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13년 동안 바뀌지 않은 인맥과 방침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인 1998년 10월 24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취재기자들을 만난 북측 외교관 두 사람이 즉석에서 질의응답을 주고받았다. 취재기자가 그들에게 물었다. “의제를 먼저 정해야 한다는 기존 방침에서 (북측이) 양보했는데...” 취재기자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북측 외교관이 답변했다. “의제를 먼저 정해야 한다는 우리의 기본 방침에는 변함이 없다. 조미 평화협정과 남조선 주둔 미군 철수문제는 조선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한 근본문제다. 우리는 이러한 자세로 앞으로의 협상에서 이를 반영시켜 나갈 것이다. 이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 4자회담에서 제기하겠다.” 취재기자가 다시 물었다. “주한미군문제는 어느 분과위원회에서 논의되는가?” 이번에는 다른 북측 외교관이 답변했다. “남조선 주둔 미군 문제는 조선반도 긴장완화 문제를 다룰 분과위원회에서 논의할 것이다.”
위의 질의응답은 당시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3차 4자회담에 참석한 북측 수석대표와 차석대표가 취재기자들과 나눈 것이다. 13년 전 4자회담에 참가하였던 북측 수석대표는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이고, 차석대표는 리근 외무성 미국국 국장이다. 이 두 외교관은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2011년 7월 28일과 29일 미국 뉴욕에 있는 유엔주재 미국대표부에서 열린 북미 고위급회담에 북측 대표로 참석하였다.
1998년 10월 24일 이후 해와 달이 수없이 바뀌며 세월이 흘러 2011년 7월 29일에 이르기까지 북미관계는 상상을 뛰어넘는 큰 변화를 겪었다. 북측은 두 차례 지하핵실험을 실시하여 핵보유국이 되었고, 미국에서는 두 차례 정권교체로 클린턴 정부에서 부쉬 정부를 거쳐 오바마 정부가 등장하였다. 북미 공동코뮈니케가 발표되었고, 조명록 차수의 워싱턴 방문과 매들린 올브라이트(Madeleine K. Albright) 국무장관의 평양 방문이 실현되었고, 6자회담 진전에 따라 9.19 공동성명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그런 엄청난 변화 속에서도 바뀌지 않은 것이 있었다. 13년 전 4자회담에 북측 대표로 참가한 김계관 제1부상과 리근 국장이 13년 뒤에도 여전히 북미 고위급회담에 북측 대표로 참석한 것이다. 북측의 대미 외교인맥이 13년 동안 바뀌지 않은 것은, 대미협상을 지휘해온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략적 방침이 바뀌지 않았음을 뜻한다.
13년 전 스위스 제네바에서 4자회담을 마친 직후 취재기자들에게 북측의 4자회담 참가방침을 밝혔던 김계관 제1부상은 이번에 북미 고위급회담을 마친 뒤에 취재기자들에게 북측의 북미 양자회담 추진방침을 밝혔다. 2011년 8월 2일 그는 방미일정을 모두 마치고 뉴욕 케네디 공항으로 향하기 직전 취재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짤막한 답변을 남겼다. “이번 회담에 만족한다. 앞으로도 대화를 계속할 것이다. 다자회담 전에 쌍무적 만남이 계속 있어야 할 것이다.” 답변은 간략했으나, 그 속에는 중요한 의미가 들어있었다.
김계관 제1부상은 간략한 답변에서 이번 북미 고위급회담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만족감 표시는 북미 고위급회담에 대한 그 자신의 총평가로 들린다. 그런데 언론보도를 아무리 읽어봐도 이번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어떤 합의를 내왔다는 소식을 찾을 길 없는데, 뉴욕을 떠나면서 그는 왜 만족감을 표시한 것일까?
