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동기 우리사회연구소 상임연구원
2012.5.31.
한국사회에서 진보정당은 어떤 위치일까? “진보”라는 이름이 자유롭게 통용된 것도 그리 오래지 않다. 한국사회의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한국진보정당의 역사는 외세와 집권세력으로부터 집중적인 탄압의 대상이 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진보정치는 외세에 의한 분단을 반대하고 남북의 평화통일을 위한 노력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군사파쇼정권이 출현하자, 진보정치세력은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적으로 싸웠다. 1980년 광주항쟁 이후, 진보정치세력의 현안은 편향된 한미관계를 바로잡는 문제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이 가운데 주목해야 할 점은 평화통일이야말로 진보정치세력이 자기 정체성을 두고 싸워온 고유의 가치이며 핵심의제라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이 비록 진보정당 소속은 아니지만, 이 두 정권은 역사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진보정치세력은 자주통일을 위해 노력하는 정치세력이다. 보수세력은 자주통일을 반대하는 세력이다. 지난 60여년에 걸친 한국정치의 역사가 이를 자연스럽게 구분해준다.
1. 여운형 선생 암살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자주독립을 쟁취한 1945년, 38선 이남에서 정치적 영향력이 지대하였던 인물은 여운형 선생이었다. 일제의 국세가 기울던 1944년 8월에 일제의 패망을 내다본 여운형 선생은 비밀리에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하고 각 지역에 비밀리에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조국광복을 준비하였다. 그 결과 여운형 선생은 독립 직후인 1945년 9월에 조선인민공화국을 결성하여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향한 큰 걸음을 내디뎠다. 여운형 선생은 1945년 8월에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9월부터 1946년 2월까지 조선인민공화국의 부주석을 지내며 우리민족이 자체의 역량으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낸 커다란 공로를 세운 역사적 인물이다.
여운형 선생의 정치이념은 대체로 민족주의를 따르고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여운형 선생의 정치는 “진보정치”라 칭할 수 있다. 진보란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사회의 변화나 발전을 추구하는 세력을 의미한다.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배에서 해방되었으나 외세에 의해 38선을 기점으로 남북이 나뉘던 당시 상황에서 합리적 진보란 바로 외세를 배격하고 민족통일국가를 건설해 유린당한 민족적 자주권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남측의 일부 사회주의 인사들은 통일을 위한 단결보다 무산대중의 폭력혁명을 선동하고 즉각적 사회주의 이행을 주장하며 정치적 선명성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오히려 진보정치와 대중의 거리를 떨어뜨려놓을 뿐이었다.
여운형 선생은 분열을 반대하고 조선의 모든 정치세력이 힘을 합칠 것을 호소하였다. 선생은 1946년부터는 김규식, 안재홍 선생과 함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좌우합작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여운형 선생의 노력은 한국정치에서 연대정치의 시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운형 선생에게 돌아온 것은 민중의 찬사가 아니라 좌우합작을 반대하는 세력의 정치테러였다. 선생은 십여차례의 테러에도 살아남았지만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차량으로 이동 도중, 배후가 불확실한 백의사 청년단의 저격을 받고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당시 미군정은 여운형 선생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몽양 여운형 -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이정식 지음, 서울대출판부 출간)에 의하면 1946년 8월, 미 국무부가 파견한 미군장교 레나드 버치 중위가 사령관 존 하지에게 '여운형의 일본인 접촉과 관련한 조사를 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이에 존 하지 사령관은 '일리있는 말이군. 나는 그(여운형)의 약점을 잡고 싶다.' 면서 군정청 외무부 소속의 찰스 오리오단이라는 소령을 일본으로 보내 조선총독부에서 일한 사람들을 찾아가 조사하곤 했다고 한다.
60년이 지났건만 여운형 선생 암살사건 전모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운형 선생의 암살은 좌우합작을 비롯한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조선의 정치세력에게 커다란 악재로 작용하였으며 미군정과 더불어 분단 단독정부를 세우려는 이승만 세력에게는 선생의 사망이 유리하게 작용하였다는 점이다.
