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우리사회연구소 창립 기념 논문 <우리사회분석>을 연재합니다.
우리 사회는 새로운 변화의 시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이명박 정부 3년을 거치면서 절차적 민주주의의 한계가 고스란히 드러났으며, 6.15 공동선언으로 급진전한 남북관계도 악화일로를 걷고 있습니다. 이 속에서 국민들의 주권의식은 급성장하고 있으며 한반도 문제는 근본적 해결을 향해 빨은 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사회 변화는 자칫 혼란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를 면밀히 분석한데 기초하지 않으면 진보운동이 나아갈 길을 잘못 선택할 수 있습니다. 변화의 시기에는 언제나 올바른 이론이 필요한 법입니다.
우리사회연구소는 창립을 기념하여 우리 사회 전반을 분석하는 작업부터 시작하려 합니다. 정치, 외교, 경제, 군사, 문화, 학문 등 다방면에 대하여 현미경을 들이대고 우리 사회의 현실이 어떠한지 고찰하고자 합니다.
많은 관심과 함께 진지한 토론이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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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우리사회분석> 한국경제의 구조적 모순
① 외국자본이 한국경제에 끼친 영향과 문제점
② 재벌은 한국경제의 부끄러운 자화상
한국의 대기업은 이른바 “재벌”이라는 독특한 형태로 규정된다. 재벌과 대기업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영어사전을 뒤져보면 chaebol 이란 단어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 단어를 읽으면 “재벌”이 된다. 단어의 뜻은 (a large, usually family-owned, business group in South Korea)로 “한국에서 존재하는 대형회사집단인데 일반적으로 한 가족이 소유한다”이란 뜻이다.
재벌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로 혈연으로 맺어진 일가족이 경영권을 장악한 족벌체제에 기초한 대기업집단이란 뜻이고 둘째로 이를 좀 더 확장해서 한국사회의 일반적인 대기업을 지칭하기도 한다. 이는 물론 한국의 대다수 대기업은 매우 특수하게도, 일가족의 족벌체제에 의해 운영되며, 이런 기업운영체제는 세계적으로 특수하게 한국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본 글에서는 재벌의 의미를 일반적인 한국의 대기업까지 아울러 살펴보겠다.
분명한 사실은 chaebol 이란 단어는 monopolistic capital(독점자본)과 구분된다는 것이다. 즉, 한국의 재벌과 세계독점자본을 동일하게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어단어에서도 드러나듯, 한국의 재벌은 자본주의 사회의 일반 독점자본과 그 구조가 상당히 다르다. 애니콜, 파브, 하우젠, 지펠, 래미안, 에버랜드, 신라호텔, SM5, 홈플러스, 애니카 보험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하나같이 삼성그룹이 내놓은 제품들이란 것이다. 삼성은 반도체, 휴대폰, TV, 에어컨과 세탁기, 냉장고, 자동차, 아파트, 자동차 보험, 놀이동산, 유통, 호텔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경영진에서 출발한 회사가 진출하지 않은 업종이 없다. 극단적으로 말해 한국에서는 삼성제품으로만 생활하는 것도 가능할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서는 이제는 재벌을 세계독점자본과 동일하게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하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재벌을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까?
보통 회사와 출발이 다른 재벌
과거와 현재가 실타래처럼 연결되어 있는 우리사회에서 기업의 초기성장단계, 초기 자본축적의 과정은 기업의 성격을 파악하는데서 매우 중요하다. 한국경제는 해방 후 미국의 무상원조와 차관을 통해 생산설비가 이식되었기 때문에 경제의 자립적 기초가 매우 약한 상태로 출발하였다는 것은 누구나 공히 인정하는 역사적 사실이다.
