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친하게 지낸다고 해서 결코 정권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 미국이 정권에 힘을 실어줄 때는 그저 이용가치가 있을 때뿐이라는 점을 한국의 친미세력들도 하루빨리 깨달아야 할 것이다.
박정희와 카다피는 왜 총에 맞아 죽었나
동북아의 문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2분, 궁정동 안가에서 총소리가 났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유신 독재는 끝이 났지만 이듬해 광주 시민들을 학살하고 권좌에 오른 전두환에 의해 새로운 군사독재가 시작되었다.
▲10.26사건 현장검증 장면
32년이 지난 2011년 10월 20일 북아프리카의 리비아에서 카다피가 반군의 총격에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써 리비아의 오랜 내전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언론들은 리비아에 민주화 바람이 불 것이라고 분석하지만 반군의 내부 분열과 리비아의 석유를 노리는 서방 국가들의 욕심으로 인해 장기간 리비아 국민들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반응도 만만찮다.
미국에게 버림받은 두 죽음
박정희와 카다피는 전혀 다른 사회 역사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에 직접 비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하지만 이들의 죽음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 총에 맞아 죽었다는 사인도 똑같지만 더 중요한 건 죽음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점이다.
카다피 죽음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점을 부정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리비아에서 카다피가 집권한 후 미국은 시종일관 카다피 정권 붕괴를 추구해 왔다. 이번에 내전을 일으킨 반군도 미국이 오랜 기간 지원해 왔으며 내전이 시작되자 직접 지원 폭격을 하기도 하였다. 카다피가 사망하자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카다피의 죽음은 서방세계 군사행동의 정당성을 입증했다”며 “철권통치는 반드시 무너진다”고 언급했다. 미국은 반군의 손을 빌어 카다피를 살해한 셈이다.
▲리비아를 폭격하는 나토군
박정희 죽음의 배후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존재한다. 김재규 본인은 재판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혁명을 한 것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석연찮은 부분이 많다. 여러 주장들 가운데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이 바로 미국 배후설이다. 작년 2월 22일 외교통상부가 공개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10.26사건 당시인 1979년 10월 29일 휘류빈 소련 외무차관은 모스크바에서 우어모도 주소련 일본대사에게 “박 대통령은 미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KCIA(중앙정보부) 부장에게 살해된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당시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미국 배후설이 널리 퍼져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5.16쿠데타 당시만 해도 박정희 정권을 지지했던 미국이 왜 박정희 살해의 배후로 지목받게 되었을까? 몇 가지 요인이 있지만 가장 중요하게는 박정희 정권이 미국 몰래 핵개발을 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미국의 비밀문서들이 공개되면서 박정희 정권의 핵개발은 이미 사실로 드러났다. 문정인 교수와 피터 헤이스 미국 노틸러스 연구소장은 미 중앙정보국(CIA)이 1978년 6월 작성한 ‘한국:핵개발과 전략적 정책결정’ 등을 분석한 글을 지난 9월 ‘글로벌 아시아’ 가을호에 실었다. 이들은 이 글에서 박정희 정권이 1974년 말 핵무기 개발 계획을 승인했으며 이는 1978년 말까지도 계속되었다고 분석했다. 핵무기 개발 결심은 71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박정희 정권이 핵무기를 개발한 이유는 사실 미국과 연관 있다. 베트남전에서 패배하고, 중국과 화해하며, 주한미군을 감축하는 미국에 대해 불안감을 느낀 박정희 정권은 미국만 믿고 앉아있을 수 없다는 판단 아래 핵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한다. 코드명 890으로 부른 이 핵개발은 곧바로 미국에게 발각되어 75년 8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핵무기 포기 각서를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이후에도 미국 몰래 핵개발을 계속 추진하였으며 미사일 개발에도 열을 올렸다.
물론 미국이 박정희 정권의 핵개발을 막은 이유는 자신의 핵독점을 위해서였다. 자신의 영향 아래 있던 한국이 핵무기를 보유하면 일단 동북아에서 일본,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려 할 것이며 세계적으로도 다른 나라들이 너도나도 핵무기를 보유하려 할 것이 뻔했다. 그렇게 되면 핵확산방지조약(NPT)를 통해 어렵게 유지하고 있는 자신의 핵독점체제가 순식간에 붕괴할 것이다. 게다가 한국이 핵보유를 하면 재래식 무기 수입을 줄일 것이므로 미국의 군수업체들도 피해를 입게 된다.
