에 미국과 다른 참전국들은 정전협상을 통해 속히 전쟁을 중단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정전협상에서 뜻밖의 난관이 조성되었는데 바로 포로송환 문제였다. 원래 미국은 국제 여론에 밀려 정전협상에 나섰기 때문에 정전협상을 조속히 체결할 뜻이 없었으며 포로송환 문제를 빌미로 협상을 지지부진하게 끌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지속될수록 미군 측의 피해규모가 눈덩이처럼 커지면서 정전협상을 빨리 마무리지으려하자 거꾸로 포로송환 문제가 발목을 잡게 된 것이다.


사실 제네바 합의에 따라 양측이 서로의 포로를 교환하는 것이 기존의 전쟁 처리 관례였다. 그런데 한국전쟁에는 한국군과 북한군이 한민족일 뿐 아니라 이북 출신 한국군과 이남 출신 북한군이 섞여 있는 복잡한 사정이 존재하였다. 이런 이유로 송환을 바라지 않는 포로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양측의 줄다리기 끝에 결국 1953년 6월 8일 북한과 미국은 ▲송환을 바라는 포로는 휴전 후 60일 이내에 송환하며 ▲송환을 바라지 않는 포로는 중립국송환위원회에 인계해 90일간의 설득기간을 갖되 그래도 처리되지 못하는 포로는 30일간의 재유예기간을 두어 최종결정을 한다는 내용에 합의하였다.


그런데 이런 결정에 강한 불만을 품은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이승만 정부였다. 친미반공정부로 출발한 이승만 정부는 정권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 현실과 동떨어진 과도한 반공정책을 펼쳐왔으며 이런 현상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극에 달하게 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미국의 정전협상에 불만을 품고 연일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관제 시위를 벌였다. 마침내 정전협상의 최대 걸림돌이던 포로송환 문제가 합의점을 찾자 이승만 정부는 반공포로석방이라는 극단적인 처방을 내리고 만다. 이처럼 반공포로석방은 미국의 정전협상을 가로막고 한국전쟁을 지속하려는 이승만 정부의 흉계에서 출발한 사건이었다.


반공포로석방사건은 북한 입장에서 볼 때 돌려받아야 할 포로를 빼돌린 사건으로 당연히 반발할만한 사건이었다. 사실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송환을 바라지 않는 포로의 경우 송환되지 않기 때문에 반공포로는 가만히 있어도 북송될 일이 없었고 굳이 탈출할 이유도 없었다. 오히려 반공포로의 탈출 과정에 송환을 희망한 포로가 섞여있을 수 있다는 의심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역시나 북한은 이 사건을 포로납치사건, 강제억류사건 등으로 규정하고 석방 포로의 재수용을 요구했으며 이승만 정부는 완강히 거절했다. 다행히 정전협상이 깨지지 않고 유지되어 마침내 7월 27일 북한 인민군과 중국의 인민지원군, 미군 주도의 유엔군 사이에 정전협정이 체결된다. 미국은 매년 정전협정 체결일이 되면 조기를 달고 전사자를 추념한다.


귀순인가 억류인가, 반복되는 역사


60여 년 전 일어난 사건과 비슷한 사건이 지금 재연되고 있다. 지난달 5일 북한 주민 31명이 어선을 타고 연평도로 표류한 단순한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연평도로 북한 어민이 표류한 사례는 종종 있었기에 처음부터 큰 사건은 아니었다. 또 초반에 정부에서 이들이 귀순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고 했기에 며칠 조사를 하고 조용히 북으로 올라갈 것이라고 다들 생각했다. 그러나 일은 그리 단순하게 끝나지 않았다.



일주일 안팎이던 조사가 한 달로 늘어지더니 이명박 정부는 갑자기 4명의 주민이 귀순 의사를 밝혔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는 나머지 27명만 북으로 송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대해 북한은 이산가족을 만들 수는 없다며 31명 전원 송환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북한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북적십자실무접촉을 하자고 제안했다. 귀순 의사를 밝혔다는 4명의 가족을 데리고 나올 테니 남측도 4명을 데려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가족들 앞에서는 자유의사를 밝힐 수 없다며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북한은 판문점 연락관 통지문을 통해 “4명에 대한 직접 대면확인을 못하겠다는 것은 남측이 말한 귀순의사 표시가 완전한 날조이며, 유인 납치라는 것을 말해줄 뿐”이라며 귀순공작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정부는 다시 남측 지역에서 4명의 자유의사를 객관적으로 확인해 줄 수 있다고 제안했으나 구체적인 방법은 제시하지 않았다.


