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디리파드(E.M.S. Namboodiripad)
V. 무갈 시대의 종언(終焉)
바하두르 샤가 투옥(投獄)됨으로써, 세포이 반란과 그에 동참한 대중들의 봉기가 끝났다. 그러나 그것은 특정한 투쟁 또는 봉기가 끝나는 것뿐만 아니라 유럽 무역 회사들이 인도에 도래하기 이전부터 몇 세기 동안 존재했던 인도 사회의 실패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었다. 이는 고대 부족사회 분열의 결과로 만들어진 바르나 체제(varna system)와 그를 외현(外現)한 카스트(caste), 바르나 체제에 기반한 마을 공동체라는 특징을 지닌 고대와 중세 시대의 종언이었다.
우리가 보았듯이, 유럽 무역 회사들이 도래할 때까지, 인도 사회는 세 요소들로 구성되었다. 구체적으로, 델리의 황제, 황제에 종속되었거나 독립한 지역의 지배자들, 그리고 그들과 동맹을 맺는 봉건귀족들이었다. 18세기 말에 지역 봉기들로 시작되어 1857-59년 북인도에서 세포이 반란과 대중 봉기들로 최고조에 이른 모반은 연속적인 후퇴에 직면하였다. 최후의 그리고 가장 격렬한 봉기들이었던 1857-59년 투쟁의 패배로, 사회(또는 엘리트 계급이 최고 꼭대기의 위치에서 지배했던 그 사회)는 항복하였다. 바하두르 샤의 항복과 잔시 지방 라니의 영웅적 종말은 그런 사실을 묘사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것은 엘리트 계급의 패배뿐만이 아니라 전체 인민들의 패배였다. 영국에게 군사적으로 패배한 것은 델리 황제의 지배권 또는 탈루크랄과 기타 귀족들이 재산을 빼앗긴 것뿐만 아니라 전체 인민들에게 배태(胚胎)된 그들의 신념 체계, 관습들, 행위에 관한 전체 사회적 삶의 양식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일반 대중들은 그들의 사회적 삶의 양식을 보호하고 유지하려고 하였으며 (그것을 파괴하는: 번역자) 외국인들의 공격에 저항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 몰아치는 힘이 다가올 반영 투쟁들의 매 단계에서 표출되었다.
우리는 18세기 말엽에 이르는 동안 여러 지역들에서 연속적으로 일어난 봉기들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힌두 산야시(Sanyasys)1)와 무슬림 파키르(Fakirs)2)들이 이끈 봉기들은 때로는 연합의 형태로 때로는 독자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영국이 벵갈과 그 주변 지역의 지방 나와브와 델리 황제로부터 공식적으로 얻은 권한을 하나로 통합하여 공고화할 때까지 그런 봉기들이 발생하였다. 어떤 지역들의 대중 봉기들에는 영국 지배 아래에서 궁핍해지고 정치적 권리도 빼앗겨 날카로워진 인민들의 불만이 반영되었다. 1770년에 벵갈에 기근이 오자, 그것에 고통받는 인민들이 힌두 산야시와 무슬림 파키르들의 지도 아래 스스로 떨쳐 일어났다. 벵갈의 여러 지역들에서는 총체적인 영국 지배를 끝장 낼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갖고 있는 산야시 산하의 군대가 지역에서 영국 병사들을 패배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산야시-파키르 봉기들은 그 시기 다른 지역에서와 달리, 기본적으로 종교적 감성들에 기반하였다. 유럽 무역 회사들이 들여놓은 기독교가 인도인들의 삶의 체계와 신념들을 위태롭게 한다는 인식이 힌두인들과 무슬림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므로 인도인들은 기독교와 그들의 보호자인 영국에 저항하는 것이 그들의 도덕적 의무라고 여겼다.
산야시-파키르 봉기는 그와 같은 감정들과 인민들 사이에서 하루하루 성장하는 날카로운 정치-경제학적 불만들이 복합된 결과이다.
