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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독립 투쟁의 역사 (3-➁)

토론게시판

by 붉은_달 2012. 6. 26.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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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이병진(양심수)

 

[편집자 주: 이번 연재는 지난 20119월호에 연재되었던 세 번째 연재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이병진 동지의 편지를 정리하다가 연재가 누락된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착오로 인해 이병진 동지와 독자들께 혼란을 끼쳐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이번호 예정되었던 인도 독립 투쟁의 역사 (10)”은 다음 호에 이어질 예정이다.]

 

 

회사(동인도 회사: 번역자)가 도입한 토지 개혁의 결과와 교역 그리고 수공업의 쇠퇴에 따른 농촌 인민들의 가난은 농촌 마을과 도시 지역 모두를 파괴시켰다. 이런 쇠퇴와 인도 인민의 몰락이 영국에서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시켰다는 점은 과장된 말이 아닐 것이다. 영국의 정치 평론가들도 스스로 이런 사실을 인정하였다.

 

영국 역시 농업혁명이 노동자들을 토지에서 쫓아냈고 실업을 증가시켰다. 이로 인해 매우 비참한 고통이 초래되었다. 그러나 곧 이어진 산업혁명이 실업자들을 흡수하여 새로운 공장제 공업의 기반이 되었고 실업과 고통의 기간은 짧았다. 반면에, 인도는 노동자들이 가내공업에서 풀려났지만 그들을 흡수할 공장 또는 농업의 발전이 상대적으로 미비했다. …… 사회혁명에 의한 인도 사람들의 고통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오래 지속되었다.

 

왜 인도 민중들은 그런 상황으로 내몰렸고, 그 결과 고통스럽고 비참하게 지내야 했는지 그리고 왜 그들은 영국의 지배에 대항해서 항쟁을 일으키지 않았는지 질문이 제기된다.

 

다음 장에서 보겠지만, 사실 인도 인민들은 영국의 지배에 대항해서 여러 차례 봉기를 일으켰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런 봉기들은 무장 투쟁의 형태로 나타났다. 봉기들은 세기말부터 다음 세기에 걸쳐 여러 국면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생했다. 이 봉기들은 영국의 지배가 시작되면서 발생하였다.

 

그러나 1857년의 투쟁 만큼 널리 퍼졌던 봉기는 없었다. 전통적으로 인도 지배자들이 수도로 여겼던 델리의 핵심 권력자들은 봉기의 중심이 아니었다. 반대로 그 봉기들은 델리에서 멀리 떨어진 상대적으로 작은 지역에 국한된 고립된 투쟁이었다. 그리고 이 투쟁들은 각각 1857년의 봉기처럼 진압되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무역상인들은 오래전부터 인도에 왔다. 서아시아와 몇몇의 유럽 국가 그리고 중국 같은 동쪽 나라들에서도 왔다. 교역활동을 하는 동안, 그들 역시 이 나라에서의 사회문화적 삶에 참여했다. 그들은 이 과정에서 이 나라의 삶에 스스로 동화되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인도에 정착했고 그 결과 인도인이 되었다.

 

인도의 인민들은 항구에 정착한 유럽의 무역회사들과 이 회사에서 일하는 이들을 앞서 인도에 왔던 무역상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대했다. 인도 인민들은 그 무역상들이, 그들의 전임자처럼, 점점 인도인이 되거나 또는 최소한 인도 인민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것이라 믿었다.

 

바스코 다가마가 캘리컷 땅을 밟은 지 250년 가까이 지난 후, 영국과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 열강들이 그들끼리 인도 지배권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던 18세기 중엽에, 영국의 클라이브와과 프랑스의 듀플렉스가 그들 국가를 대표하는 무역회사들의 대표자로서 인도에 왔다. 그들의 도착하면서 무역회사의 성격은 완전히 변했다. 그들(영국과 프랑스 상인들: 번역자)은 서로 치고받으면서 지역 엘리트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고 지역 엘리트들을 통해서 행정기제의 통제권을 얻었다. 플라시 전투는 이런 상황에서 영국의 결정적 승리를 반영한다.

 

무갈제국이 쇠퇴하면서 영국과 프랑스의 경쟁뿐만 아니라 그 보다 앞서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사이의 경쟁의 기름진 토대를 제공하였던 정세도 이해해야 한다.