외국에서 빌려온 차관에 의해 기업활동의 첫발을 떼었던 한국의 기업은 초기자본을 형성하는 과정이 일반적인 자본주의 경제의 기업과 전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일례로 19세기 초반 영국사회에서 옷감을 만드는 A, B, C, D, E의 5개 회사가 있었다고 하자. 이상적인 자본주의 경제라면 이들 5개 회사가 옷감 소비시장을 놓고 공정한 자유경쟁을 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 가운데 만일 A회사가 생산에 좀 더 효율적인 기계를 개발해 도입하고 폭넓은 유통망을 갖추어 시장점유율을 늘려간다면 어떻게 될까? A회사는 매출이 증대되어 자본이 축척되지만 A회사와의 경쟁에서 뒤진 B, C, D, E 회사들은 그만큼 시장을 잃고 경영은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다.
이 현상이 지속될 때 자본을 축적하던 A 회사가 나머지 경쟁사 B, C, D, E 가운데 자금사정이 가장 열악한 E 회사를 인수한다면 E 회사의 설비와 자본은 그대로 A 회사로 집중된다. 영국의 옷감제조회사는 이제 A'(A+E), B, C, D의 4개 회사로 재편되고 A' 회사의 시장점유율은 A와 E자본이 집중된만큼 더 늘어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여 비로소 독과점과 대기업이 탄생하는 것이다.
A‘ 회사가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동안 나머지 B, C, D의 중소규모 기업들도 살아남기 위해 나름대로 끊임없이 신상품을 개발하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등 자체의 특성을 살려나가려 애쓰게 된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대규모화된 대기업과 더불어 중소기업들 역시 독자적인 상품시장을 형성하며 자기 토대를 구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그 결과 전체 시장규모도 끊임없이 확대된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자본주의 성장단계, 이른바 중소규모의 기업들이 서로 경쟁하며 그 승자가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단계가 애당초 존재할 수 없었다. 한국에서는 A, B, C, D, E의 다양한 회사가 자유경쟁을 하는 대신 박정희 정권이 미국으로부터 차관을 빌려와 정권과 미국에 밀착된 기업인(곧 재벌총수들이다.)들에게 정책지원을 무더기로 몰아주었다. 그 결과 이들은 철저히 친미적 입장을 견지하고 박정희 정권에 충성하는 대가로 기업경쟁력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처음부터 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 경제의 대전제가 되는 “시장자유경쟁”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토대에서는 일반적인 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 자본주의 도입단계부터 시장점유율이 높은 대기업이 출현하게 되지만 이러한 대기업은 덩치와 달리 경쟁력은 바닥을 헤맬 수밖에 없다. 자유경쟁으로 단련되는 과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유경쟁의 역사를 통해 나름의 생존전략을 구축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정부의 전폭적 지원에 의존해 급격한 성장을 이룬 것은 한국의 재벌과 외국독점자본의 중요한 차이점이다.
재벌을 지탱한 노골적인 정경유착
재벌의 또 하나의 특징은 70년대 형성된 재벌세력들이 4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대체로 몰락하지 않고 한국사회의 부유층을 선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삼성은 이병철-이건희 체제, 현대자동차는 정주영-정몽구 체제, LG는 구자경 체제가 40년 가까이 온존하고 있다. 다만 굳이 거론하자면 현대그룹의 정주영 명예회장은 남북경제협력에 나선 이후 계열사가 찢어지는 조정과정을 겪었으며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은 IMF 외환위기의 여파로 경제계에서 퇴출당하였다.
경쟁사와 제대로 된 경쟁 한 번 해보지 않은 재벌들이 70년대 짧은 시간에 초고속 성장을 이루고 현재까지 한국경제의 기반을 쥐게 된 배경은 바로 정경유착이다.
정부와 기업의 유착관계는 60-70년대 <차관경제> 시기에 확연히 드러난다. 박정희 정권은 수출지원금융, 수출산업설비자금, 특별설비자금, 산업합리화 자금 등 각종 정책금융들을 신설하였으며 이들 정책금융만을 집중관리하기 위해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등 금융기관을 설립하며 재벌을 노골적으로 지원하였다. 미국으로부터 차관이 쏟아져 들어오던 70년대에 국내물가는 연간 10-20%에 달할 정도로 천정부지로 올랐는데 재벌에게 제공되는 정책금융은 물가상승률보다 낮은 이자율로 자금을 빌려주게 되어 재벌에게 막대한 특혜가 돌아간 것이다.
