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세 편의 글은 이병창 동아대 명예교수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웹사이트에 게재한 글이다.
유시민의 논리와 이정희의 논리
이병창
나의 삶의 원칙 중의 하나가 있다. 그것은 끝까지 이론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다. 시민사회적인 실천이라면 몰라도, 정당정치적인 참여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그 원칙을 나는 지켜왔다. 다만 현재는 통합진보당의 당원이다. 그러나 한 번도 어떤 모임에도 나가본 적이 없다. 그것은 내가 속한 분회에 물어보면 알 것이다. 다만 진보의 정치를 후원하기 위한 참여에 불과하다.
이렇게 나 자신을 밝히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지금 내가 쓰는 글이 오해를 자아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명백히 말하는 데 결코 당권파가 아니다. 당권이 아니라 당직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의 글은 당권파를 옹호하는 것처럼 보일 것임을 안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쓰는 그 이유는 아래 글에서 밝혀질 것이겠지만 지금 우리 시민사회가 특히 진보주의자들이 너무나도 위험한 사고방식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볼테르만한 능력이 없고 에밀졸라와 같은 열성도 없다. 그러나 누군가 그런 역할을 해 주어야 할 것 같아서 지금 이 글을 쓴다.
무엇이 위험한 사고방식인가? 지금 많은 진보주의자 지식인들 그리고 언론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논리가 있다. 그것은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어 억울하더라도 당권파는 당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정치의 논리이고, 통합진보당이 제3당이 되었으니 이제 정치의 논리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유시민의 논리라 칭하겠다. 실제 그는 이런 주장을 해 온 것으로 안다.
역사를 공부하여 본 사람이라면 이런 논리가 너무나도 익숙하게 들어온 나치의 논리였음을 잘 알 것이다. 나치가 주장했던 것이 국민이다. 그것을 위해 그들은 유태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왜 유태인이었던가? 유태인이 유럽의 사회의 변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치는 집시들을 박멸했다.
정치의 세계에서 이런 희생양의 논리는 너무나도 자주 사용되어 왔다. 아주 가까운 예로 이라크 전쟁을 들어보자. 부시는 알카에다의 테러에 대해 이라크 후세인 정권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왜 이라크였던가? 후세인이 이슬람이고, 또 독재자이니 죄를 뒤집어 쓰기에 가장 적절한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진보 언론과 진보지식인이 그들 스스로 그토록 무서워하던 나치의 논리에 그대로 빠져들었다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약간 짐작 가는 것은 있다. 그것이 바로 ‘종북파’라는 딱지이다.
당권파는 오래전부터 종북파라는 딱지를 부여받았다. 최근 그런 딱지를 붙인 것이 잘못이라는 점이 공인되었다. 그러나 한번 붙여놓은 딱지는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여전히 그들은 시시때때로 종북파라고 불린다.
그런데 종북파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유대인과 같은 처지에 있다. 마치 유대인이 음모의 소굴이라 여겨졌듯이 우리사회는 종북파가 모든 음모의 소굴인 것처럼 두려워 한다. 그런데 그들이 소수였을 때는 그래도 참아 줄 수도 있었다.그러나 마침내 제3당의 자리를 차지하자, 위기감이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나의 주장을 단적으로 실증하는 사실이 있다.
오늘 아침 조선일보를 보라.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주사파가 대한민국의 법을 만든다”라고. 이 위험한 나치적인 선동이 바로 그간 사태의 진짜 원인을 밝혀주는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전후 나치와 같은 범죄를 막기 위해 등장한 이론이 바로 인권이론이다. 그것은 소수파, 주변인을 비롯한 누구에게도 법적인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인권이론에 기초하여 무죄 추정의 원칙 등과 같은 여러 법의 원칙들이 확정되었다.나는 이런 인권이론들을 법치의 원리라 하겠다. 이것이 바로 바로 이정희 대표의 논리이다.
진보 지식인들과 진보 언론은 이구동성으로 이정희 대표를 사악한 종파주의자로 그려놓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정희 대표는 소수 당권파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억울한 희생자를 막는다는 것은 곧 인권의 논리를 옹호하는 가장 결정적인 투쟁이다. 그러므로 이정희 대표는 그 엄청난 참을 수 없는 비난을 들어가면서도 무릎을 꿇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 유시민의 논리에 굴복한다면, 앞으로도 우리 정치는 끊임없이 희생양을 만들 것이다. 오늘 당권파가 희생당하면 다음에는 유시민 자신이 그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 이정희가 싸우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이 위험한 나치의 논리이다.