미국 편만 일방적으로 들어주는 언론매체들은 김계관 제1부상의 만족감 표시를 무심히 넘기고 말았지만, 그가 만족감을 표시한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그 까닭은, 이번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북측 대표단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대미협상전략을 일정 부분 관철하는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북측 대표단이 관철한 대미협상전략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김계관 제1부상이 위의 간략한 답변에서 밝힌 것처럼, 6자회담을 재개하기 전에 북미 고위급회담을 몇 차례 진행하는 협상전략이다. 2011년 8월 1일 김계관 제1부상은 북측 대표단 숙소인 유엔 밀레니엄 플라자 호텔에서 취재기자들과 만났을 때 “(이번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호상 관심사가 되는 문제들을 다 올려놓고 앞으로 충분히 검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뒀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하여 북측 외무성은 2011년 8월 1일 조선중앙통신사 기자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이번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얻은 성과를 지적하였다. 외무성 대변인의 답변에 따르면, 이번 북미 고위급회담에서는 “조미관계 개선과 조선반도 정세안정, 6자회담 재개와 관련한 문제들이 진지하고 건설적인 분위기 속에서 심도있게 론의되였다. 쌍방은 조미관계를 개선하며 협상을 통하여 평화적 방법으로 조선반도 비핵화를 추진해나가는 것이 각측의 리익에 부합된다고 인정하였으며 앞으로 대화를 계속해 나가기로 하였다.”
이번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북측이 얻은 성과는, 6자회담을 재개하기 전에 북미 고위급회담을 몇 차례 진행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6자회담을 재개하기 전에 북미 고위급회담을 몇 차례 진행하기로 한 성과를 중시해야 하는 까닭은, 이번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북측과 미국이 서로 상대에게 제기한 의제들을 앞으로 몇 차례 진행할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논의,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진행될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쌍방이 서로 상대에게 제기한 의제들을 합의하면, 그 합의에 따라 한반도 정세를 뒤바꿀 실천적 조치들이 취해질 것이다.
이번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제시된 의제들
이번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북측은 미국에게 어떤 의제를 제시하였을까? 2011년 8월 1일 김계관 제1부상은 북측 대표단 숙소인 유엔 밀레니엄 플라자 호텔에서 취재기자들에게 “동아시아의 안정을 위해 조미 양국이 관계개선에 필요한 공동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발언을 들어보면, 북측이 미국에게 제시한 의제는 동아시아 안정과 북미관계 개선을 위한 북측과 미국의 공동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아시아 안정과 북미관계 개선을 위한 북측과 미국의 공동노력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한반도 평화회담 개최와 평화협정 체결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이번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북측은 미국에게 한반도 평화회담 개최와 평화협정 체결을 의제로 제시한 것이다. 13년 전 스위스 제네바에서 진행된 4자회담에서 북측은 평화협정 체결과 주한미국군 철군을 의제로 제시하였지만, 이번 북미 고위급회담에서는 한반도 평화회담 개최와 평화협정 체결을 의제로 제시하였다. 주한미국군 철군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우선 평화협정 체결문제부터 선결하려는 전략적 의도가 엿보인다.
한반도 평화회담을 개최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은, 북측 대표단이 이번에 대미협상의제로 제시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한반도 평화전략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오래 전에 그러한 한반도 평화전략을 세우고, 북측의 외교력과 군사력을 그 전략 수행에 집중시켜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한반도 평화전략 수행에 집중된 북측의 외교력과 군사력은 그 동안 강력한 대미압박공세로 전개되었고, 그 공세 앞에서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백악관은 결국 ‘전략적 인내’를 포기한 채 북미 고위급회담에 나간 것이다.
2009년 11월 8일 <니혼게이자이신붕>은 북미관계 소식통들이 한 말을 인용하여 북측은 6자회담이 재개되기 전에 북미 고위급회담을 네 다섯 차례 진행할 것으로 예상하였다고 보도하면서, 북측이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평화협정 체결문제를 제기할 것으로 보인다고 관측한 바 있다. 이 보도기사가 나온 때가 2009년 11월이었으므로, 북미 고위급회담을 몇 차례 진행하면서 평화회담 개최와 평화협정 체결을 합의하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략구상은 이미 오래 전부터 추진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미국이 기존 대북협상전략을 포기하고 이번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앞으로 북미 고위급회담을 몇 차례 진행하기로 합의하였다는 점이다. 원래 미국의 기존 대북협상전략은 북측이 6자회담에 복귀하기 전에는 평화협정 문제를 북측과 논의하지 않고, 6자회담이 재개되는 경우에도 6자회담 틀 안에서 북미 양자회담을 진행한다는 것이었다. 북미 양자회담을 6자회담 틀 안에서 진행하는 경우, 그 회담은 고위급회담으로 격상되지 못하고 부쉬 정부 시기에 그러했던 것처럼 자연히 실무급회담으로 격하될 것이다.