여운형 선생의 암살에서 보듯이 조선은 일제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하지만 진보정치의 길은 험난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여운형 선생이 암살당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가 좌우합작을 추진하였기 때문이었다. 미군정과 민족분단세력에게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바로 좌우합작이었다. 좌우합작이 결렬되어야 조선의 힘이 작아지고 비로소 외세가 개입하기 쉬워진다. 그러나 좌우합작이 성사되면 조선의 힘이 커져 외세가 개입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2. 김구 선생 암살 과정
여운형 선생이 암살당하자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노력은 다소 정체되고 만다. 미군정과 민족분단세력은 이 기회에 진보적 활동에 “좌익” 딱지를 붙여 맹렬히 탄압하였다. 민족자주지향의 건국준비위원회는 미군정기에 대체로 해산되어버렸고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에 반대하고 남북통일국가를 건설하자는 세력은 빨치산으로 내몰리며 제주 한라산으로, 지리산으로 쫓겨 들어가는 상황이었다.
험난한 좌우합작의 길은 우파정치인이었던 김구 선생이 합작의 대용단을 내리면서 다시금 활성화되었다. 1948년 4월, 김구 선생은 북한의 당시 김일성 수상이 제안한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전격적으로 응해 방북을 단행한 것이다. 38선을 넘은 김구선생은 4월 30일, 김일성, 김규식, 김두봉 등과 회동하며 통일국가 수립방안을 논의하였다.
김구 선생에 대한 미군정의 입장은 여운형 선생과 달리 초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애당초 김구 선생이 극렬한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945년 11월 2일, 존 하지 중장은 주한미군 사령부 참모회의 석상에서 "김구는 스튜(고깃국)에 필요한 소금이 될 것이고, 그의 출현은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분단의 폐해와, 이승만 세력의 노골적인 단독정부 수립방침은 김구 선생으로 하여금 반공에서 연공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이끌었다. 민족의 통일독립을 바라는 그의 애국심이 뿌리깊은 반공의식을 뛰어넘었던 것이다.
김구 선생이 방북하여 김일성 수상과 회동하고, 좌우합작에 대한 노력을 개시하자 미국은 당황하였다. 1949년 6월 26일, 12시 36분, 김구 선생은 서울의 자택인 경교장에서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의 총격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인 정병준 박사와 재미사학자 방선주 교수는 안두희가 미군 방첩대(CIC) 정보원이자 정식 요원이었으며, 우익청년 단체였던 백의사 특공대원으로 활동한 사실을 미 국립공문서 보존기록관리청 문서를 통해 밝혔다고 한다. 김구선생의 암살배후에 미군정이 의심되는 지점이다.
민족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노력은 이렇듯 매 고비마다 불순한 세력의 정치테러에 의해 실현되지 못하였다. 김구 선생의 경우도 여운형 선생과 마찬가지로 민족통일을 위한 좌우합작의 길에서 애석하게 희생되셨다. 김구 선생의 희생으로 기세를 올린 것은 바로 미국과 이승만 정권이었다.
3. 사법살인 당한 조봉암 선생
1950년을 거치며 한국사회에서 진보적 인사는 대체로 세 가지 경로를 거치며 철저히 토벌, 학살당하였다. 첫 번째, 이승만 정권의 박해를 받던 상당수 인사들은 전쟁을 계기로 월북하였다. 또한 산으로 옮겨 끝까지 저항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미군과 이승만 정권의 빨치산 대토벌을 피할 수 없었다. 대다수는 이름모를 산야에서 비장한 최후를 마쳤으며 비전향장기수로 끝까지 신념을 지킨 인사도 찾을 수 있다. 세 번째 탄압경로는 보도연맹 대학살 사건이다. 이승만 정권은 진보정치세력을 고립시킬 목적으로 수십만명의 사람들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시켜 감시하고 있었는데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들 모두를 학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수십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을 대학살한 사건이다. 한국전쟁 때 학살된 보도연맹원의 수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알 길은 없지만, 최소 20만 명, 많게는 50~100여만명이 학살되었으리라는 추산이 나오고 있다.
이처럼 정권의 탄압은 자주통일세력에게 집중되었으며 전쟁 국면을 틈타서는 광기어린 대학살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씨가 말랐다던 한국진보정치는 이내 다시 살아 움직였다. 바로 1956년, 죽산 조봉암 선생이 이승만 독재에 맞서 평화통일 구호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돌풍을 일으킨 것이다.