<한국경제의 뿌리와 열매>에 의하면 이러한 방식으로 1953년부터 1984년까지 국내 재벌들이 공짜로 챙긴 돈만 해도 70억 달러 이상이라고 한다. 요즘가치로 환산한다면 대략 50조원에 육박하는 막대한 금액이다. 이러한 재벌 특혜는 해를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1990년 당시에는 30대 재벌들이 가져다 쓴 정책금융자금이 25조원으로 한국금융대출 전체의 과반수까지 차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1987년에 있었던 한진그룹의 대항선주라는 해운사를 인수하는 과정은 당시 정부의 재벌특혜가 어떻게 제공되었는지 잘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이다. 당시 대항선주는 은행부채만 7938억원을 떠안고 있던 상황이었지만 정부는 한진그룹(현재의 대한항공)이 대항선주를 인수하는 조건으로 전체 빚의 53%에 이르는 4207억원을 탕감해주었다고 한다. 당시 정권은 나머지 3731억원의 빚도 이자없이 무려 20년간 원급만 분할상환하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였다. <한국경제의 뿌리와 열매>는 당시 한진그룹이 대항선주 인수로 얻은 부당이득이 무려 2조 4600억여원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2조 4600억원에 이르는 국민들의 세금이 한진그룹으로 고스란히 흘러들어갔다는 것이다. 이같은 특혜가 지속된 결과 1990년 국내총생산(GNP)에서 30대 재벌이 차지하는 비중은 15%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정부의 재벌 특혜가 갈수록 대규모로 커진 결과, 급기야는 대기업에 너무 많은 돈을 빌려준 은행들이 부실해지기 시작, 1997년 외환위기(IMF 위기)의 직접 원인을 제공하기에 이르렀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은 22조 6000억원으로 당시 은행이 대출해 준 전체 대출자금의 6%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중 상당수가 재벌에 대한 대출이었다.
대기업의 높은 경제비중은 IMF 이후에도, 세기를 바꾸어서 계속 유지되고 있다. 2009년 1월 7일 경향신문에 따르면 삼성, 한국전력, 현대자동차, SK, LG 등 5대기업의 매출액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07년 무려 48.76%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2007년 말, 한국의 모든 결산법인이 보유한 현금성 자산은 총 62조 7000억원이었는데 상위 10대 그룹이 이 가운데 절반을 훨씬 넘는 35조 5000억원을 보유하고 있다.
순환출자로 돈을 불린 재벌
일각에서는 비록 초기단계에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성장하였더라도, IMF 이후 재벌이 국제시장에 뛰어들어 나름의 경쟁을 통해 자기시장을 구축한 만큼 이제는 온전한 독점자본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재벌의 자본축적 과정은 IMF 이전이나 IMF 이후나 다름없이 정부의 노골적인 정책적 지원 아래 추진되었다. 오히려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정부는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을 통해 재벌을 노골적으로 두둔해 제품의 질은 높이기 위해 노동비용을 줄이는 방식으로 국제시장 경쟁력을 키워왔다.
재벌은 정부의 특혜 아래 늘어나는 자기자산을 관리하면서 사업영역을 더욱 확장하기 위해 자기 계열사끼리 서로 자금을 제공하는 순환출자구조를 확립하였다. 이런 순환출자 구조는 일반적인 독점자본과 다른 재벌의 중요한 특징이다.
계열사 A가 자금이 급할 때 계열사 B로부터 자금을 빌려오고 나중에 계열사 B가 자금이 필요하면 다시 계열사 A로부터 자금을 빌려오는 방식을 상호출자라고 한다. 언뜻보면 효율적인 듯 하지만 계열사 A와 계열사 B가 동시에 자금이 필요하게 되면 A나 B 가운데 한 계열사는 부도를 피할 수 없다. 다만 정부의 전폭적 지원이 있기에 A, B 계열사가 모두 자금이 부족한 상황은 최소화할 수 있다. 재벌의 순환출자는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없이는 구축되기 힘든 경영방식이다.