이를테면, 2009년 12월 16일 스티븐 보스워즈(Stephen W. Bosworth)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는 국무부 출입기자단에게 미국 정부대표단 방북결과를 설명하면서 “(미국은) 6자회담 틀 안에서 지속적인 양자대화의 기회가 넓어질 것이라고 북측에 설명했다”고 전하고, “우리는 6자회담이 재개되기 전에는 어떤 문제에 대한 협상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또한 2010년 2월 3일 미국 외교정책분석연구소(IFPA)가 주최한 비공개 토론회에 참석한 보스워즈 대북정책 특별대표는 기조연설에서 북측이 6자회담에 복귀하여 명확한 핵폐기 의지를 보이면 평화협정 문제를 북측과 논의하겠다는 미국의 대북협상전략을 밝힌 바 있다. 또한 같은 날 서울을 방문 중이던 커트 캠벨(Kurt Campbell) 국무부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주한미국대사관 공보실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북측이 6자회담에 복귀하고 2005년(9.19 공동성명)과 2007년(2.13 합의)에 취해진 조치를 북측이 다시 약속하기 전에는 제재 해제나 평화협정과 같은 주제에 대해 논의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잘라말했다.
이처럼 평화협정 문제를 논의하기 전에 6자회담부터 재개해야 하고, 6자회담 틀 안에서 북미 실무급회담을 진행해야 한다고 완강하게 버티던 미국은 북측의 강력한 압박공세에 무릎을 꿇었고, 이번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한반도 평화회담 개최와 평화협정 체결을 먼저 논의한 뒤에 6자회담을 재개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번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북측이 한반도 평화회담 개최와 평화협정 체결을 의제로 제시하였다면, 미국은 어떤 의제를 제시하였을까? 미국이 제시한 의제는, 보나마나 ‘백악관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급히 끄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미국 대표단은 백악관에게 가해진 북측의 강한 압박에서 벗어나는 다급한 문제를 의제로 꺼낸 것이다. ‘백악관 발등에 떨어진 불’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영변 핵시설단지에서 추진되고 있는 우라늄 농축과 실험용 경수로 건설을 뜻한다. 미국이 이번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북측의 우라늄 농축문제를 가장 중요한 의제로 제시하였다는 사실은, 2011년 7월 23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남측, 미국, 일본 외교장관회담에서 내놓은 공동언론발표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발표문에는 “북측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에 대한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한 공조를 지속해 나가기로 합의”하였고, “6자회담 재개를 위해서는 북측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 역시 다루어져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하였다”는 구절이 있다.
위의 인용문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6자회담에서 북측의 우라늄 농축 문제를 다룬다고 표현하지 않고, 6자회담을 재개하기 위해 북측의 우라늄 농축 문제를 다룬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현재 미국의 대북협상방침이 6자회담을 재개하기 전에 북미 고위급회담을 진행하면서 북측의 우라늄 농축 문제를 논의하고, 그 문제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낸 뒤에 6자회담을 재개하는 것으로 바뀌졌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원래 6자회담 합의에 따르면, 북측의 우라늄 농축 문제는 6자회담에서 다루기로 되어 있었다. 2007년 10월 3일에 채택, 발표된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제2단계 조치와 관련된 6자회담 합의’에 따르면, “조선은 우라늄 문제와 관련한 명확한 신고를 비롯하여 올 연말까지 조선의 모든 핵프로그램을 완전하고 정확하게 신고하기로 합의하였”고, “신고대상에는 모든 핵시설, 핵원료 및 핵프로그램이 포함”되는데, “조선은 우라늄 농축 및 해당활동과 관련한 사항도 다루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처럼 4년 전 6자회담에서 북측의 우라늄 농축 문제를 다루기로 합의하였던 미국은 왜 이제 와서 그 문제를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논의하려는 것일까? 2007년 당시만 해도, 북측의 우라늄 농축 문제는 미국이 북측에게 제기한 의혹이었지 실물로 확인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북측은 2010년 11월 12일 당시 북측을 방문 중이던 미국인 전문가들에게 영변 핵시설 단지에 건설한, 알멜로(Almelo) 원심분리기와 유사한 최신형 원심분리기들이 가득 들어찬 우라늄 농축시설을 공개하여 백악관을 경악과 충격에 몰아넣은 바 있다.