조봉암 선생은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공산당 활동을 하였던 좌익계열 인사였다. 그러나 조봉암 선생은 남로당 박헌영 세력의 활동방식에 반대해 공산당을 나왔으며 1948년 7월, 국회 헌법기초위원장으로 헌법 제정에 참여하였다. 조봉암 선생은 제1대 농림부장관과 제2대 국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조봉암 선생은 진보당 당수로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평화통일 주장을 앞세우면서 30%라는 지지율을 얻어 파란을 일으켰다. 진보당이 여야 경쟁구도에서 확고한 제3당으로 올라서게 되자 드디어 대중을 위한 정치가 펼치리라는 각계의 기대가 넘쳐났다.
조봉암 선생이 평화통일을 내세워 민심을 뒤흔들자 이승만 정권은 선생을 간첩으로 몰아 사법살인하였다. 1958년, 조봉암 선생이 상인 양명산을 통해 북한의 정치자금을 건네받았다는 혐의로 진보당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1959년, 조봉암 선생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승만 정권이 조작한 진보당 사건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조봉암 선생은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아 복권되었다.
오늘날에도 그러하지만, 당시 진보당 사건 과정에서는 관변단체 및 우익단체들이 여론을 주도하였다. 조봉암 선생이 북한으로부터 정치자금을 제공받았다고 관변단체 및 우익단체들이 공격하자 이승만 정권은 우익이 형성한 여론을 등에 업고 진보당 사건을 조작, 탄압하였다.
1958년 1월 12일 새벽, 돌연 비상사태에 돌입한 서울시경 관하 형사대는 이강국 치안국장과 최치환 시경국장의 진두 지휘 아래 진보당 간부에 대한 일제검거에 나섰다. 윤길중, 조규택 등은 서울에서, 진보당부위원장 박기출은 부산에서 각각 체포되었다. 조봉암 선생은 피신하여 간신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봉암 선생은 진보당 인사들의 체포소식을 듣고는 자신이 도망을 가면 뒤집어 씌운 혐의가 사실화될 것이고 그러면 체포된 동지들이 희생될 것이라고 말하며, 당국에 전화를 걸어 자진출두하게 된다. .
조봉암 선생은 1심에서는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우익 단체로부터 조봉암 선생의 사형을 집행하라는 비판이 빗발쳤다. 이승만 정권은 이번에도 우익단체들의 주장을 등에 업고 조봉암 선생에 대한 사형을 집행하였다.
오늘날에야 밝혀진 바와 같이. 보수우익단체들과 이승만 정권이 합작한 진보당 사건은 철저한 조작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조봉암 선생의 사형집행은 이승만 정권의 사법살인인 것이다.
4. 군사파쇼에 의한 진보정치의 암흑기
1960년 4.19 혁명의 도화선은 진보정치가 꽃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이승만 정권은 수십만 양민을 학살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는 다시금 국민들의 마음에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그러나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의 군사쿠데타에 의해 4.19 정부는 해산되고 한국사회는 합법적 정치공간이 대폭 줄어들게 된다. 이는 전두환 신군부를 거쳐 19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지속된다.
87년 6월 항쟁 이후, 재야운동권에서는 대중활동과 병행하여 제도정치권 내부에서 국민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진보정당을 건설하자는 논의가 일기 시작하였다. 특히 1987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민중후보 독자출마론을 주장하였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진보당 이후 명맥이 끊어져 온 합법적인 진보정당 창당 논의가 지속되었다.
1989년 11월 20일 이우재, 장기표 등은 민중의 당과 한겨레민주당을 이끌어온 인사들을 주축으로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을 위한 준비모임'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90년 4월 '민주연합추진위원회'에 참가하였으나 선야권통합을 주장하는 이부영 등과 의견대립을 보이다가 1990년 11월 10일, 민중당을 창당하였다.
그러나 90년대 말, 소련이 붕괴하자 소련이 주도하는 사회주의 운동에 기대를 걸었던 운동인사들은 크게 낙심하였으며 민중당의 일부 세력의 동요는 커져갔다. 김영삼 정권은 이들 가운데 동요하는 김문수를 1994년에 변절시켜 민자당에 끌어들였다. 김문수는 민중당 구로갑지구당 위원장을 지냈으며 민중당 노동위원장으로 선임되고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김문수는 낙선 후 “혁명의 시대는 갔다”며 공개 전향하고 노선을 180도 전환해 새누리당에 있다.
김영삼 정권은 1996년에는 이재오를 변절시켜 신한국당으로 끌어들였다. 민중당에서 정책위원장을 하던 장기표는 뉴라이트와 연대를 검토하기도 하는 등 정치적 행보가 일관되지 못하고 있다. 민중당도 당연히 주저앉고 말았다.
