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대처, 미국의 레이건 정부는 노조말살정책을 통해 노동자들을 꺾어놓았고 손쉽게 신자유주의를 도입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노조의 힘이 상대적으로 강해서 신자유주의가 뒤늦게 도입됐다. 노동자들의 힘이 약할수록 서민의 삶이 더 피폐해짐을 알 수 있다.
노동절 122주년과 산적한 노동 현안들
동북아의 문
노동절은 노동자의 단결과 투쟁을 기념하는 날
1886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 미시건 거리에서 8만여 명에 이르는 노동자와 가족들이 파업 집회를 열었다. 이들의 주된 요구는 8시간 노동이었다. 당시 미국의 노동자들은 하루 12~16시간의 고된 노동을 하면서도 허름한 판잣집에서 방세도 내기 어려운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에 미국 정부는 총알 세례로 답했다. 경찰의 무분별한 발포로 노동자 6명이 살해됐는데 여기에는 어린 소녀도 있었다.
사람들의 죽음에 격분한 노동자들은 다음날 헤이마켓 광장에서 30만여 명이 집결한 가운데 집회를 열었다. 그런데 시위 도중 갑자기 폭탄이 터졌고, 집회를 주도한 노동운동가들은 폭동죄로 체포되어 5명이 사형, 3명이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7년이 지나서야 당시 폭탄 테러가 노동자 시위를 막기 위한 자본가들의 조작이었음을 드러났다. 당시 정부와 언론들은 노동자들을 공산주의자로 취급했고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선전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색깔론은 보편적인 현상임을 알 수 있다.
▲헤이마켓 사건을 묘사한 삽화
한편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1889년 7월 파리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 설립대회에서 미국 노동자들의 투쟁을 기념하여 1890년 5월 1일을 <노동자 단결의 날>로 정하고 8시간 노동 보장을 위해 각국 노동자들이 시위를 갖기로 결정했다. 이후 이 날은 노동자의 연대와 단결을 과시하는 국제적 기념일이 되었으며 <노동자의 날>, <메이데이> 등으로 부르게 됐다. 그런데 정작 노동절의 출발이 된 미국은 5월 1일이 사회주의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9월 첫 월요일을 노동절로 지정하였다.
노동절은 정부와 자본가의 착취와 억압에 맞서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단결하고 투쟁하며 국경을 넘어 연대하는 정신을 기리는 날이다. 19세기에 비해 오늘날 노동자들의 처지는 분명 향상됐으나 여전히 노동자들은 빈곤과 억압, 불평등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노동절은 과거의 역사를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현재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여전히 실천해야 하는 그런 날이다.
물론 기득권층은 노동절의 성격을 희석하려고 한다. 한국 정부는 노동절을 <근로자의 날>로 지정했는데 1994년 개정된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에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5월 1일을 근로자의 날로 하고 이 날을 <근로기준법>에 의한 유급휴일로 한다≫고만 하였다. 백과사전을 찾아보면 ≪근로자의 노고를 위로하고 근무의욕을 높이기 위해 제정된 휴일≫이라고 설명한다. 한 마디로 일 열심히 하기 위해 하루 쉬는 날이라는 말이다. 일요일과 뭐가 다른지 알 수 없다. 기득권층이 보기에 노동자는 그저 자신들이 선심 쓰듯 휴일 하루 주면 푹 쉬고 다음날부터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 노예에 불과한 것이다.
▲정부는 근로자의 날에 기업가에게 훈장을 준다
그나마 1994년 이전에는 5월 1일도 아닌 3월 10일을 기념했다. 1957년 이승만 대통령이 ≪메이데이는 공산 괴뢰도당이 선전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으니 반공하는 우리 노동자들이 경축할 수 있는 참된 명절이 제정하라≫고 대한노총(한국노총의 전신)이라는 어용 노동단체에 지시해 대한노총 결성일인 3월 10일을 노동절로 정한 것이다. 이게 박정희 정권 들어서 근로자의 날로 개명되었고 아직까지 이 이름이 유지되고 있다.
노동계 3대 핵심 요구와 3대 현안
노동계는 매년 노동절이 되면 당면 노동 현안을 내걸고 기념행사와 시위를 했다. 올해 민주노총(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노동절을 맞아 ▲비정규직 철폐 ▲정리해고 철폐 ▲노동법 전면 재개정을 3대 핵심 요구로 내걸었으며 또 3대 현안으로 ▲KTX 민영화저지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해결 ▲언론민주화 쟁취로 꼽았다.