미국의 시각으로 보면, 2007년에 북측의 우라늄 농축 의혹을 밝히는 문제는 6자회담에서 시간적 여유를 두고 차자 논의할 수 있었지만, 현재 실험용 경수로 건설공사를 계속하며 최신형 농축시설을 가동하는 북측의 우라늄 농축 문제는 6자회담에서 시간적 여유를 두고 논의할 수 없는 ‘백악관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미국은 시각을 다투는 그 문제를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하루라도 일찍 푸는 수밖에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백악관은 초조와 불안에 사로잡혀 궁지에 몰릴 것이고, 북측은 그런 백악관을 계속 압박하여 자기의 대미협상전략을 관철하려고 할 것이다.
명백하게도, 미국은 이번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북측의 우라늄 농축 중단을 회담의제로 제시하였다. 미국 대표단은 ‘백악관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려는 다급한 심정으로 북측에게 우라늄 농축 중단을 앞으로 열릴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다루자고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김계관 제1부상은 그 의제를 제시한 미국에게 따끔하게 일침을 놓았다. 2011년 7월 31일 그가 북측 대표단 숙소인 유엔 밀레니엄 플라자 호텔에서 취재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면서 “우리의 우라늄 농축은 전기생산을 위한 평화적 핵활동”이라고 밝힌 것은, 이번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미국이 북측의 우라늄 농축 중단이라는 의제를 제시한 것 자체가 부당하다고 지적한 것이다.
북측의 우라늄 농축이 전력생산을 위한 평화적 핵활동이라고 밝힌 김계관 제1부상의 말은, 2005년 9월 19일 제4차 6자회담에서 채택, 발표된 9.19 공동성명에 부합되는 발언이다. 공동성명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밝혔”고, “여타 당사국들은 이에 대한 존중을 표명하였”다. 북측이 전력을 생산하기 위해 우라늄을 농축하는 것은, 9.19 공동성명이 보장하는 북측의 정당한 권리 행사인 것이다. 북측이 영변 핵시설 단지 안에 우라늄 농축시설을 건설한 다음, 실험용 경수로가 들어갈 격납시설을 그 단지 안에 완공한 것을 보면, 장차 실험용 경수로에서 사용할 핵연료를 생산하기 위해 우라늄을 농축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의심 많은 백악관은 그러한 정황증거만으로는 의심을 거두지 못한다. 백악관은 북측의 우라늄 농축이 전력을 생산하기 위한 평화적 핵활동이 아니라 고농축 우라늄을 생산하기 위한 군사적 핵활동이라는 강한 의혹을 품고 있다. 북측의 우라늄 농축이 경수로 핵연료를 생산하기 위한 평화적 핵활동인지 아니면 무기급 핵물질을 생산하기 위한 군사적 핵활동인지를 판별하는 유일한 방도는, 북측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의 우라늄 농축시설 방문을 허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미국은 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이 하루 속히 현장에 가서 직접 확인한 다음, 농축활동을 지속적으로 감시해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다급한 처지에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미국이 이번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의 현장방문 허용과 우라늄 농축 중단을 의제로 제시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
평화협정 체결 시나리오를 예상한다