 

아우랑제브(Aurangazeb) 이후, 무갈제국의 황제라는 칭호를 받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이런 왕들 아래에서 지방관, 왕자들, 군대의 우두머리들이 사실상 지배자들의 기능을 하였다. 그 당시 인도에서는 델리의 무갈제국으로부터 공식적이든 아니든 자치권을 얻은 지방의 지배자와 봉건 지도자들의 지배가 만연되어 있었다. 이런 지방의 지배자들은 각각 개별적으로 영토를 넓혀 그의 권위를 키우려고 노력하였고, 그 지역에 있는 군대의 우두머리들을 통제하고자 하였다. 지역 지배자들끼리의 그런 갈등들이 그 당시 인도 내의 지배적인 정세의 일부분이었다. 예를 들면, 께랄라의 세 왕자들(캘리컷의 자모린, 코친의 마하라자, 트라방코르의 마하라자)은 봉건 제후들과 몇 차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강력한 지배자가 되었다. 바스코 다가마가 캘리컷에 도착했을 때가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두 세기가 지나, 처음에는 포르투갈 다음에 네델란드 그리고 뒤를 이어 영국과 프랑스 외국 무역회사들이 지배자들과 우호관계를 맺다가도 적대하면서 자신들의 무역패권을 세우려 하였다. 한편으로 이 세 왕자들은, 자신들의 무역을 보호하기 위한 소규모의 해군을 유지하였던 이들 유럽 무역회사들의 무장력을, 자신들의 영토를 확장시키는 데 이용하였다. 이와 같은 일이 인도 전체에 벌어졌다. 세력가의 가문들이 상속권을 둘러싸고 다투고 싸우는 상호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서 유럽 무역회사들의 도움을 구하는 일이 관례화되었다.

 

세력가의 가문, 봉건 영주, 지방의 군 수장들이 그 당시 인도 사회의 중요한 계층이었지만 그 시기의 지도층이 이들만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었다. 유럽 국가들보다는 느린 속도였지만, 인도에서도 상인 계급이 등장하고 있었다. 상인 집단들은 국경에서부터 인도 안에서의 상품 교환과 교역에 종사하였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은 대왕이나 왕자들에게 돈을 빌려 줄 정도로 부자였다.

 

다른 말로 하면, 유럽 국가들보다 느린 속도였지만, 자본주의 사회적 힘이 중세 인도 사회 안에서 발전하고 있었다. 유럽 무역 회사들의 협력과 함께 그 상인들이 교역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유럽 무역 회사들이 행했던 것처럼 인도의 상인 계급도 이익을 가져갔다.

 

과거의 지배자들, 봉건 영주들, 지방 군 수장들, 그리고 교역과 산업에 종사하는 모든 계층들은 유럽 무역회사들의 역할과 발전에 관심이 있었다. 유럽 무역 회사들도 이들 계층의 이익에 거슬리지 않게끔 무역을 하려고 하였다. 유럽 상인들을 제치고 최종적으로 승리한 영국은 그들의 지위가 확고해 진 이후에도 이런 정책을 지속하였다. 19세기 중반까지 영국 지배자들과 대지주, 무역업자, 고리대금업자들로 이루어진 풍족한 계급들 사이의 협력이 목격되었다. 그러나 이런 협력은 길지 않았다.

 

그때의 인도 지배자들은 인도의 앞선 역사에서의 무역상들과 다른 그 무역상(영국무역상편집자)들의 특징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무역상들과 경제적 계약 혹은 군사협약을 맺는 것이 그들의 이익을 침해하거나 손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인도의 엘리트들은 프랑스와 영국이 18세기 중반에 유럽 회사들이 그때까지 따르던 것과 다른 즉, 실행에 옮긴다면 인도에서 자신들의 지배권에 접근하게 될 정책을 채택하였음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지금 당장의 이익을 얻기 위해 유럽 회사들에게 도움을 얻으려는 좁은 시야를 갖고 있었다.

 

우리는 이미 플라시 전투에서 영국의 승리에 따른 전개를 살펴보았다. 델리의 대왕에게 디와니로 인정받고 벵갈, 비하르 오디샤의 행정을 지배하였다. 그들에 의해서 토지 개혁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영국 정부와 인도의 새로운 영국 지배자들에 의해서 경제정책이 집행되자 인도의 수공업과 무역업은 쇠퇴하였다. 경제영역에서 일어난 파괴적인 변화들은 지배계급만을 몰락시키지 않았다.