그와 같은 봉기들을 뒤따라서, 종교적 감정에 기초한 다른 여타의 운동들이 인도의 다양한 지역들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들 가운데, 무슬림 봉기에는 뚜렷한 특징이 있었다. 델리 술탄(Delhi Sultanate)국3) 시절부터 무갈 제국에 이르기까지 무슬림 엘리트들은 관직에서 높은 지위에 있었다. 그런 특혜들과 지위들을 잃어버렸다는 박탈감이 그들의 반영 봉기들을 부추기었다. 마찬가지로, 힌두들 사이에서도 불만족이 커졌다. 힌두들이 참여한 몇 개의 봉기들이 인도의 여러 지역들에서 발생하였다. 그러나 북인도 전체를 아우르는 무슬림 지배의 개념은 사라져갔고 특유한 이슬람적 성격의 운동들이 일어났다.
그 가운데, 벵갈의 파라이디(Faraidi) 운동과 지금의 우타르 프라데시(Uttar Pradeh)지역의 와하비(Wahabi) 운동을 특별히 언급하는 것은 가치가 있다. 그 두 운동들의 핵심은 외국인들의 공격으로부터 그들의 종교를 지키려는 것이었다. 그 당시 그 운동들의 주요 적은 기독교였다. 기독교의 후원자인 영국과 함께 기독교는 힌두교와 이슬람 모두를 공격하는 힘으로 보였다. 따라서 그 운동들이 힌두-무슬림 갈등들을 이끌지 않았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이후에 민족해방투쟁의 단결을 깬 힌두-무슬림 공동체중심주의(Communalism)4)가 발전하는 데 조건이 되는 싹을 포함하고 있었다.
영국이 도래하기 전에 인도에는 몇 세기 동안 힌두주의와 이슬람주의 모두 존재하였다. 일부 지역들에서는 어느 시기에 이 두 종교들이 서로 싸웠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양쪽 모두 같은 인도사회의 부분으로서 존재하였다. 양쪽 종교의 인민들과 그들의 사회-문화적 지도자들은 카스트, 마을, 대가족 제도들이 배태된 공동의 사회를 인정하였다. 인도의 많은 곳에 있는 (예를 들면 께랄라) 기독교인들 역시 그런 인도 사회의 독특한 특징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유럽 무역 회사들의 도래와 함께 변했다.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나중에 여타 유럽 회사들은 기독교를 종교가 아니라 이 나라에서 그들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보호하고 발전시키는 무기로 이용하였다. 그것은 그들 기독교의 포교(布敎)와 이곳에서 여러 세대 살아온 기독교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계층의 카스트의 인민들의 토대인 종교적 믿음들과 관습들 사이에 갈등을 일으켰다(예를 들면, 께랄라에서 토착 기독교인들과 포르투갈 상인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그 결과로 생긴 쿠난 쿠리수<koonan kurisu> 서약이 역사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5)). 베다와 서사시에 기초한 인도문화의 대표자들이라고 자처하는 힌두들과 몇 세기 동안 인도를 계승하여 지배했던 무슬림들이 그 새로운 (기독교) 종교의 선전과 그들의 지배에 저항했던 것은 이상하지 않다.
종교적 교의들과 믿음 체계보다 더한 것은 관습들과 의례들이다. 그것들은 인민들이 공동체 구성원으로 그들의 감정과 느낌들을 쉽게 분출시킨다. 외국 무역업자들이 도래하기 전에 힌두, 무슬림 그리고 토착 기독교인들에게는 그들 자신의 관습들과 의례들을 갖고 있었다. 개별 공동체는 다른 공동체의 관습과 믿음들에 대해서 관용적이었고 기관들 역시 그런 문제들에 간섭하지 않았다(어떤 지배자들이 여타의 종교적 믿음들에 간섭했던 특별한 경우조차, 그들 공동체의 인민들은 그런 행동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의 지배 아래에서는, 여타 종교들의 교의들과 신념들을 조롱하는 태도와 그들의 관습과 의례들을 유린하는 일이 성행(盛行)하였다. 그것은 힌두와 무슬림 양쪽 모두 똑같은 고통이었다. 그들은 영국 지배에 대항하기 위해 일어섰다. 힌두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의 지지자들에게 힌두 다르마(Dharma)6)를 지키기 위하여 영국에 저항하는 투쟁을 요구하였다. 무슬림 종교 지도자들도 그들의 딘(Deen, 종교)7)을 지키기 위해 외국의 지배를 박살내야 한다고 그들의 지지자들에게 요구하였다.