북측이 우라늄을 농축하고 실험용 경수로를 건설하는 목적은, 자국의 경제발전 추세에 따라 급증하는 전력수요를 충족하려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목적은 미국에게 제기한 자국의 정치적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이 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의 현장방문을 허용하라는 자국의 요구를 북측이 들어주기 바란다면, 그에 상응하는 북측의 요구도 당연히 들어주어야 한다. 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의 현장방문을 허용하라는 미국의 요구에 상응하는 북측의 요구는 한반도 평화회담 개최가 될 것이다. 미국이 한반도 평화회담을 개최하자는 북측의 요구를 들어주면, 북측도 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의 현장방문을 허용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미국이 우라늄 농축을 중단하라는 자국의 요구를 북측이 들어주기 바란다면, 그에 상응하는 북측의 요구도 당연히 들어주어야 한다. 북측의 우라늄 농축 중단에 상응하는 북측의 요구는 평화협정 체결과 북미 정상회담 개최가 될 것이다. 미국이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북미 정상회담을 개최하자는 북측의 요구를 들어주면, 북측도 우라늄 농축을 중단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북미 고위급회담이 진전되어 북측이 우라늄 농축을 중단하는 것은 농축시설을 불능화하거나 폐쇄한다는 뜻이 아니라, 농축시설을 일정기간 멈춘다는 뜻이다. 만일 북측이 우라늄 농축시설을 멈추게 되는 경우, 북측은 미국으로부터 그에 대한 경제적 보상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한반도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북미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북미관계를 정상화하고, 한반도를 비핵화하고, 주한미국군 단계적 철군을 추진하는 것이다. 북미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북미관계를 정상화하고, 한반도를 비핵화하고, 주한미국군을 단계적으로 철군하는 이 모든 정치일정을 시작하는 출발점이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이라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평화협정을 체결하려면 평화회담부터 진행해야 한다. 평화회담을 진행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평화협정을 체결할 수는 없다. 한반도 평화회담은 어떤 형식으로 진행될 것인가?
2009년 1월 11일 북측 외무성은 “조선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기 위한 회담을 시작하자고 정전협정 당사국에 제안”하면서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회담은 9.19 공동성명에 지적된 대로 별도로 진행될 수도 있고 그 성격과 의의로 보아 현쟁 진행 중에 있는 조미회담처럼 조선반도 비핵화를 위한 6자회담의 테두리 내에서 진행될 수도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북측 외무성이 위의 제안을 내놓았던 2009년 1월에 북측은 한반도 평화회담과 6자회담을 각각 병행 추진하는 방안도 생각하고 있었고, 1998년 10월 4자회담에서 합의한 것처럼 한반도 평화회담을 6자회담 안에서 진행하는 방안도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에 와서는 후자보다 전자가 더 실현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05년 9월 19일 제4차 6자회담에서 채택, 발표된 9.19 공동성명에는 “직접 관련 당사국들은 적절한 별도 포럼에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에 관한 협상을 가질 것”이라고 명시되었다.
위의 공동성명 조항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포럼(forum)이라는 말이다. 북측에서는 포럼을 연단이라 한다. 왜 평화회담(peace talks)이 아니고 평화포럼(peace forum)이라 했을까? 평화포럼은 평화회담을 준비하는 임무를 수행할 것으로 보인다. 여러 차례 열릴 평화포럼에서 평화협정 체결문제에 관해 협상하고, 맨 마지막에 한 차례 진행될 평화회담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식으로 한반도 평화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한반도 평화포럼은 언제 열릴 수 있을까? 한반도 평화포럼 개최문제는 이번 북미 고위급회담이 성사되기 이전에 북측과 미국이 이미 논의한 바 있기 때문에 머지않아 열릴 것이다. 한반도 평화포럼 개최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대통령인데, 그는 자신의 친서를 통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한반도 평화포럼을 개최하자고 제안하였다. 그 사연은 이렇다.