이런 와중에 1979년 9월 22일 이스라엘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이 협력하여 정체불명의 핵실험을 하였다. 1974년 인도가 핵실험을 통해 핵보유국이 된데 이어 이스라엘과 남아공이 핵보유국으로 등장하자 미국은 핵확산 억제에 더욱 매달리게 되었다. 미국 입장에서 핵개발에 집착하는 박정희 정권은 제거 대상이었다.
▲부마항쟁
여기에 YH사건, 김영삼 총재 제명 사건, 부마항쟁 등으로 한국 사회가 심각한 혼란에 빠져들었고 박정희 정권이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다고 판단되자 미국은 가차 없이 박정희 정권을 버렸다.
암살을 이미 예상한 미국
당시 카터 미 대통령은 박정희 사망 소식을 듣자 곧바로 긴급 안보회의를 소집했고 회의 결과를 토대로 백악관 대변인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 발표 시간은 한국시간으로 27일 새벽 5시로 한국에서 김성진 문공부장관이 박정희 사망을 정식으로 발표한 시각보다 약 3시간이나 앞섰다.
게다가 이 성명에는 한국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를 두고 일본의 산케이 신문은 “암살 사건과 관련하여 미국은 피고인석에 놓여 있다”면서 의혹을 제기했다. 미국이 박정희 암살과 쿠데타를 준비한 것 아니었냐는 것이다. 또 홍콩의 원동 경제 리뷰(Far Eastern Economic Review)는 11월 9일자 보도에서 “솔직히 말해서 미국 관리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 사건에 대해 지나치게 놀라거나 곤혹을 느끼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처럼 여러 정황을 놓고 볼 때 미국은 박정희 암살에 대해 예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직접 개입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박정희 제거를 바라고 있었다는 점도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여기서 우리는 미국이 다른 나라 정치에 어떤 입장을 가지고 개입하는지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5.16쿠데타 모습
애초에 미국은 박정희 정권을 지지했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설 당시 미국은 이승만 정권이 무능력하고 국민적 반감을 사고 있었기에 미국이 요구하는 것들을 제대로 집행하지 못한 데 불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한미일 삼각군사동맹이 절실했던 미국은 한일협정을 통해 한일관계를 정상화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한국이 북한에 비해 경제력에서 밀리자 체제경쟁을 위해 한국에 자본주의를 도입하여 경제를 급격히 팽창시켜야 할 필요도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이런 미국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이런 일들은 국민들의 반발을 억누를 수 있는 군사독재정권이 제격이었고 따라서 미국은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였다.
이처럼 미국의 지지를 통해 정권을 유지하며 미국의 요구를 충족했던 박정희 정권이었지만 이용가치가 사라지고 미국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자 미국은 미련 없이 박정희 정권을 교체하는 편을 선택했다. 이런 모습은 이라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은 원래 미국의 지원을 받았지만 이용가치가 사라지자 순식간에 미국의 적이 되어 결국 제거되고 말았다.
리비아 카다피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카다피는 친미왕정을 무너뜨리고 쿠데타로 집권한 후 반미 사회주의를 고수하여 미국과 적대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냉전 붕괴 후 미국과 관계개선에 들어가 대량살상무기를 폐기하는 등 미국의 요구를 적극 수용하였다. 하지만 미국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아무리 미국과 화해하려 해도 반미의 경력을 가진 카다피를 미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카다피는 마지막까지 오바마 정부에 도움을 호소했으나 이는 미국의 본성을 간과한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10월의 두 죽음은 미국의 본성에 대해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던져준다. 그리고 그런 미국과 친하게 지낸다고 해서 결코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점도 일깨워준다. 미국이 정권에 힘을 실어줄 때는 그저 이용가치가 있을 때뿐이라는 점을 한국의 친미세력들도 하루빨리 깨달아야 할 것이다. (2011.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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