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해서 성과를 남겨야 세상이 바뀌고 밥을 먹을 수 있다. 진보운동이 실력을 키우고 실리에 민감해 실적을 내야 불로소득이 사라지고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노동의 과학적 의미와 사회적 의미
동북아의 문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에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시위 도중 한 청년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고 외치며 자신의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붙였다. 이 사건을 통해 한국 노동운동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으며 지금도 노동운동 단체들은 11월 13일을 전후로 노동자대회를 개최하며 이를 기리고 있다. 당시 분신으로 노동자들의 권리를 지키려 했던 청년이 바로 전태일 열사다.
▲전태일 열사의 영정을 안고 오열하는 이소선 어머니
전태일 열사는 1948년 8월 26일 대구에서 태어나 60년대 평화시장 봉재공장 재봉사로 일하며 노동자들이 처한 열악한 환경을 겪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바보회, 삼동회를 만들어 다양한 활동들을 하였다.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이뤄 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겼고, 이소선 여사는 아들의 유언을 따라 평생 노동자를 위한 삶을 살다 지난 9월 3일 소천하였다.
올해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은 “1%에 맞서는 99%, 우리가 대안이다! 전태일 정신 계승 2011 전국노동자대회”를 특별히 2차에 걸쳐 진행하기로 하였다. 1차는 13일 서울에서, 2차는 26일 부산에서 개최한다. 부산에서 2차 노동자대회를 하는 이유는 물론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크레인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한진중공업 때문이다. 다행히 한진중공업 사태는 어제 일단락되었다.
▲309일 농성을 끝내고 내려오는 김진숙 지도위원
오늘은 2011 노동자대회를 맞아 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노동이란 용어는 물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상당히 적확한 단어다. 노동(勞動)을 한자 뜻풀이로 해석해보면 힘써(勞:힘쓸 노) 움직인다(動:움직일 동)는 뜻이 된다. 물리학에서는 일(work)을 ‘물체에 힘을 주어 힘의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물리학에서 일의 양(W)을 구할 때는 물체에 준 힘(F)에 움직인 거리(s)를 곱하여 구한다. 즉 W=Fs다. 따라서 노동은 물리학에서 말하는 ‘일’을 가장 정확히 표현한 단어라고 할 수 있다.
▲W=Fs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이 ‘일’이라고 표현하는 것 중에서 물리학에서 ‘일’로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불로소득, 착취의 역사
첫째는 힘을 가하지 않았는데 움직이는 경우다. 이 경우는 힘이 0이므로 아무리 많이 움직였다고 해도 이 경우는 일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 예를 들어 달리는 자동차에 손을 댄 채 함께 달린다면 내가 밀어서 자동차가 움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자동차에 일을 하지 않은 것으로 된다.
일상생활에서는 평가가 다르다.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도 일을 한 것과 마찬가지의 대가를 받는 경우가 있다. 이른바 불로소득이다. 인류가 원시공동체사회에서 벗어나면서 불로소득으로 살아가는 집단도 출현했다. 보통 이 집단을 착취계급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불로소득으로 살아가려면 필연코 누군가를 착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류 최초의 국가 형태는 노예제국가다. 노예제국가의 지배세력은 노예를 거느리고 강제노동을 시켜 생산한 생산품으로 부유한 생활을 누렸다. 그러나 노예들의 끊임없는 반항과 폭동으로 생산력이 발전할 수 없었고 이로 인하여 노예제국가는 붕괴하고 봉건국가가 등장하였다. 봉건국가 역시 지주가 농노를 착취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농노는 지주에게 자신이 땀흘려 지은 농작물의 상당량을 소작료로 갖다 바쳐야 했다. 하지만 노예에 비해 처우가 개선되었고 불완전하지만 자신이 일해 생산한 농작물의 일부를 가질 수 있었기에 생산력은 노예제국가에 비해 훨씬 발전할 수 있었다.
봉건사회 역시 자체 한계로 인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소작농들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지주와 투쟁하였으며 농민폭동을 통해 자신들의 권리를 찾아 나섰다. 한편 산업혁명을 계기로 농업에서 공업으로 중심산업이 이동하고 상업이 발전하여 새롭게 자본가 집단이 탄생하면서 지주계급을 위협하였다. 결국 봉건국가는 무너지고 이 자리를 자본주의국가가 차지하게 되었다.
▲동학농민전쟁도 봉건사회 붕괴를 촉발했다
자본주의사회 역시 착취계급과 착취당하는 계급이 존재한다. 착취란 계급사회에서 하위 계급의 노동으로 만들어진 생산물을 상위 계급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취득하는 것을 말한다. (출처:위키백과) 물론 자본주의사회는 노예제사회나 봉건사회와 달리 겉으로 착취가 규정되지 않다. 그러나 착취가 명문화되어있지 않다고 해서 착취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칼 마르크스는 1867년 자신의 저서 ‘자본론’을 통해 처음으로 자본주의사회에서 어떻게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지 논증하였다.
자본가계급은 생산수단, 즉 자본을 소유한 계급이다. 생산수단이란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을 함께 일컫는 말로 다시 말해 인간의 노동이 가해지는 대상 및 인간이 노동대상에 작용을 가할 때 사용하는 물건, 수단, 방법을 말한다. (출처:브리태니커백과사전) 자동차를 예로 들면 철, 유리, 플라스틱 등이 노동대상이고 자동차공장이 노동수단이 된다. 노동대상을 노동수단으로 가공하면 생산물이 나오는 식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생산수단은 모두 돈으로 마련할 수 있으므로 자본을 간단히 돈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자본과 돈은 분명히 다르다. 예를 들어 내 호주머니 속에 있는 만원은 1년이 지나도 여전히 만원이지만 만원어치 주식은 1년이 지나면 배당금이 떨어져 만천원이 된다. 이처럼 가만히 놔둬도 저절로 불어나는 돈을 자본이라고 볼 수 있다.