계열사끼리의 내부 출자는 정부가 뒤를 받쳐주는 한에서는 사업을 무한히 확장할 수 있어 국내재벌들에게는 커다란 매력으로 다가와 이들의 자본증식에 기여하였다. 하지만 순환출자 가운데 계열사 A가 계열사 B에게 자금을 대출해주고 계열사 B가 계열사 A에게 자금을 다시 대출해주는 상호출자는 내외의 강력한 비판에 휘말려 1987년부터 자산규모 5조원 이상 기업집단에게는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가관인 것은 재벌들이 상호출자가 막히자 법망의 규제를 피하면서 계열사끼리의 출자구조를 지속하기 위해 A, B, C 3자의 순환출자 구조를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순환출자는 A→B→C→A로 자금을 투자하는 방식으로써 계열사가 중간에 하나 더 들어갔을 뿐 종래의 상호출자 구조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계열사 간 3자 순환출자구조는 아래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이미 여러 재벌그룹에 널리 일반화되어 있다.
10대 재벌들이 저마다 눈가리고 아웅하는 3자 순환출자구조를 이루고 있는 현실은 한국대기업들의 자금관리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한국대기업들은 이러한 순환출자구조로 소수의 주식만 보유하고서도 그룹전체를 지배하는 지배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2005년 재벌총수들의 주식비율은 다음 그림과 같다.
이를 보면 대다수 재벌들이 10%도 채 안되는 주식을 가지고 그룹 전체를 지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성그룹은 불과 4.41%의 지분을 가지고 31%의 지분을 장악하여 원래 지분의 7.06배의 의결권을 행사하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5.58%의 지분을 가지고 39.07%의 지분을 장악하여 원래 지분의 7배 의결권을 행사하고 있다. 특히 총수가 있는 자산 6조원 이상 재벌 9곳의 의결권승수는 8.57로 집계돼 재벌의 변칙경영이 매우 심각한 상황임을 알 수 있다.
이는 프랑스(1.07배), 독일(1.18배) 등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의 의결권 행사비율에 비해 훨씬 높은 수치다. 그만큼 우리나라 재벌들의 경영방식이 IMF를 지나 21세기에 접어들었어도 전혀 개선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문어발 확장의 부작용은 중복투자
한국의 재벌 기업들이 저마다 순환출자 구조를 확립하며 계열사를 늘려간 결과 인기있는 산업부문에 재벌들이 너나없이 뛰어드는 중복투자가 판을 치게 되었다.
다음은 주요 업종별로 한국의 30대 기업이 중복 진출된 정도를 나타내고 있다.
“부동산 불패”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돈이 되는 건설업과 같은 분야에는 무려 19개 그룹이 앞 다투어 중복진출하고 있으며 부동산, 여행사, 금융 등 속된 말로 큰 자산투자 없이도 돈 될 만한 분야에는 너나없이 떼로 몰려다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재벌구조가 고착화된 한국 대기업의 산업별 분포는 정상적인 자본주의 국가의 기업분포와 질적으로 다른 차이를 보여준다. 대개의 자본주의 국가의 대기업들은 자기 산업분야에서 특출한 경쟁력을 지니고 각자 나름대로 단일화된 기업체로 존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GM은 자동차를, 소니는 전자산업을, AIG는 보험을 전문으로 한다. AIG가 보험뿐 아니라 자동차에도 뛰어들고 인텔이 반도체를 떠나 냉장고까지 만들고 노키아가 휴대폰 사업 외에 아파트를 짓는 따위의 투자방식은 해외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기업의 산업별 기업분포는 다음 그림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가, 나, 다, 라, 마의 각 기업들은 자기 산업분야에서 시장경쟁력을 갖추고 대규모 설비를 가동한다. 이 경우 (가)와 같은 기업은 A산업을 독점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나머지 기업들도 해당 산업을 사실상 독과점상태로 장악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재벌의 산업 분포가 전혀 다르다.