 

사실, 벵갈, 비하르, 오디샤에서 디와니가 되어 토지 소유제도를 도입하였고, 나중에 영국의 지배가 미치는 전 지역으로 확대된 그 변화들이, 그들의 행정과 교육영역 및 그 나라의 사회 문화적 삶의 모든 영역들에 영향을 끼쳤다. (영국이 도입한 정책들은 편집자) 마을 빤짜야뜨들(gram panchayats)과 카스트 부락 조직이라는 지방 자치체 제도뿐만 아니라 황제와 다른 지배자들, 봉건 영주와 지방 지도자의 뿌리를 바로 내리찍었다. 영국 지배자들이 조세행정제도를 교체했을 때 가져온 변화가 바로 이런 것이다.

 

[회사의 고용인이 세금을 관리하고 징수할 수 있다는 이사회(Court of Directors)의 결정과 관련된저자] 법령이 만든 변화의 특징은 거대했고 그것은 그 자체의 속성이 산출한 것이다. 그것은 과거의 추측보다 더 큰 혁명이었고, 힌두에서 모하메단(Mohammedan) 지배자로의 변화가 창조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혁명이었다. 힌두에서 모하메단으로의 이행에서 지배자들은 단지 칼자루를 쥔 손만 바꾸었고 호의를 베풀었다; 정부기제의 변화는 미미했으며, 사회 조직(texture)의 변화는 더욱 미미했다; 그리고 시민행정은 편리함을 위해 거의 대부분 힌두 사람들에게 맡겼다. 조세 관리에서 총체적 변화는 개인적 그리고 집단적으로 인도 인민들의 삶의 조건에 유럽 사람들이 쉽게 품고 있는 생각보다 훨씬 깊게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나라 전체의 재산을 혁신하는 것이었고 사법행정의 새로운 기초를 만들었다.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조세국이 일반행정에서 중심기구로 되었다. 군집정관(District Collector)부터 마을 사무관(Village office)까지 둔 조세국은, 유지되었던 전통적인 행정체계의 토대를 허물어뜨렸다. 더 이상 마을 빤짜야트와 지역 자치기구들은 행정체계에서 찾을 수 없었다. 또한 지역 수장들과 이 기구들을 감독하거나 세금을 거두어갔던 봉건영주들도 찾을 수 없었다. 그 대신 맨 아래의 마을부터 맨 꼭대기 총독까지 체계화된 새로운 강철 구조가 생겼다.

 

그러함에도, 과거의 지배계급들은 계속해서 봉건 제후의 지위와 그로부터 수입을 얻어내는 혹은 말리칸(malikhan)이라는 낡은 지위를 즐겼다. 이 소수의 지배계층들은 새로운 지배자들에게 충성을 바치는 조건으로, 종주국 영국 지배 하의 왕자들로서 지배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실제 힘을 갖거나 행정을 공유하지 못했다.

 

이 새로운 행정체계는 서서히 진화되고 공고화되었다. 1773, 1783, 1813, 1833년 그리고 1853년에 인도법(India Act)”이 영국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그리고 매년 행정제도가 기타 방법들에 의해서 재정비되었다. 매 단계마다 영국 정부가 관여했다. 과거 지배자들의 토대와 그들의 추종자들인 봉건 영주들 그리고 그들의 행정 기능에 기초했던 사회 문화적 삶은 영국 정부의 역할이 증대하는 만큼 침식당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나라 곳곳에서 여러 봉기들이 발생하였다. 그 봉기들은 족족 진압되었고, 뿐만 아니라 고대와 중세 시대부터 인도 통치의 중심에 있었던 델리와 그 주변의 봉건 제후들 역시 굴복당했다. 이렇게 사태가 전개되고나서야 지배계급과 북인도의 인민들에게 새로운(외국) 지배자들의 진짜 색깔이 드러났다. 이런 정세의 고조로 1857-1859년 독립투쟁으로 불만족이 폭발했다. 타라찬드(Tarachand)는 이런 폭발이 일어나기 직전의 정세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그 계급들을 질식시키고 대중들을 숨쉬기 곤란하게 하는 치명적인 장막이 인도 전체를 덮고 있다. 무슬림과 힌두 왕자들은 무장해제되고 고립되었다; 무슬림과 힌두 가문들, 부족민들 그리고 병사들, 행정가들, 지도자들을 제공했던 카스트들은 사무적 책임에서 배제되었고 노예처럼 봉사하도록 운명 지워졌다; 무슬림과 힌두의 지식인 계급들은 임명직에서 쫓겨났고 서서히 그들의 직업에서 밀려났다.”

 

장인들과 도시 빈민 그리고 빈농들과 농촌 빈민의 비참한 삶이 엘리트의 불만이 생겨난 배경이었다. <노사과연>


* 출처 :  노사과연 http://www.lo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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