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동기 상임연구원
복지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정립하여도 그것을 현실사회에서 정책으로 구현할 때에는 해당사회의 특징을 인정하는 속에서 모색해야 한다. 복지는 정부 또는 시민사회 등 사회적 주도세력이 있어야 실현될 수 있는 일종의 정치활동이다. 한국사회에서 구현되는 복지정책도 마땅히 한국사회의 특징과 사회구조에서 수립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국민들이 해당 복지정책을 전폭적으로 지지할 수 있을 것이다.
1. 한국복지의 역사
지난 시절, 한국사회는 복지정책이 뿌리를 내리기에는 너무나 척박한 동토대였다. 50년대 한국인들은 전쟁과 집단학살을 겪었고, 7-80년대에는 군부독재를 겪었다. 한국사회는 김영삼 정권시절까지 경제성장에 사로잡혀 있었다. 친미반북 이념에 사로잡힌 한국사회에서 분배와 복지 주장은 “공산주의와 유사하다”며 매도당하기 일쑤였다. “성장이 곧 복지다”는 논리가 해방 이후 50여년간 한국사회를 휘감았다.
물론 87년 6월 항쟁 이후, 복지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와 지향이 폭발해 최저임금제도, 전 국민 의료보험제도, 국민연금제도 등 초보적 복지정책들이 시작된 바 있다. 몇몇 재벌대기업은 기업위주의 사원복지제도를 시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복지는 여전히, 절대적으로 열악하다. 2009년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사회복지 지출은 7.9%에 불과해 30여개 OECD 국가 중 29위를 기록했다. 정부는 “세계10위 무역국”이라고 선전하지만 복지에서는 “대표적 후진국가”로 지목되는 것이 한국사회의 수준이다.
87년 6월항쟁 이후 그나마 시작된 한국의 초보적 복지제도도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그 정책적 효과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자본시장 개방으로 외국자본의 국내유입이 전면화되고 사회양극화가 더욱 고착화되면서 복지정책의 체감효과가 사라진 것이다. 김대중 정부 이후 의료보험의 확대실시, 국민연금 지급, 기초생활수급자에 대한 생활보조 등 초보적 형태의 복지제도는 지금도 시행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정도의 복지정책으로는 한국사회에 무차별적으로 이뤄진 외국자본의 자본시장침투, 노동자 정리해고, 공기업 매각 등으로 인한 서민경제의 타격을 상쇄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김대중 정부 이후 시행된 사회복지제도에 대해 “IMF 구조조정으로 인한 민중들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였다”는 주장까지 대두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사회에서 복지제도가 도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불평등은 오히려 더욱 고착화된 2000년대의 역설은, 한국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그 어떤 복지정책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웅변한다.
2. 한국사회의 특수성
한국사회에는 보통의 자본주의와 다른 세 가지 문제점이 중첩되어 있다.
첫 번째 문제점은 바로 외세의 개입이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주한 미국대사가 작성한 외교전문에는 정보원(情報源)’을 뜻하는 ‘contact'이 등장한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미국 외교전문에 등장하는 ‘정보원’은 여러 가지 표현으로 등장한다. 단순 ‘정보원(a contact)’, ‘우리 정보원(our contact)’부터 ‘오랜 미 대사관 정보원(Long-time embassy contact)’, ‘믿을만한 정보원(reliable contact)’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한다. 게다가 특정 정부부처를 지목한 ‘청와대 정보원(Blue house contact)’, ‘국회 정보원(National Assembly contact)’, ‘외교통상부 정보원(MOFAT contact)’, ‘통일부 정보원(MOU contact)’이라는 표현도 보인다. 이들 단어만 보아도 한국정부 주요 부처마다 미국 정보원이 존재해 왔고 지금 이 시간에도 그들이 미국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미 FTA의 체결 사례,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사례, 론스타의 외환은행 매각 사례 등으로 볼 때 한국경제는 미국의 입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1997년 IMF 구조조정 이후 한국경제가 해외독점자본에게 무분별하게 개방되어 있어 국부의 해외유출이 매우 심각하다. 미국을 비롯한 외국독점자본이 “세계화”란 이름을 앞세워 한국경제를 좌우하고 있으니 한국경제가 이 상태로는 복지정책을 구현할 경제체력이 부족하다.
결국 한국에서는 사회양극화, 비정규직 문제 등 생존권 문제가 더욱 첨예하게 대두되고 있다. 한국의 1500만 노동자들은 불과 200만명 가량만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로 근무할 뿐 대다수 노동자들은 중소기업에 비정규직, 임시직 형태로 근무하며 세계적으로 높은 노동시간과 노동강도에 내몰려 있다. 노동자들이 무더기로 정리해고 당하는 한국사회에서 생존권을 위한 노동운동이 불붙는 것은 필연적 귀결이다.
한국사회가 보통의 자본주의 사회와 다른 두 번째 문제는 민중들의 사회적 활동이 당국에 의해 일방적으로 탄압받는다는 것이다. 노동자의 권리와 처지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통로가 매우 협소하다. 한국에서는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노동운동에도 전투경찰이 난입하며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진압작전이 펼쳐진다. 2009년 쌍용자동차 투쟁은 회사측의 일방적인 노동자 해고를 철회해달라는 생존권 차원의 투쟁이었지만 당국은 군사작전을 방불케하는 강경진압에 나서 쌍용자동차 노동조합을 거의 와해시키는 것으로 화답하였다. 2011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반대투쟁도 김진숙 지도위원이 300여일 동안이나 목숨을 건 고공농성투쟁에 나서서야 사회적 현안으로 대두하였다. 대통령은 민간인이지만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만큼은 80년대 군부독재와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다.