보스워즈 특별대표는 6자회담 미국측 수석대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아시아태평양 담당관, 국방부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 부차관보로 구성된 미국 정부대표단을 이끌고 2009년 12월 8일부터 10일까지 평양을 방문하였는데, 그 때 오바마 대통령 친서를 전달하였다. 평양 방문을 마치고 워싱턴에 돌아간 보스워즈 특별대표는 2009년 12월 16일 국무부 출입기자단에게 대표단 방북결과를 설명하면서 “우리는 이 모든 사안들에 대해 논의했고, 특히 평화협정 협상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들에 대해서도 논의했다”고 말했다. 2009년 12월 17일 <통일뉴스>는 남측 외교소식통의 말을 인용하여 “(오바마 대통령의) 친서내용에는 6자회담을 재개하면 한반도 평화포럼을 병행 개최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고 하면서, “(미국이) 어느 정도 6자회담이 진전되면 (한반도 평화포럼을 개최)하겠다는 입장에서 지금은 바로 (개최)하겠다는 것”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자신의 친서에서 밝힌 평화포럼-6자회담 병행추진 방침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전에 부쉬 정부의 대미협상방침을 계승한 것이다. 2006년 5월 콘돌리자 라이스(Condoleezza Rice) 당시 국무장관의 의뢰를 받은 필립 젤리코우(Philip D. Zelikow) 당시 국무부 심의관(Counselor)이 작성하여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제출한 비공개 보고서 ‘젤리코우 보고서’에 6자회담-평화회담 병행추진 방침이 들어 있었다.
한반도 평화포럼은 평화협정 체결을 준비하기 위한 다자실무회담이 될 것이고, 한반도 평화회담은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유관측 정상들이 참석하는 다자정상회담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평화포럼과 평화회담에는 남, 북, 미 3자가 참가할 것인가 아니면 남, 북, 미, 중 4자가 참가할 것인가?
북측은 1990년 5월 31일에 발표한 ‘조선반도에서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조국통일을 위한 평화적 환경을 마련할 데 대하여 -조선반도의 평화를 위한 군축제안’에서 “미국은 조선반도 평화보장의 주되는 당사자인 것만큼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조미회담이나 3자회담에 반드시 나와야 할 것”이라고 명시함으로써 3자 평화회담 개최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또한 2006년 11월 1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 중에 진행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조지 부쉬(George W. Bush)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북측이 핵을 포기하면 코리아전쟁을 종식하고 평화조약을 체결할 수 있다”고 하면서 자신이 노무현 대통령,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함께 만나 평화조약에 서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북측의 군축제안과 부쉬 대통령의 발언을 읽으면, 평화포럼과 평화회담에는 남, 북, 미 3자가 참가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2000년 10월 12일 워싱턴에서 채택, 발표된 북측과 미국의 공동코뮈니케에는 “쌍방은 조선반도에서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1953년의 정전협정을 공고한 평화보장체계로 바꾸어 조선전쟁을 공식 종식시키는 데서 4자회담 등 여러 가지 방도들이 있다는 데 대하여 견해를 같이하였다”고 명시되었다. 또한 2007년 10월 4일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진행한 정상회담에서 채택, 발표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에는 “남과 북은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 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명시되었다. 북미 공동코뮈니케와 10.4 선언에 따르면, 평화포럼과 평화회담에는 3자가 참가할 수도 있고, 4자가 참가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2009년 12월 16일 보스워즈 특별대표는 국무부 출입기자단에게 대표단 방북에 대해 설명하면서 “남, 북, 미, 중 4자가 평화협정 협상에 직접 관련이 있는 것은 분명하며, 그것은 모든 6자회담 당사국들이 이해하고 있는 사안”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2011년 7월 23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 참석한 리용호 외무성 부상은 류전민(劉振民) 중국 외교부 부장조리와 만난 자리에서 남, 북, 미, 중이 참석하는 4자회담을 개최해야 한다고 밝혔다. 시기적으로 가장 늦게 나온 위의 두 정보를 읽으면, 평화포럼과 평화회담에는 4자가 참가하게 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북측이 미국에게 평화협정 체결을 제안한 때로부터 장장 37년이 지났다. 1974년 3월 25일 북측 최고인민회의는 제5기 3차 회의에서 채택한 미국 연방의회에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평화협정 체결을 제안하였다. 그 때부터 37년 동안 북측은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힘써왔다. 지금 그 노력이 결실을 눈앞에 두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