지금 이정희 대표가 외롭게 오직 혼자만의 힘으로 이 정치의 논리, 나치의 논리, 유시민의 논리에 맞서고 있다. 나는 힘이 없다. 나는 그저 학자에 불과하다. 나는 아무도 읽지 않는 철학을 공부할 뿐이다. 그러나 나는 이정희 대표와 같이 지금 박해받는 편에 서고 싶다. 나에게 돌을 던지라. (2012년 5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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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소연한다
이병창
(이 글은 한철연 사이트에 올리지만 한철연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전혀 무관하다.이 글에 대해서는 오직 나 개인이 책임질 것이다.)
방안의 꽃병이 깨어졌다. 어머니는 아이를 야단친다. 너 꽃병을 깨뜨려놓고 미안하다는 말도 없니? 아이는 억울한 듯, 엄마 내가 안 그랬어. 이렇게 말한다. 엄마가 화를 낸다. 이 방에 너 혼자 놀고 있었잖아. 너 아니면 누가 깨겠니. 아이는 정말 억울하다. 그래서 문을 팍 닫고 나가버린다. 그러면 어머니는 아이를 쫓아가서 혼을 낸다. 이 년이, 어른 한테 머르장 머리 없이 문을 닫고 가.
위의 예는 우리가 자주 보는 엄마와 아이의 싸움이다. 현재의 상황과 너무 유사해 제시해 보았다. 마찬가지로 자기가 억울하다는 것을 호소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모두 너를 의심하니까 일단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 다음 나중에 잘못인지 아닌지 철저히 알아보자. 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옳을까? 아니면 아무리 그가 의심스럽고 시간이 다급하더라도 그럼 먼저 진상을 철저히 알아보고 그런 다음 처리하자.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일까?
법을 원리로 하는 사회라면 아마 후자가 당연한 길일 것이다. 만일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의 마음을 어떤 식으로 풀어주지 않는 한,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 것은 불문가지이다. 그는 극단적인 경우 자살을 택하거나 아니면 자신에게 사과를 강요하는 자에 대한 폭력에 호소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비슷한 사건을 접한 적이 있다. 바로 영화 「부러진 화살」을 통해 널리 알려진 사건이다. 억울함을 호소해도 들어주지 않을 때, 그는 결국 폭력에 호소하지 않았던가? 폭력에 호소하는 것은 물론 정당하지 못하다. 하지만 그에 앞서서 우리는 먼저 그가 그토록 호소하고 싶던 억울함을 들어주지 못했던 자신을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통합진보당 당권파에 속하는 사람이 처한 입장이 바로 위와 같지 않을까? 물론 그들이 중앙위 석상에서 폭력행위를 저질렀다면 그것은 범죄적인 행위이다. 그런데 우리 시민사회는 그들을 그렇게 몰고 간 원인에 대해 반성을 해 볼 생각은 없는 것 같다. 그들이 그토록 억울하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들은 거짓말쟁이고, 사악한 사람이니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들 당권파는 이번에 문제가 된 비례대표 경선에서 자신들의 억울함을 거듭거듭 호소해 왔다. 그런데 비당권파는 한결같이 사과하고 비례대표를 사퇴하기를 요구했다. 그리고 결국 이번 중앙위원회에서 당권파의 비례대표 사퇴를 당의 이름으로 강요하려 했다.
꼭 그렇게 했어야 했을까? 만일 사과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진상조사를 철저하게 한 다음 당 기율 위반으로 제명하면 되지 않을까? 왜 이렇게 악착같이 사과와 사퇴를 강요했을까? 그렇게 하면 억울한 사람이 극단적인 행위에 호소할 것을 몰랐던 것일까?
지금 진보 언론이나 진보적인 지식인은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당권파가 부정을 저질렀으며 당연히 사과 및 사퇴를 해야 하며, 더구나 이런 폭력까지 저질렀으니 이제 매장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나는 하소연하다. 왜 그렇게 서두르는가? 기다려 보자. 그들의 억울하다는 말을 들어보고 철저하게 진상조사를 해보자. 그런 다음 처리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선거부정에 대해 잘못이 있다면 거기에 맞게 응당하게 처리돼야 한다. 지금은 모두 도매금으로 처리되고 있다. 이미 우리 모두는 그들의 부정을 확인하기도 전에 확신한다. 이런 확신의 원천은 무엇인가? 우리의, 진보 언론과 진보 지식인의 선입견은 아닐까? 우리도 반성을 하자.