한국대기업들은 아래 그림에서 보는바와 같이 문어발식 확장으로 (A, B, C, D, E) 각종 산업 부문에 걸쳐서 사업을 분포시키고 있다. 일례로 삼성그룹은 자동차와 전자, 보험에 이어 핸드폰까지 운용하고 있다. 한국 대기업의 이같은 문어발 확장은 일반 자본주의와는 다른 한국자본주의 경제의·특수성을 나타내는 주요 징표이다. chaebol과 monopolistic capital(독점자본)은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재벌의 문어발 확장은 80년대의 유물일 뿐,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고 볼 수 없다. 재벌의 경쟁적인 문어발식 확장은 IMF 외환위기 이후에도 매우 공격적인 형태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일례로 두산그룹은 2000년, 당시 공기업이던 한국중공업을 인수하여 두산중공업으로 사업을 시작하였으며, 2007년에는 미국 Ingersol-Rand의 건설장비 부문을 4,500억원에 인수하여 자산 17조원의 재계 13위 그룹으로 뛰어올랐다고 한다. 금호아시아나는 2006년 대우건설을 3조원에 인수한 다음 여기서 1조 6000억원을 다시 출자하고 여기에 아시아나 항공에서 출자한 1조 3000억원을 보태 2008년 3월에는 대한통운 지출의 60%를 4조원에 인수하여 한전그룹을 제치고 자산규모 26조 6000억원의 재계 10위 기업으로 발돋움하였다. 유진그룹은 2007년 서울투자증권을 인수한데 이어 2008년 하이마트를 2조원에 인수하였을 때 STX는 2005년 범양상선을 인수하는 등 세기가 바뀌고 IMF 경제구조조정을 이야기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전매특허인 문어발식 사업확장을 지속하고 있다.
재벌은 돈 되는 종목에 그야말로 떼로 몰려다니며 국가산업의 불균형적 발전을 심화시키는 주범이라 할 수 있다. 일례로 재벌은 제조업과 금융업 부문에만 집중적으로 몰려있을 뿐 농업에 투자하는 재벌을 찾아보기 힘들다. 미국은 카길, 몬산토 등 식량산업에 집중투자하는 독점자본체를 거느리고 있는데 한국은 농업을 관할하는 사업 자체가 전문적으로 분화되어 있지 않다. 재벌들이 외면한 결과이다.
해외투자로 감출 수 없는 재벌의 문제
재벌이 지난 시기 한국경제의 주요 산업을 움켜쥐고 국가 경제를 좌우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 이후, 이러한 재벌의 특등지위에도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IMF 이후 한국경제에는 외국자본이 물밀듯이 밀려오면서 재벌은 정부특혜 부문에서 외국자본에 밀려 점차로 2선으로 밀려나고 있다. 국내 알짜배기 이윤을 재벌만이 아닌 외국자본과 함께 나눠 갖는 양상이 펼쳐진 것이다. 그 결과 종래의 수익성을 맞출 수 없게 된 재벌들은 생존을 위해 중소기업을 압박하고 정리해고, 구조조정을 내세워 인건비를 줄여 경제부담을 국민들에게 전가하면서 그것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벌들은 해외투자를 늘려가고 있다. 일각에서는 미국, 중국 등 재벌의 해외투자가 늘어나는 점을 제시하면서 재벌도 이제는 “글로벌자본”으로 안착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위험성이 존재한다.
매일 노동뉴스에 의하면 2005년 국내 기업들의 해외투자 규모가 해외에 4,365건, 63억9,847만 달러를 보여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2004년에 비해 건수로는 15.8%, 금액으로는 7.2%가 증가한 것이다. 투자금액에서는 대기업이 전체의 76%를 차지해 전체 해외투자를 주도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2006년 상반기 재벌의 해외투자액이 29억 달러로 2005년 상반기보다 90% 늘었고 그 중에서 삼성전자는 TV, DVD플레이어, 컴퓨터 등 디지털미디어부문 해외생산 비중이 90%를 웃돌며 현대·기아자동차는 2006년에 36%인 해외생산 비중을 2009년까지 50%, 300만대로 늘릴 계획이라는 점을 제시하면서 재벌이 곧 글로벌 자본인 듯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재벌의 해외투자 증가는 외국자본에 의해 재벌의 경영권 방어까지 거론되는 최근의 추세와 결부지어서 살펴보아야 한다.