벵갈에서 최초로 발생하여 남인도 그리고 나중에는 세포이 반란과 인민봉기를 이끌던 인민들의 반영 감정 가운데 가장 최고조였던 것은 카스트의 의례들과 “종교적 교의들 그리고 믿음들이 위태”롭다는 절박감이었다. 1806년 벨로레 지방에서 시작된 세포이 봉기부터 광범위하게 퍼진 1857-59년 봉기까지, 영국 지배자들을 적대하여 봉기한 인도 병사들은 그들의 카스트와 종교가 위협받는다는 감정이 그들을 행동으로 이끌었다.
예를 들면, 1806년 벨리오레 세포이 반란을 야기한 것은 그들의 상급자들이 세포이들의 의복과 수염에 관해 내린 어떤 명령이었다. 그 명령들은 힌두인의 이마에 틸라크(tilak)8)의 카스트 징표를 표시하는 힌두 관습을 금지하였고, 시크와 무슬림들에게 수염과 머리카락을 자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인도인들이 관습적으로 사용하던 터번을 머리에 두르는 대신 모자를 쓰라고 지시하였다. 모자들을 만드는 데 동물들의 가죽을 사용하는 것 역시 세포이들을 자극하였다. 그들은 어떤 동물들의 가죽이 사용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모든 조치들은 힌두, 무슬림 그리고 시크 공동체에 속했던 병사들의 마음 속에 심각한 걱정을 만들었다. 그들은 그런 조치들이 그들의 공동체로부터 그들을 떼어내어 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는 영국의 음모 가운데 일부인 것으로 의심하였다.
그런 사태의 발전에 따라서, 인도 병사들이 그들의 상급 장교들에 적대하여 기회 있을 때마다 봉기하였다. 사실, 그들이 분개하는 데는 여러 이유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 중요한 원인은 그들의 종교적 믿음들과 관습을 포기하고 기독교로 개종하라고 강제할 것이라는 의혹이었다. 힌두 병사들에게 외국 나라들의 전쟁에 가라고 명령이 내려졌을 때 그들은 분개하였다. 바다를 건너는 것은 그 당시 관습에 따르면 축출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몇 가지 사건들이 1857년 세포이 반란의 명백한 원인을 이루었다. 동물 기름이 탄창의 기름으로 사용된다는 의심이 병사들 사이에서 불만을 일으켰다. 힌두들은 만약 소의 기름을 탄창기름으로 사용하면 그들의 카스트를 잃어버린다고 믿었다. 마찬가지로 무슬림들은 돼지 기름을 사용한다는 불만을 갖고 있었다. 사실, 세포이들이 1857년 5월 9일 미루트(Meerut)에서 그리고 연속해서 다른 지역들에서 봉기한 것은 그 의심이 부추긴 것이었다.
합리주의자 또는 유물론자는 그런 모든 것을 단지 미신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미신들 때문에 봉기한 군인들을 무지하고 반동적이라고 규정해버린다. 그러나 오랜 세대들의 믿음, 신의들 관습들 그리고 관행들에는 몇 세기에 걸친 사회의 문화적, 도덕적 가치관이 반영되어 있다. 바로 그 점이 미루트의 반란이 기타 여러 군사 기지들에 전파되어 일어난 이유다.
그런 감정들이 군 기지의 병사들뿐만 아니라 더 이상 빼앗길 것이 없는 시민 대중들을 움직였다. 영국은 의복과 수염 그리고 병사들의 무기 사용과 관계된 조치들을 소개하면서, 시민들의 가족생활, 재산권, 교육 그리고 문화를 바꾸는 조치도 소개하였다. 사띠(Sati: 과부를 남편의 장례식에서 함께 불태워 화장하는 것)의 폐지, 재혼의 합법화는 근대 사회에서 볼 때 인정받는 진보적인 조치다. 그러나 그런 조치들은 모두 힌두의 믿음과 관습들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영국 정부가 힌두의 관습들과 믿음을 파괴한다면 무슬림에게도 똑같이 할 것이라고 느꼈다.