민중당이 맥없이 주저앉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 준비했던 91년 지방선거와 92년 총선의 선거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민중당은 1991년 1월 지방선거에서 42명의 후보가 출마하였지만 1명이 당선되는데 그쳤다. 이어 민중당은 1992년 3월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51명의 후보가 출마하였지만 평균 6.25%의 득표율을 기록했으며 한 명도 당선되지 못하여, 정당법에 의거 해산되어 버린 것이다.
민중당 상층의 일부인사들은 민중당의 실패를 자신의 부족에서 찾을 대신, 민중당 노선의 문제로 확대시켰다. 민중당 선거결과에 낙담해 변절한 김문수는 심지어 자기 변절의 합리화를 위해 “혁명의 시대는 갔다”며 혁명을 끌어들였다. 이재오는 온 국민에게 시름과 좌절을 안겨 준 이명박 정부가 한국사회의 대안이라며 목에 핏대를 세우기도 하였다.
1990년대의 혁신적 분위기에서 출범한 민중당의 좌절은 오늘 통합진보당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고 할 수 있다. 선거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면 부족한 선거결과의 원인은 자신에게서부터 찾는 자세가 바탕해야 한다. 그 누구도 완벽한 정치세력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야 시련을 함께 이겨내며 단결할 수 있다.
선거결과가 미흡한 원인을 제 주변에서 찾고, 시대에서 찾고, 다른 정파에서 찾기 시작하면 이는 필연코 상대의 반발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단결의 구심은 걷잡을 수없이 흐트러지고 진보정치역량은 사분오열되고 만다. 이 틈을 타고 집권세력의 탄압이 가해지는 것은 한국진보운동의 하나의 법칙이다.
5. 진보정치는 평화통일, 민족자주
민중당의 좌절 이후, 진보정치역량은 “국민승리21”을 시작으로 재도전하였으며 이는 이후 민주노동당으로, 그리고 통합진보당으로 이어지고 있다.
역대 정권들은 진보정치세력을 암살하고, 학살하고, 분열교란시키고, 변절케 하였다. 진보정치의 화두가 평화통일, 민족자주였기 때문이다.
정권은 진보정치세력의 득세를 막기 위해 유사 진보정치를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2007년 대선 과정에서 불현듯 출현한 문국현 후보는 창조한국당을 창당하며 대선국면에서 반짝했지만 대선이 끝나자마자 홀연히 종적을 감춰버렸다. 결국 2007년의 창조한국당은 민주당의 개혁에 답답함을 느끼지만 민주노동당의 활동에는 거리감을 느끼던 잠재적 진보대중들을 흡수해 민주노동당의 약진을 방해한 결과를 낳았다.
평화통일과 민족자주는 여운형, 김구, 조봉암으로 이어지는 한국사회 진보정치의 굵은 뿌리를 갖고 있다. 평화통일과 민족자주를 “반미종북”으로 매도해 탄압하는 것은 70여년 전 미군정 시절부터 일관된 보수세력의 방식이었다. 그 와중에 자파세력의 이익을 밝히는 인사들을 활용해 대오를 분열시키고 신념을 잃고 방황하는 자들은 적극적으로 포섭해 변절케하였다. 역사를 살펴보면 정통진보와 유사진보의 구분법은 바로 평화통일과 민족자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복잡한 한국사회에서 진보정치를 뿌리내리려면 진보의 피어린 역사를 알아야 한다. 진보정치는 “되면 좋고 안되면 마는” 식의 정치실험도 아니고, 목적과 방향도 없이 말꼬투리 잡으며 허송세월하는 말장난도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진보정치는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 조직과 민족, 국가의 운명이 결정되는 중대한 문제였다. 진보정치의 뒷켠에는 늘 외세와 보수세력이 있었으며 진보정치의 하루하루는 외세와 보수세력간의 피어린 싸움의 연속이다.
2012년, 민족사적 대전환기의 중대한 시기를 맞아 진보정당에 대한 담론이 쏟아지고 있다.
역사적 과정을 볼 때 진보정치의 적은 평화통일, 반미자주도 아니었으며 진보진영 내의 정파도 아니었다. 진보의 적은 언론의 뒤에 숨어있는 외세와 보수세력이었다. 이것이 한국진보정치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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