▲부를 긁어모으는 자본가의 탐욕을 풍자한 만화
자본가계급은 자본으로 생활을 영위한다. 예를 들어 10억원의 자본을 어딘가에 투자하여 그 배당금만 가지고 먹고산다면 그는 자본가라 할 수 있다. 물론 노동자 가운데도 주식투자를 하거나 은행에 예금을 하는 사람은 많지만 자신의 생활을 유지하는 기본 수단은 임금이며 주식투자를 통한 배당금이나 은행 예금에 대한 이자는 부수적 수입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들을 자본가라 부를 수 없다. 반면 다수의 최고경영자(CEO)들은 임금을 받지만 그건 부수적 수입에 불과하며 자신이 소유한 자기 기업의 지분만큼 받아가는 배당금이 주된 수입이므로 이들은 자본가로 분류할 수 있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팔아서 열심히 일해야 먹고 살 수 있는 반면, 자본가는 자본을 투자한 다음 가만히 있어도 노동자에 비해 훨씬 많은 수입을 오려 부귀영화를 누리는 구조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익숙한 풍경이다. 하지만 이 익숙한 풍경이 자본주의사회의 모순을 낳고 결국 새로운 사회를 잉태한다.
아무튼 자본주의사회에서 자본가와 노동자가 이런 차이를 갖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자본가는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지만 노동자는 노동 이외에 시장에 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기에 자본가는 노동자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우위에 선다. 반면 노동자는 노동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에 자본가에게 언제나 약자로 존재한다. 이것이 불로소득의 비밀이다.
불로소득을 하는 계급이 있는 한 그 사회는 모순이 존재하는 사회이며 결국 붕괴하고 만다. 중국 당나라 시절 백장산에 머물러 백장선사라 불린 회해 스님은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이라고 하였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는 뜻이다. 예수의 제자 사도 바울 역시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고 하였다. 힘이 0이면(F=0) 아무리 많이 이동했어도 일은 0이 되는(W=Fs=0) 물리학의 기본 법칙이 사회에도 고스란히 적용되어야만 한다.
실력, 실리, 그리고 실적
물리학에서 ‘일’로 인정하지 않는 두 번째 경우는 힘을 가해도 움직이지 않는 경우다. 이 경우는 움직인 거리가 0이므로(s=0) 아무리 큰 힘을 줬다고 해도 일은 0(W=Fs=0)이 된다. 예를 들어 하루 종일 벽을 밀었다고 해도 벽이 꿈쩍도 하지 않았으므로 이 경우 이 사람이 한 일은 0이다.
현실에서도 이런 일은 종종 벌어진다. 뭔가 열심히 했는데도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그렇다. 흔히 무식한 사람이 부지런하면 주변 사람 잡는다고 하는데 유사한 의미로 볼 수 있다. 일을 했으면 실적이 나와야 한다. 실적이 나오지 않으면 일을 하지 않은 것과 차이가 없다. 하루 종일 벽 옆에서 누워 잔 사람과 벽을 민 사람은 실적 면에서 다르지 않다.
실적을 내려면 실리를 챙겨야 한다. 명분만 가지고는 현실을 바꿀 수 없다. 실제 이익이 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이익을 최대로 낼 수 있도록 일을 하며, 효율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일을 해야 한다. 이러한 실리를 챙기려면 실력이 있어야 한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판단하고 이를 능수능란하게 해내는 실력이 없으면 실리도 챙길 수 없고 실적도 낼 수 없다.
진보운동에서 실리를 찾지 못하는 모습이 가끔 나타나기도 한다. 명분을 앞세우면서 실제 실적으로 전화되기 어려운 사업을 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집회나 기자회견, 서명운동, 선전활동처럼 오랫동안 반복해온 일의 경우 관성적으로 대하면서 좀처럼 변화를 주지 않으려 하기도 한다. 하지만 진보운동은 대중을 움직이는 일이며 대중의 정서에 맞지 않는 방식의 활동은 아무리 명분이 좋아도 실리를 찾을 수 없다.
▲촛불집회는 기성 집회문화를 뛰어넘어 대중의 공감을 샀다
사회 환경은 빠르게 변화한다. 특히 최신 기술들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면서 새로운 사회 현상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인터넷 상에서 블로그나 카페가 뜨더니 다시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유행이고 어느덧 스마트폰에 맞춤한 방송(팟캐스트)이 대세가 되는 등 대중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있다. 그런데 가장 진보적이어야 할 진보운동이 새로운 환경을 뒤쫓아 간다면 결코 대중을 움직일 수 없다. 새로운 사회 환경에 앞서가려면 실력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 경험하고 검증한 일을 따라 하기보다 새로운 시도를 과감히 하고 도전을 즐겨야 한다.
힘을 쓰는 이유는 일을 하기 위해서다. 힘을 써도 일이 안 된다면 머리를 써야 한다. 일을 해서 성과를 남겨야 세상이 바뀌고 밥을 먹을 수 있다. 진보운동이 실력을 키우고 실리에 민감해 실적을 내야 불로소득이 사라지고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전태일 열사 41주기를 앞두고 노동의 의미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201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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