일체의 노동운동, 노동자의 정치개입도 가로막혀 있는 상황에서는 노동과 회사측, 정부가 모여 노동문제를 협의한다는 노사정 위원회가 열려봐야 노동진영은 정부와 회사측 논리에 수적으로 밀릴 뿐이다.
한국사회의 세 번째 문제점은 한국의 냉전적 분단체제이다. 군사적 대북대결태세가 한미동맹에 의해 강조되며 분단비용이 끊임없이 지출되는 구조라는 점이다. 분단비용의 막대한 지출을 그대로 두고서 한국의 복지정책이 안정적으로 구축될 리 없다.
한반도를 규정하는 국제협정은 1953년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 체결된 정전협정이다. 한반도는 현재 엄밀한 의미에서 계속 전쟁상태에 있다. 1999년의 서해교전의 충격은 뒤로 하더라도 2010년의 연평도 포격전과 이후 이어지는 한반도 긴장국면은 한반도가 언제든 군사적 충돌의 위험에 놓여 있으며 전면전의 위험도 상존하고 있다는 점을 뚜렷이 보여준다. 미국은 한국사회 곳곳에 주한미군 기지를 건설해놓고 한반도와 동북아의 군사적 긴장을 지속적으로 높여 북한과 중국을 견제하고 한국과 일본, 대만을 상대로는 군사무기를 판매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리고 있다. 한국정부는 주한미군의 영구주둔과 이들의 치외법권적 지위를 보장해주며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과 위험을 보수세력의 정권 재창출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는 형편이다.
남북은 이러한 분단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2007년 10.4 선언 등의 자리에서 최고당국자의 정책합의에 의한 통일 이행 입장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매년 막대한 비용이 지출되는 분단문제를 해결할 대신 6.15/10.4 선언을 전면 부정하며 남북간 긴장을 앞장서서 고조시키고 있다. 결과적으로 현재 한반도에서 군사적 충돌 위험은 매우 높아져 있다.
한국의 국방예산은 전체 국가예산의 10%를 차지하며 GDP의 3%를 차지해 일반적 국가들의 GDP 1% 수준을 3배 가까이 상회한다. 한국의 국방비가 이처럼 높은 것 가운데 하나는 한국은 60만 대군을 유지하는 징병제를 채택하고 있어 이들 군인을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경직성 경비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만일 한국이 일반적 국가들과 유사한 수준으로 국방비를 GDP 1% 수준으로까지 떨어뜨린다면 현재의 예산규모로 볼 때 연간 20조원 가까운 복지비용을 확보할 수 있다.
3. 민중주도의 한국형 복지
한국에서 복지정책이 온전히 구현되려면 외세의 개입을 막아야 한다.
미국과 맺은 비정상적인 불평등조약부터 뜯어고칠 필요가 있다. 한미 FTA 협정을 그대로 둔 채 보육료와 의료비를 지원한다고 해서 각 가정에 웃음이 꽃펴날 리 없다. 또한 한국사회는 외세의 개입과 외국자본에 대한 아무런 규제장치가 없다. 한국의 주식시장은 30% 가까이가 외국자본에 잠식되어 있으며 외국독점자본의 투기행위가 국가적 위험요소가 되기 충분하다. 외국자본의 투기행위를 감시하지 않고서 가정에 행복이 꽃필 수 없는 것이다.
둘째로는 국민들의 정치활동이 보장되어야 한다. 한국사회에서는 우선적으로 민주주의가 정립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民主主義)는 국민이 주인되는 정치이념이자 민중이 주인되는 정치이념이다. 민주주의는 사회 구성원들이 누구나 아무런 차별없이 활동할 수 있는 정치적 자유와 평등을 의미한다. 정치적 자유와 평등이 구현되지 않는데 급식비를 지원하고 의료비를 지원한다고 해서 사회구성원들의 생활만족도가 나아질 가능성은 없다.
뿐만 아니라 한반도를 무겁게 짓누르는 전쟁의 위험을 해소해야 한다. 한반도에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아들을 군대에 보낸 가정에서는 휴전선의 사소한 뉴스에도 마음을 졸일 수밖에 없다. 막대한 세금이 총포탄으로 지출되고 있는데 복지재원이 마련될 리 없다.
한국사회에서는 민중의 권리와 요구가 가로막혀 있으므로 국민의 복리를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복지정책 제시와 더불어 사회구조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병행되어야한다.
노사정위원회는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 외국자본과 재벌대기업의 전횡이 심각한 상황에서 노동자의 처우문제를 자본과 노동의 공동책임으로 구현한다는 것은 한계가 명확하다. 한국사회에서 복지는 자본진영에게 청원해서 얻는 방식이 아니라 국민들의 끊임없는 사회적 참여와 활동을 통해 획득해가는 방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 복지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재정마련 대책을 세워야 한다. 먼저 국가의 재정혁신을 통한 조세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해 온 부자감세 정책이 철회되어야 한다. 전체 소득에서 세금이 차지하는 비율인 담세율이 OECD 평균 30% 수준인데 반해 한국은 20%에 불과하다. 종합부동산세와 같은 최소한의 부자세금은 기본적으로 복원하고 사회공공성에 맞게 강화할 측면은 더욱 강화해나갈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30조원에 달하는 비정상적인 국방비용도 남북관계를 적극적으로 개선해 나가는 노력에 발맞춰 정상적 수준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일자리의 창출은 고용을 늘리게 되며 이는 다시 다양한 세금수입으로 국가재정을 키울 수 있게 한다.
한국사회에서 구현된 복지정책의 참모습은 미국을 비롯한 외세의 정책개입을 막고 민중의 권리와 이익이 국가로부터 보호받으며 민중이 사회적 현안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때 비로소 꽃핀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우리사회연구소 http://urisociety.kr/sub.php?board=C1&id=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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