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브리핑] 북미 교착 해결의 돌파구로 유용
기사입력 2011-11-10
지난 달 제네바에서 2차 북미 협상이 진행되었다. 7월 뉴욕 회담에 이어 6자회담 재개를 위한 진지한 논의의 자리였다. 뉴욕 회담 이후에는 재미교포 이산가족 상봉 문제와 미군 유해송환 문제 등 인도적 차원의 양자 현안이 협상되면서 신뢰 형성의 기초를 닦았다. 더불어 미국의 대북 식량지원 문제도 논의되면서 이번 제네바 협상에서는 진전된 의견 교환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제네바라는 곳은 북미 협상에 긍정적인 기억을 가지고 있다. 1993년 1차 북핵 위기 당시 북미 고위급 회담이 제네바에서 개최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1994년 10월 북미 기본합의서도 제네바에서 도출되었다. 제네바 합의를 통해 1차 북핵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북한과 미국에 협상과 합의 도출의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제네바에서 이번 북미 회담이 진행된 것은 그래서 우리에게도 긍정적 기대를 갖게 한다.
제네바 북미 회담에서 논의된 구체적 내용을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다. 일반적인 평가와 분석을 보면, 6자회담 재개의 조건으로 미국이 요구하고 있는 비핵화 사전조치에 대한 북한의 수용 여부와 입장 표명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물론 비핵화 사전조치 즉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 복귀와 핵실험 및 미사일 발사 유예 선언, 그리고 우라늄농축 프로그램(UEP) 중단 요구를 둘러싸고 북미간에 심도 있는 의견 교환이 있었을 것이다. 특히 핵심 관건인 UEP 중단 문제를 놓고 힘겨루기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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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문점의 북한군 병사 ⓒ뉴시스 |
북한의 '진전' 평가에 숨은 뜻은?
그러나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제네바 회담에서는 미국의 대북 요구 사항만 일방적으로 협의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여기서는 북한의 대미 요구 사항도 진지하게 논의되었다. 이번 회담에 대해 북한이 외무성 대변인을 통해 "일련의 전진이 이룩"되었다고 밝힌 것은 비단 미국이 요구하는 비핵화 사전조치에 대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북한이 미국에 요구한 것들에 대해 미국 측의 일정한
의사 표명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고, 그것은 평화체제 논의에 대한 미국 측의 수용 여부였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제네바 회담은 비핵화 사전 조치와 평화체제 문제가 양자간 심도 있게 논의되었고 상호 요구 사항이 긍정적으로 전달되었기 때문에 우호적 분위기와 생산적 논의가 가능했고, 북한도 공식적으로 '진전'이 있었다고 언급한 것으로 봐야 한다.
이미 북한은 2009년 오바마 행정부 들어 가진 미국과의 첫 고위급 회담에서 향후 재개되는 6자회담에서는 분명코 비핵화와 평화체제 논의가
동시에 진행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그해 12월 미국의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평양을 방문해서 북한으로부터 들은 요구 사항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북한은 2010년 1월 외무성 성명을 통해 향후 비핵화 문제는 반드시 평화협정 문제와 같이 논의되어야 함을 공개적으로 확인했다.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서는 북미 적대관계의 해소가 필요하고, 이는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입장에서 비핵화 논의와 함께 평화협정 회담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평화협정을 논의하기 위한 틀은 6자회담이든 별도의 틀이든 크게 상관없다는 유연한 입장까지 제시했다.
북한이 평화체제 논의를 강력히 주장하는 것은 지난 6자회담의 진행 과정에 대한 복기와 미국과의 핵협상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부시 행정부와 힘겨운
줄다리기를 해야 했던 김정일 위원장은 9.19 공동성명과 이후 2.13 합의, 10.3 합의를 통해 비핵화의
프로세스를 행동 대 행동 원칙에 따라 진행해왔지만 정작 평화체제에 관해서는 협상을 시작도 못했다. 핵시설
동결과 불능화, 핵 신고서
제출과 검증의정서에 이르기까지 비핵화 과정은 진행되었지만 평화체제 협상은 논외였던 것이다. 자신의 핵무기를 포기해야 하는 비핵화과정만 논의하고 진전시켰지 정작 북미관계 정상화와 적대관계 해소를 위한 평화체제 논의는 배제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 김정일 위원장은 오바마 행정부와 다시 핵협상을 시작한다면 비핵화와 평화체제가 동시에 논의되어야 한다고 굳게 마음먹었고, 2009년 장거리 로켓 발사와
추가 핵실험 이후 북미 양자협상이 시작되었을 때 시종일관 평화체제 논의의 필요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사실 북한이 비핵화 협상을 진행하면서 평화체제 논의를 강조한 것이 이번만은 아니었다. 이미 북한은 2차 북핵 위기 진행 과정에서 한반도 비핵화의 핵심 노정으로서 평화체제 확립을 주장했다. 2005년 7.22 외무성 성명을 통해 '평화체제 수립은
조선반도의 비핵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노정'이라고 주장했다. 정전체제가 평화체제로 전환되면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과 핵위협이 없어지고, 그것은
자연히 비핵화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같은 입장은 그해 4차
2단계 6자회담에서 타결된 9.19 공동성명에 북한의 핵 프로그램
폐기와 북미관계 정상화 말고도 별도의 포럼에서 한반도 평화정착을 논의하도록 규정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실제로 당시 부시 행정부에서도 북한과 비핵화 협상을 진행하기 위해 평화체제 논의가 불가불 필요하다는 입장이 개진되기도 했다. 2005년 콘돌리자 라이스 당시 국무장관의 자문관이었던 필립 젤리코의
보고서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평화체제 논의는 북한과 미국
각자의
준비로만 존재했을 뿐 북미간에 전혀 진지하게 다뤄지지 않았고, 급기야 2008년 12월을 마지막으로 6자회담은 열리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오바마 행정부 출범 이후 북미 협상이 시작되면서 북은 시종일관 평화체제 논의를 주장하고 나섰다. 최근 논의되는 6자회담 재개를 위한 북미 협상에서도 당연히 북한은 평화체제 논의를 회담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때문에 이번 제네바 회담에서도 6자회담 재개를 위해 비핵화 사전 조치와 평화체제 논의가 동시에 거론되었을 것이고, 이에 관한 긍정적 의견 교환이 있었기 때문에 북이 전진이 있었다고 평가한 것이다.