그런데 비당권파는 또 다시 중앙위원회를 열어 기어코 비례대표 사퇴를 관철하고자 한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 적어도 이런 것 정도는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비당권파가 원하듯이 현재 당권파를 제거했을 때, 통합진보당는 계속될 수 있을까?
나는 회의적이다. 그 이유는 비당권파 자신이 더 잘 알 것이다. 당권파의 힘이 필요하기에 합당했던 것이 아닐까? 그런데 당권파를 제거한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원래의 힘밖에 행사할 수 없을 것이다.
정치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장수의 목을 치는 것이다. 만일 그 장수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소문이 있으면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심적으로 공황상태에 빠진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함께 한 사이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장수의 목을 치려면 철저한 명분이 필요하다.
그런데 내가 보이게 비당권파는 당권파의 수장들을 목 칠 힘은 있다. 그러나 그 힘을 행사하기 위한 명분을 마련하는데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그 결과는 말하지 않더라도 잘 알 것이다. 이미 일어난 폭력이 그런 심적 공황상태를 잘 보여준다.
나는 하소연한다. 비당권파 사람들, 그리고 많은 진보 언론 및 지식인들에게. 물론 당권파의 폭력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 먼저 당권파의 억울함부터 들어보기 바란다. 먼저 진상조사를 철저하게 하라. 사과니 사퇴니 하는 것 그 뒤에 처리해도 늦지 않다. 나머지 급한 일이라면 서로 협조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2012년 5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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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대인이다
이병창
나는 유대인이다. 왜냐면, 나는 남북의 평화협력을 믿는다. 그러면 나는 이 남한 땅에서는 종북파이다. 나는 종북파로 찍히기 싫어서 어느 자리에서나 남북 관계의 문제가 나오기만 하면 다른 자리로 도망간다. 사람들은 비겁하다고 한다. 솔직하게 말하시라고. 그 사람들이야 국가보안법의 보호를 받으니 솔직히 말하겠지. 그러나 나는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감옥에 가야 한다. 그저 남북의 평화협력을 옹호했다고 하더라도. 감옥에 가야 한다.
그래도 때로 분노한다. 남북의 대결을 역설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때는 참을 수 없어서 분노하는데 그러면 돌아오는 것이 종북파라는 딱지이다. 그 때문에 다들 나를 싫어한다. 그러니 점차 침묵하고 또 침묵할 수밖에, 글을 쓰면 스스로 검열한다.
과거 안기부 때문에 검열하는 것 이상으로 종북파가 될까 봐 검열한다. 박정희 전두환 시절만큼이나 나는 나를 검열하는 한겨례 신문을 두려워한다. 나는 한겨레 신문이 두려워 한겨레 신문을 끊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이 땅의 유대인이다. 니들은 아느냐, 내가 두려워서 밤마다 떨고 있는 것을? 그렇게 떨고 있으므로 나는 유대인이다.
나는 유대인이다. 왜냐면, 나는 아직도 통합진보당에서 부정선거를 믿지 않는다.나는 수 십년 간 대학에 있어서 운동권이 어떻게 선거하는가 매년 보아왔다. 남들이 보면 저건 웃기는 부정선거이다. 그러나 잘 보면 그들처럼 정직하고 깨끗한 선거가 없다. 나는 청년학생들을 믿는다. 나는 그들 운동권을 믿는다.
그런데 과거 운동권 출신조차 그런 것은 부정선거라 한다. 민주노총, 한겨레, 경향신문 모두가 부정선거라 한다. 나는 안 믿는다. 그러나 그렇게 안 믿는다면, 한겨레 신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소름끼치는 인간이 되어 버린다. 나는 소름끼치는 인간이다. 그러니 유대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는 사람들에게 말하지만 진실을 보라고,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내용을 보라고. 작은 것이 아니라 큰 전체를 보라고. 억압된 자의 진리는 이렇게 마음 속에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한다. 진중권이 말한다.
형식적인 것이 세부적인 것이 진리라고. 표면적인 사실의 세계는 지배자의 세계이다. 지배자의 진리와 억압된 자의 진리가 다르다는 것을 진중권은 알까? 나는 억압된 자의 진리를 말하고 싶다. 그러니까 그것은 유대인의 진리이다.
나는 유대인이다. 그러니 다시는 한겨레 신문을 보지 않겠다. 한겨레야 민족 같은 것보다 정권을 획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나는 다시는 소위 진보주의자들을 만나지 않겠다. 그들은 국가보안법의 보호를 받고 나는 유대인이니까. 그래서 나는 오늘 한겨레 신문을 끊었다. 나는 한겨레 신문의 창간독자이다. 그러나 나는 소름끼치는 유대인이다. (2012년 5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