사건이 점차 확대되자 북한은 아예 누리집 <우리민족끼리>에 ‘표류되어 억류된 우리 주민 전원을 무조건 지체없이 돌려보내야 한다’는 제목의 특별난을 만들었다. 또한 4명의 가족들이 보낸 편지와 동영상을 공개하며 31명 전원 송환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조선신보> 10일자 평양발 기사를 통해 귀순 의사를 밝혔다는 4명이 “모두 책임적인 위치에서 사업”하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며 한국 정부가 고의로 이들에 대해서만 집중적인 귀순공작을 펼쳤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사실 귀순공작 의혹은 북한보다 한국에서 먼저 나왔다. 지난 2월 18일 중앙일보는 정부 소식통을 인용 “북한 주민들은 잘 지내고 있으며 서울 구경도 한 것으로 안다”고 보도하였다. 이어 25일 국회 대정부질의에서 민주당 최고위원인 박주선 의원이 “정부는 귀순의사도 없고, 대공 용의점도 발견되지 않은 북한주민 31명에 대해 ‘서울 구경’을 시키는 등 ‘귀순공작’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과잉행동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며 이는 정부 측으로부터 직접 확인한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일반적으로 표류한 북한 주민 조사는 일주일 정도 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20일이 지난 지금까지 지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도 3월 8일 <평화방송> 라디오의 인터뷰에서 “심문 과정에서 우리가 일부 언론에서 처음에는 전원 다 돌아간다고 하다가 25일째부터 4명 정도가 귀순 의사가 있다고 흘러나왔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북한에 좀 오해를 줄 소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만약 북한에 표류한 한국 어부들 가운데 일부가 북한에 남겠다고 한다면 한국 정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생각해보자. 당연히 북한 발표를 믿을 수 없다며 전원 송환하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리고 당사자의 의사를 직접 확인하려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정부는 귀순 의사를 밝혔다는 4명에 대해 북한이 직접 접촉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고 있다. 심지어 가족도 만나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으며 가족이 보내온 편지도 전달하지 않고 있다. 만약 이 문제가 원만히 풀리지 않아 앞으로 동서해의 경계선에서 조업하는 어민들이 북한으로 잘못 넘어가는 경우 북한이 똑같은 이유를 들면서 송환하지 않는다면 그때 가서 이명박 정부는 어떤 논리를 펼 것인가.



게다가 개인의 자유의사를 존중해야 한다는 정부의 논리도 빈약하기 짝이 없다. 예를 들어 법무부는 2009년 한 해에만 994건의 난민 불허 처분을 내렸다. 난민 신청자들은 불허 처분 취소 소송을 제기하며 법원의 판결에 희망을 걸지만 구제율은 10% 안팎에 불과하다. 즉, 수백, 수천 명의 외국인 난민들이 현재 자유의사에 반해 본국이나 제3국으로 추방당하고 있다. 게다가 이들은 난민 신청을 하고 소송을 하는 와중에 취업도 할 수 없도록 제약을 당하고 있어 생계조차 곤란한 실정이다. 이런 이중적 태도로 인해 결국 정부가 개인의 자유의사 존중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북한 주민들을 귀순시켜 체제경쟁을 하려는 것 아니냐는 논란도 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무엇을 위한 귀순 논란인가


가장 큰 문제는 지금 이 문제가 불러올 위험성에 있다. 이명박 정부가 귀순 문제를 의도적으로 일으켰건 아니건 지금 조성된 정국은 그렇지 않아도 키리졸브 훈련으로 인해 화약이 잔뜩 쌓이고 있는 한반도에 마치 불꽃을 던지려는 시도로 인식되기 쉽다. 지금 북한은 북한의 ‘급변사태’를 가정한 키리졸브 훈련에 대해 ‘전면전’, ‘서울불바다전’, ‘미사일타격전’ 등의 표현을 써가며 매우 강한 어조로 반발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무마할 방법을 찾는 대신 이명박 정부는 북한을 더 자극하는 길로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정부가 전쟁이 멈추는 것을 막고 전쟁을 더욱 부추기기 위해 반공포로석방사건을 일으킨 것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미국의 개입 방식이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은 전쟁을 속히 끝내기 위해 반공포로석방을 저지하였다. 미군은 탈출하는 포로들을 사살하는 것은 물론 이승만 정부의 추가 석방 요구도 모두 묵살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반대로 미국도 4명의 북송 거부를 적극 거들고 있는 형편이다. 3월 7일자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유엔사의 이름으로 특별조사단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남하한 북한 주민 31명에 대한 개별면담을 하고 그 결과를 지난 4일 북한 판문점대표부에 보냈다고 한다. 유엔사가 북한 민간인을 면담하여 북측에 통보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북한은 이에 대해 “남조선 강점 미군은 아무런 명분이나 과학성도 없는 모략적인 유엔사 특별조사결과라는 것을 꾸며내 괴뢰 당국의 비인도주의적 범죄행위를 비호 두둔하는 통지문을 우리 측에 보내왔다”고 비난했다.


이처럼 이명박 정부의 위험스런 행보를 미국이 지원하는 모습을 통해 미국이 여전히 대화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대화보다는 긴장 격화를 바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사태가 긴장 격화로 끝나지 않고 현실적인 충돌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북한은 이미 “직접 대면확인을 기어이 회피한다면 남측의 귀순 주장을 모략에 의한 유인납치로 인정하고 단호히 대처할 것”이라고 입장을 밝힌 만큼 이명박 정부를 압박하기 위한 고강도의 행동에 돌입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심각한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 무난한 해결책을 찾아야 할 시점이다. (201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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