북한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제네바 회담에서는 아마도 비핵화 조치의 관건으로 간주되는 UEP 중단과 북한의 일관된 주장인 평화체제 논의가 상호 접점을 찾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 북한은 제네바 북미 협상을 앞두고 지속적으로 평화체제 논의를 주장해왔고 이 부분에 나름의 긍정적 성과가 있다고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10월 4일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는 '조선이 밝힌 6자회담
성공의 관건'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조미가 총부리를 맞대고 있는 조건에서 전쟁과 평화라는 근원적인 문제를 떠난 6자 합의는 불신의 장벽에 부딪친다'면서 비핵화의 선차적
과제로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했다.
제네바 회담 이후 <조선신보> 역시 27일자에서 '제네바 조미회담, 비핵화 노정도에 대한 집중 논의'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조선은 6자회담이 재개되면 교전상태로 인해 발생한 복잡한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일괄타결안을 내놓겠다고 말하고 있다'며 '비핵화를 향한 첫걸음에 대한 조미간의 논의는 조선반도의 평화보장을 위한 큰 걸음을 상정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동시에 <조선신보>는 '조미 쌍방이 과거 6자회담에서 논의되던 것과 다른 문제 해결의 새로운
궤도를 설정하였다'고 밝혀 비핵화를 위한 6자회담의 전개 과정이 과거와는 다른 방식, 즉 평화체제 병행 논의임을 암시하기도 했다.
종전선언의 기원과 의미
이번 제네바 회담에서 북미간 접점이 논의되었고 향후 6자회담 재개를 위한
발판이 마련되었다면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북한의 핵심 요구 사항인 평화체제 논의에 대해서는 미국도 명확한 로드맵을 갖지 못하고 있다. 9.19 공동성명에 언급된 초보적 원칙적 수준이거나 막연한 내용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제네바 회담 이후 북미 협상을 전망하고 준비하면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평화체제에 대한 논의가 진행될 것에 대비해 종전선언이라는 과거의
아이디어를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종전선언은 노무현 정부 당시 평화협정 체결로 단번에 갈 수 없는 상황을 고려하고 북미간에 전쟁 상태를 종료할 수 있는 진전을 이끌어내기 위해 고안해 낸
중간 단계의 개념이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북핵 문제 진전을 위해 평화체제 논의가 필요하다는 인식하에
2006년 하노이
한미 정상회담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으로 하여금 '
한국전쟁을 종료하는 협정에 서명할 수 있다'는 말을 이끌어 냄으로써 이른바 '종전선언'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이 한꺼번에 쉽게 되지 못하는 만큼 '종전선언'을 통해 북미간 평화체제 논의가 시작될 수 있는 발판을 만들고자 한 것이었다.
핵문제가 진전된 조건에서 한국전쟁의 직접 당사자들이 만나 공식 조약의 체결 이전에라도 전쟁이 종료되었음을 선언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북미간 신뢰형성과 한반도 평화는 상당히 진전될 수 있다는 것이다. 평화체제 진전을 위한 중간 단계로서의 종전선언 아이디어는 급기야 2007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공식 합의문에 포함되기도 했다.
이제 다시 6자회담 재개 이후 평화체제와 평화협정이 본격적으로 논의되어야 하는
마당에 종전선언은 매우 유용한 접근방법이 될 수 있다. 이미 북한은 2007년 남북 정상선언에서 종전선언에 합의했고 실제로도 당시 외무성 성명으로 종전선언의 의미를 인정하기도 했다. 미국 역시 비핵화를 위해 평화체제 진전이 필요하다고 인식한다면 당장 체결하기 어려운 평화협정을 우회하는 방식으로서 종전선언을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명박 정부다. 남북관계를 중단한 채 6자회담 재개마저 떨떠름한 상황에서 만약 북미간에 평화협정 논의를 한다면 아마 기를 쓰고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정세는 6자회담 재개와 재개 이후 비핵화와 평화체제 논의를 병행하게 되어 있다. 북한은 한국을 비껴 미국과 협상하고 미국 역시 이명박 정부의 완고한 대북
강경정책이 부담이기 때문에 한국을 피해서 북한과 협상할지 모른다. 오히려 향후 진행될 평화체제 논의에 소외되지 않기 위해 이명박 정부는 이미 한국이 제시한 바 있는 종전선언 아이디어를 되살려 이를 통해 북미협상을 추동하고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의 주도권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명박 정부가 그리 할지는 의심스럽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