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 이후 정전상태에 들어간 한반도는 지금껏 상시적인 군사 대치 국면에 놓여 있다. 현재 한반도에 몰려오는 전쟁 위기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양상, 다시 말해 실제 전쟁 직전의 양상을 띠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최근 북한 최고 지도부 모독 사건을 고의적으로 일으킨데 이어, 2월 말부터 진행되는 키리졸브 훈련과 독수리 훈련, 3월 중에는 주일미군까지 참가한 23년 만의 최대 규모 한미연합 상륙훈련인 쌍룡훈련을 진행할 예정이다. 북한은 이에 대응하여 3월 2일 최고사령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성전을 무차별적으로 벌리게 될 것”이라고 선포한 상황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전쟁위기 양상은 주변 강대국들에 의해 발생되거나 혹은 관리되어온 일련의 과정이었다.
공교롭게도 관리의 주체가 강력히 있었던 시기에는 밀고 당기기의 긴장상태가 일정하게 관리될 수 있었다. 반면에 그러한 긴장관계의 주체가 약했던 시기에는 무정부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전쟁이라는 초강경의 무리수가 전개되기도 했다.
이러한 양상을 볼 때 한반도의 전쟁위기 국면은 크게 4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그 1시기는 자주독립세력이 강하게 결집한 가운데 미국이 자기 주도의 관리체제 토대를 마련해야 했던 이승만 정부의 집권 기반이 약한 해방 직후부터 한국 전쟁시기까지, 2시기는 전쟁을 거치며 강력한 반북 친미체제를 확립한 한국 전쟁 이후 미소양극이라는 냉전관리 체제 시기까지, 3시기는 미국중심 일극체제가 성립되어 세계 도처와 한반도에서 전쟁위기가 한층 심화되는 2000년대까지, 그리고 2010년대 들어서 미국 주도의 관리체제가 급격히 붕괴되고 북미관계가 전면적으로 개선될 가능성이 확대되는 시기와 이명박 정부의 집권기반이 붕괴기에 들어선 시기가 마지막 4시기다.
객관적인 양상을 보면 2시기와 3시기는 한반도 분단 체제와 전쟁위기가 미국 주도로 긴장이 조성되며 관리되는 시기로 볼 수 있으며, 1시기와 4시기는 관리의 균형이 깨지면서 전쟁이 실제로 일어나게 되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냉전 체제 시기 한반도 전쟁위기 국면의 사례
먼저 냉전 체제 하에서 벌어진 한반도 전쟁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례는 1968년 미국 첩보함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국면이다.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은 1968년 1월 23일 오후, 미 해군 최신예 전자첩보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의 영해인 원산 앞바다에서 첩보활동을 벌이던 중 북한군에 의해 나포된 사건이다. 북한은 P-4 초계정 네 척과 미그기 두 대를 동원하여 미국 첩보함을 나포하였고, 이 과정에서 미국 병사 1명이 사망하고 나머지는 전원 체포·억류되었다. 세계에서 제일 강한 미국 해군함정이 나포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시 미국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를 열고 이 사건이 미국에 대한 명백한 전쟁행위라고 규정하고, 평양에 대한 핵위협, 핵공격으로 대처한다는 데에 의견일치를 보았다. 이에 미국은 핵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원산 앞바다에 출동시킨데 이어 항공모함 2척을 추가 배치하고, 일본 오키나와에 있던 공군전투기 361대를 한반도 주변으로 전진 배치했다.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로 치달았다.
그러나 미국의 전쟁 의지는 이내 수그러들었다. 북한과의 전쟁은 곧 북한에 억류된 승무원 82명의 생명을 포기함을 의미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미국의 전쟁 개시 의지를 뒤흔들었던 것은 당시 세계 냉전구도였다. 베트남전이 한창인 상황에서 또다시 동북아지역에서 전쟁을 개시한다는 것은 사실상 사회주의권과의 전면전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결국 미국은 1968년 2월 1일부터 북한과 비밀협상에 들어갔다. 미국은 10개월에 걸친 협상 끝에 푸에블로호가 북한의 영해를 침범한 사실을 시인하고 북한에 공식 사과했다. 북한은 82명의 생존 승무원과 시체 1구를 판문점을 통해 미국으로 돌려보냈고, 이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핵보유국인 미국과 소련을 양대 축으로 하는 세계 냉전구도 하에서 전면전을 개시하는 것은 서로에게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1968년 당시 박정희 정부의 대응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김신조’ 청와대 기습사건으로 국가 원수가 죽을 뻔했던 상황에 대해서는 미국이 거의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다가 미정보함을 나포한 사건에 대해서는 즉각 대응을 준비하는 게 불만스러웠던 모양이다. 게다가 미국은 한국을 빼고 북한과 1대1 비밀 협상을 벌이고자 했으니, 박정희 정부는 분통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공을 국시로 하는 박정희 정부가 미국에게 당장 북한을 상대로 전쟁을 하자고 끊임없이 부추길 필요는 없었다. 푸에블로호 사건 해결을 위한 회담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한국을 버리고 북한과 전면적 외교관계 정상화에 나서는 등의 전환적 조치를 취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한국은 미국의 중요한 우방이었고 북한은 미국의 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미소 양극의 냉전체제는 강력했던 사회주의 진영과 미국과 서방의 전면적 대결 양상이었기 때문에 미국 역시 소련연방의 진영을 염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중심 일극 체제 이후의 전쟁위기 국면의 과정
90년대 들어와 벌어진 3시기 북한과 미국의 대결 국면 양상은 상당한 변화를 보인다. 무엇보다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구 사회주의가 붕괴하여 냉전이 해체된 것이다. 소련의 붕괴 후 사회주의 공동시장을 통해 경제를 운영하던 북한을 비롯한 쿠바 등 사회주의 국가들은 심각한 연료난, 경제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북한은 연이은 자연재해까지 겹치면서 ‘고난의 행군’을 벌여야 했다.