힌두들과 무슬림들 모두 기독교가 기관들의 편의제공과 보호를 받으며 활동적으로 선교를 하는 증거를 보았다. 그들은 영국 정부가 전향자를 위해 설립하는 새로운 교육 기관들조차 의심하였다. 그러므로 기독교와 그것의 포교자들은 힌두-무슬림 종교적 차이들이 존중받지 못한다고 여긴 전체 대중들로부터 분노와 증오를 샀다.
카스트-종교 제도에 기반한 교의들, 신념들, 관습들은 델리 황제와 지배자들 그리고 그의 아래에 있는 지방 토호 수장들을 포함한 정치적 체계에서 인도 사회의 집합적 삶의 상징들이었다. 그 사회 문화적 구조는 고대‧중세 인도사회의 일부분이었다. 그 시스템을 시작 단계부터, 유럽 무역 회사들이 파괴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델리 황제, 탈루쿠다르, 자기르다르, 봉건귀족들이 포함된 지배자들의 정치체제를 파괴하는 것으로 인도의 시스템을 파괴하려고 하였다. 한편에서는 산야시와 파키르들의 반란이, 또 다른 편에서는 1857년 최고조에 이른 세포이 반란과 광범위한 인민들의 봉기들이 그런 유럽 무역업자의 행동에 대항해서 일어난 투쟁들이었다. 지방의 (봉건: 번역자) 지배자들과 델리 황제의 패배는, 사실, 카스트와 종교 제도들에 기초한 낡은 인도 사회의 패배였다. <노사과연>
번역 : 이병진(양심수)
1) 역주: (이하 별도 표기없는 것은 역자주이다.) 힌두 승려. 산야시는 (욕망을) 포기한 자를 뜻한다.
2) 이슬람의 탁발승. 신비주의자들은 스스로 존재하는 신에 대한 인간의 영적 궁핍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 도시 지역에서는 영향력이 거의 없지만 인도의 촌락 지역에서는 아직도 큰 영향력이 있다.
3) دلی سلطنت. 1210년부터 1526년까지 델리를 중심으로 인도를 지배하던 제국. 300여 년 간 이슬람계의 다섯 왕조가 교체되었다.
4) 꼬뮤날리즘의 어근이 꼬뮨(Commune)이기 때문에 공산주의적인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지만 여기서는 전혀 관련이 없다. 오히려 자신의 공동체만을 중심으로 한 분열주의나 종교광신주의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인도에서는 극단적 힌두 중심주의와 이슬람 중심주의 간의 갈등이 살상을 수반한 폭력적 비극으로 드러나기도 하였다. racism(인종주의)이나 sexism(성차별)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5) 원주: 코난 크로스(The Koonan Cross)는 코친(Cochin), 마탄체리(Mattancherry)에 위치한다. 코친에 정착한 포르투갈 세력은 성 토마스(St. Thomas) 자신이 세운 것으로, 께랄라 원주민 기독교 공동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포르투갈 가톨릭 관습들과 관례를 격렬하게 거부하는 토착 기독교인들에게 그것을 강요하려고 하였다. 십자가 앞에서의 맹세는 포르투갈의 지배로부터 자유를 선언하는 것이며, 포르투갈 가톨릭으로 개종을 거부하고 그들 스스로 지키려는 것이었다.
6) “의무”로 번역하기도 한다. 태생적으로 태어난 근본적 법칙. 힌두교의 우주론적 인생관의 핵심개념.
7) دين. 꾸란에 나오는 용어. 종교, 신념이라는 뜻으로 번역하지만 이슬람 교도들에게는 생활양식을 뜻한다.
8) 힌두교에서 이마에 그리는 표식. 자신이 속해 있는 종파를 나타낸다.
* 출처 : 노동사회과학연구소 http://www.lo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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