외국자본은 한국주식시장에서 30% 가량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시가총액 상위 10개 재벌로 한정지을 경우 외국자본의 비중은 41%로 늘어난다. 2008 경제위기 이전의 국면에서 삼성그룹은 2005년 기업순이익 10조 7000억원의 절반인 5조 3600억원을 경영권 방어를 위한 자사주매입에 쏟아부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재벌이 국내시장을 장악한 데 이어 해외시장으로까지 진출해 막대한 이익을 끌어모아 명실상부한 글로벌 독점자본으로 해외자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면 한국경제에서 재벌의 입지는 갈수록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재벌은 해외투자에서 막대한 이익을 벌어오면서도 취약한 경영구조로 경영권이 상실될 우려가 제기되고 있으며 불확실성을 매개로 막대한 자본을 사내유보금으로 남겨 각종 상황에 대비하는 형편이다.
한국거래소 자료를 보면, 10대 그룹 상장 계열사 72곳의 2010년 유보율은 평균 1219.45%로, 전년도보다 96.54%나 증가했다고 한다. 잉여금을 자본금으로 나눈 비율인 유보율이 높아진다는 것은, 기업 자금 가운데 투자 등 생산부문으로 흘러들어가기보다는 기업 내부에 남아있는 양이 커진다는 것을 뜻한다. 국내 대표기업인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의 지난해 말 현재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은 각각 9조8000억원, 1조8000억원으로 세후이익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각각 60.6%와 33.7%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재벌의 국내 고용은 늘어나지 않고 제자리걸음에 있다. 금속노조정책연구원이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지난 4년 동안 해외 고용은 83.5% 늘었는데 국내 고용은 5.3% 증가에 그쳤다. 200대 기업의 신제품 생산을 위한 시설투자는 6조6181억원으로 2008년보다 오히려 10%가 줄었다고 한다.
재벌이 단지 해외에서 돈을 벌어온다고 해서 독립된 국제자본으로 볼 수는 없다. 재벌은 순환출자로 지탱하는 소유구조가 취약하고 외국자본의 비중이 높아 경영구조가 불안정하다. 재벌의 불안정한 경영구조는 국내고용 증가를 방해해 한국경제 안정을 방해하는 주된 요인이 되고 있다.
재벌은 한국사회의 어두운 흔적
삼성과 LG가 세계시장으로 진출한다고 해서 이들 기업을 정상적인 회사로 보기 어렵다. 하나의 회사가 반도체도 만들고 아파트도 짓는데 자동차까지 만들고 보험에 물류유통업까지 한다고 하면 그 경쟁력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재벌은 가족단위로 형성된 족벌체제여서 그 경영효율성이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으며 썩고 썩어 곪아터지기 일보직전이라 할 수 있다. 일례로 한화그룹의 김승연 회장은 자기 아들과 싸움을 한 청년을 직접 손찌검하다 사법처리되면서 대망신을 당한 바 있다. SK그룹의 창업자 최종현의 조카인 최철원 M&M 대표이사는 맷값으로 돈을 준다며 탱크로리기사를 폭행하다가 구속되기까지 하였다.
가진 재주라고는 부모에게 돈을 물려받은 것 밖에 없는 이들이 자기가 세상의 왕인 듯 행세한다면 국민들의 분노는 높을 수밖에 없다.
세계에 유일한 기업형태, 그래서 chaebol 이란 영어단어가 생겨나고 있는데 정작 우리사회에서 재벌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지난 시기에 머물러 있다. 재벌과 정치권의 결탁관계가 사라진다고 해서 재벌의 해악이 근절된 것은 아니다. 재벌은 그 존재 자체가 한국경제의 경쟁력을 잠식시키며 사회통념의 발전을 저해하는 부정적 요소이다.
차관이라는 어두운 과거를 갖고 있는 한국경제에서 형성된 재벌이라는 존재가 세기를 바뀌어 여전히 온존하고 있다. 재벌 문제는 우리가 항상 경각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문제이며 우리경제가 정상화되기 위해 꼭 해결해야 할 우리 모두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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