소련이 없는 세계에서 미국은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한 전면적인 봉쇄정책을 펼쳤다. 북한도 예외가 아니었다. 미국의 북한 봉쇄 정책은 자연히 한반도를 전쟁 위기로 몰아갔다. 당시 북한은 에너지난을 해소하기 위해 영변에 시험용 원자로를 건설하여 “평화적 핵에너지 이용 권리”를 주장하였다. 반면 미국은 북한의 원자력 시설 개발에 대해 “핵무기 개발”의혹을 제기하며 전쟁 위협을 가하기 시작했다. 1994년 2월 미국은 주한미군과 국군의 전시 작전계획인 ‘OPLAN 5027'(작계 5027)을 발표하였다. 5단계로 이루어진 이 계획의 후반부는 주요 전력 격멸, 대규모 상륙작전, 평양 고립화, 점령지역의 군사통치 등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는 북한을 매우 자극하였다.
북한은 미국의 공세에 대한 대응으로 NPT 탈퇴를 결의한 데 이어 준전시상태를 선포하고 전면 전쟁에 대비하였다. 당시 빌 클린턴 미국 정부는 작계 5027에 따라 영변 핵시설에 대한 정밀공격을 검토했지만 시뮬레이션(모의실험) 결과 90일 내에 전면전으로 확대돼 미군 5만2천명과 한국군 49만 명이 사상하는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에 따라 공격을 취소한 바 있다.
1994년의 전쟁위기는 미국의 카터 전 대통령이 북한의 김일성 주석을 전격 면담하고, 북한이 영변 핵시설을 동결하면 미국이 경수로를 대신 지어주기로 합의함으로써 협상국면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미국은 북한이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런 공백과 경제난으로 인해 늦어도 3년 안에 붕괴할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협상에 임했다. 미국은 북한과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에 이은 경수로 공급 협정을 체결했지만 이행 속도를 늦추며 북한이 붕괴되기만을 기다렸다. 이른바 봉쇄를 통한 고립압살 관리체제로 들어간 것이다.
미국의 경수로 제공 합의로 일단락되는 듯 했던 90년대 한반도 전쟁 위기는 2000년까지 계속되었다. 미국은 북한이 기대대로 붕괴되지 않자 또다시 전면전을 결심하고 핵무기 30개를 투하하는 실전 핵훈련을 실시하였다. 1998년 12월9일자 '제4전투항공단사(史)'에 따르면, 미 제4전투항공단은 같은 해 1월부터 6월까지 미국 본토에서 북한까지 항공기로 핵무기를 운반해 공격하는 상황을 가정해 F15-E 전투폭격기 24대를 동원, 핵무기 사용을 가정한 모의탄두 탑재, 투하 훈련과 검열을 했다고 한다. 북한은 미국의 공세에 ‘광명성 1호’를 쏘아 올리며 대응하였다.
북한은 이어진 협상국면에서 미국이 영변 이외에 또다른 핵시설로 지목했던 금창리 동굴 의혹을 미국 시찰단을 직접 초청하여 해소함으로써 ‘조미공동코뮤니케’를 발표하는 등 북미간 대결 구도가 관계정상화로 전환되는 상황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북미 관계 정상화 일정은 2001년 호전적인 부시 정부의 등장과 함께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냉전이 해소된 상황에서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전쟁정책은 더욱 거센 전면전의 위기로 발전했다. 미소 양극의 냉전체제는 한반도로 옮겨가 북미냉전체제로 진입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2000년 남과 북 사이에서는 통일의 초석을 마련한 6.15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며 북미 사이의 긴장관계는 점차 균형을 이루기 시작했고 이러한 관계는 북한과 미국이 동등한 원탁에 마주 앉아 협상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즉, 한반도는 북미 양자에 의해 관리되는 양상으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위기 증폭을 선택하는 이명박 정부, 21세기판 ‘이승만 북진정책’
북한과의 전면적 관계 정상화를 원치 않았던 미국의 부시 정부는 2000년대에도 꾸준히 한반도에서 전쟁 위기를 조성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연이은 핵 실험과 핵보유국 선언, 그리고 2009년 ‘광명성 2호’ 발사 등 군사적 조치를 취하며 강력 대응하였다. 군사 대결과정을 거치며 2012년 현재 조성된 북한과 미국의 대화 국면은 사실상 완전한 관계정상화, 즉 한반도 전쟁상태를 해소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방향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다.
2012년에 들어서면서 한반도의 상황이 크게 바뀌게 된 것이다. 미국이 북한과 전면적인 관계 개선에 나서며 위기 관리체제가 평화 관리체제로 넘어가게 과정에 들어섰다. 달리 말해 이는 위기관리의 구조가 사라지는 것으로써 미국 주도의 관리체제가 붕괴 된다는 것을 의미하여 이는 한국의 보수세력의 탄생과 존립의 기반이 사라지게 됨을 의미한다. 한반도 분단 체제가 미국의 힘으로 관리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친미반북을 자기 존립 근거로 삼고 있는 이명박 정부를 비롯한 보수세력의 설 자리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명박 정부가 반북대결 행보를 극한대로 강화하려는 이유다.
이명박 정부가 보여주는 반북대결행태는 가히 한국 전쟁전야를 떠올리게 한다.
먼저 남북의 군사적 대치 상황이 그러하다. 2012년 2월 말부터 4월까지 계속되는 한미군사합동훈련과 이에 대한 한국 정부 인사들의 발언이 위험 수위를 오르내리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최고 지도부 모독 사건’을 유발하기까지 하였다. 여기에 김관진 국방장관이 지난 7일 연평도를 방문해 “군인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적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심이다. 반드시 복수해야 한다”면서 “북한의 도발시 원점과 지원부대까지 완전히 굴복할 때까지 강력히 응징할 것”을 지시했으니 사실상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전쟁위기상태인 것이다.
2010년 연평도 포격전이 일어난 과정도 과거의 서해교전 같이 단순한 우발적 사건이라고 볼 수 없다. 연평도 포격 사건은 서해상에서 벌이는 이명박 정부의 지속적인 군사훈련에 대한 북한의 무력 대응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북진 통일 정책을 내건 이승만 정부가 1949년 38도선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벌인 교전과 성격이 같다고 볼 수 있다.
현재 남북 군사적 대치상황 뿐만 아니라,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적대정책 역시 매우 위험한 수준이다. 이미 미국이 북한과 협상국면으로 들어갔음에도 이명박 정부는 여전히 대북적대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출범 직후부터 615선언, 10.4선언을 이행하지 않고 북한에 대해 대결적 자세를 취해온 이명박 정부는 북미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지금도 대북 삐라 살포를 막지 않고 있으며 대북 심리 방송을 재개하는 등의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북한과의 대결을 국제무대로까지 확대하고 있다. 새누리당 안형환 의원과 이은재 의원은 유엔 인권총회장에 초대도 받지 않은 채 방문하여 서세평 북한 대사와 신체적 접촉을 일으키는 상황도 의도하였다.
미국과 북한이 본격적인 협상국면으로 들어갔음에도 한국 정부가 미국과는 달리 대북 적대정책을 고수한 사례는 이승만 정부 시절밖에 없다. 이승만 정부는 한국 전쟁 당시 미국이 북한과의 휴전 협상에 돌입하자 이를 막기 위하여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소위 ‘반공 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하여 미국의 협상을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1950년 전쟁 직전과 유사한 한반도 정치지형
2012년 한반도 전쟁위기의 심각성은 단순히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적대정책이 보여주는 호전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글의 서두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현재의 흐름은 한반도 위기 구조가 근본적으로 변경되는 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존립 기반인 친미반북 논리가 뿌리부터 흔들리는 가운데, 총선을 앞두고 진보개혁세력이 이들의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미 정권 심판의 구호 아래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이 전국적 범위에서 야권연대를 성사하고 총선에 나서고 있다. 국민들 역시 이명박 정부의 대안으로 야권연대세력을 선호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국면은 과거 해방 직후 이승만 세력에 비해 김구와 여운형 등 자주독립세력이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던 상황과 유사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과거 이승만 정부는 국민들의 지향과는 달리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통해 수립된 이후 국가 운영을 전적으로 미국에 의지해야할 정도로 취약했다. 특히 친미반공적 지지기반이 약했던 이승만으로서는 당시의 위기를 북진 정책을 통해 해소하려는 강한 유혹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는 총체적 위기에 직면한 이명박 정부의 상황과 흡사하다.
이처럼 해방 직후인 1시기와 현재의 4시기는 전쟁위기 국면을 관리하는 주체의 환경과 여건에서 매우 유사한 점을 갖고 있다.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한반도
북미 관계 정상화가 진행되는 조건에서, 친미반북을 자기 존립 근거로 삼고 있던 이명박 정부의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은 반북대결을 심화하는 방향으로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자신의 행동이 실제 전면전을 불러오고 있는 것을 알고 있을까.
북한의 최근 대응 양상을 볼 때 이러한 이명박 정부의 행보가 실제 전면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3월 26일 ‘응징의 날’을 예고한 이명박 정부의 행보가 2012년 총선을 앞둔 한반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고 있다.
* 출처 : http://newssh.net/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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