▲민주노총 노동절 포스터
한국에 신자유주의가 강제 이식된 후로 비정규직 문제와 정리해고 문제는 노동계를 넘어 사회 전체의 우환거리가 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1년 기준 한국 비정규직 노동자는 599만5000명으로 전체 노동자의 34.2%에 이른다. 그러나 통계 기준에 따라 비정규직 비율은 천차만별이다. 예를 들어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자체 분류기준에 따른 분석 결과에 따르면 2011년 8월 비정규직 비율이 49.2%에 달한다고 한다.
비정규직의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에 불과하며 유급휴가 등 각종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노동절에도 비정규직은 일을 하거나, 무급휴가를 보내야 한다. 또한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살고 있다.
정리해고 문제도 심각하다. 최근에도 여러 기업들이 정리해고를 남발하면서 노동자들을 거리에 내몰고 있다. 예를 들어 2011년 4천억 원의 매출을 기록하며 비약적인 성장을 하고 있는 국내 아웃도어용품 3위 기업 K2코리아는 지난 3월 8일 신발사업부 생산직 노동자 전원을 해고했다. 이 정리해고가 논란이 되자 황당하게도 인도네시아 공장에 노동자들을 배치하는 고용보장안을 제시했다. 10년 이상 일한 50대 노동자들에게 인도네시아에 가서 살든지 알아서 나가든지 선택하라는 것이다. 이런 식의 정리해고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철폐, 정리해고 철폐와 노동기본권 보장, 공공성 강화의 내용을 담은 노동법 개정 10개 법안을 제시하였다. 10개 법안은 ▲파견법 폐지, 직업안정법 개정, 기간제법 개정 ▲최저임금법 개정 ▲노동시간 단축 특별법 제정 ▲근로기준법 개정 ▲고용보험법 개정 ▲노동조합법 전면재개정 ▲정치자금법, 정당법 개정(교사, 공무원 정치기본권 보장) ▲하도급법, 공정거래법 개정 ▲방송법, 미디어랩법 개정 ▲공공기관운영에 관한 법률 개정 등이다. 각각의 구체적인 내용은 민주노총 누리집에서 찾아볼 수 있다.
▲10대 노동법 만화 포스터
경제도 어려운데 왜 파업을 하냐고?
민주노총이 꼽은 3대 현안은 최근 사회적 논란이 되고 있는 사안들이다.
KTX 민영화는 공공부문 민영화의 대표적 사례로 이명박 정부가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는 KTX 민영화는 물론 의료민영화, 산업은행과 우리은행 민영화, 인천공항 매각 등도 추진하고 있다. 특히 수서발 KTX 민영화는 전체 35조 원이 투입된 고속철도 사업에 단지 4천억 원으로 민간 기업이 노른자위 노선을 차지하는 바람에 특혜 논란이 일고 있다. 결국 정부는 민간 기업에 노른자위 노선을 제공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철도공사의 적자는 국민 혈세로 메우려 하는 것이다.
쌍용자동차 사태는 3년이 다 돼가는 오래된 사건임에도 아직까지 희생자가 계속되고 있는 최악의 정리해고 사태다. 지난 2009년 회사 측이 2천7백여 노동자들을 정리해고하면서 시작된 파업, 그리고 무자비한 경찰 진압. 이후 회사 측은 무급휴직자 복귀 등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으며 이 때문에 무급휴직자들은 언제 복직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절망감과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수많은 해고 노동자와 가족이 자살, 사고, 질병으로 목숨을 잃는 가운데 지난 3월 30일 22번째 희생자가 나왔다.
▲쌍용차 희생자가 계속 늘고 있다
언론민주화 역시 심각한 문제다. 사상초유의 방송사, 신문사 파업이 한 달 넘게 진행되고 있다. MBC가 1월 30일 파업을 시작한 이후 KBS 새노조와 YTN 노조, 연합뉴스 노조도 파업을 시작했고, 국민일보 노조는 작년 12월 23일에 이미 파업을 시작했다. 모두 공정보도를 요구하는 파업이다. 이명박 정권은 낙하산 인사, 편집권 침해, 정치사찰과 특정 연예인 출연금지 등 언론장악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 국가정보원 직원이 연예인 쫓아다니며 방송출연 못하게 협박하고 다니는 한심한 세상이 됐다. 민주주의의 기본인 언론자유를 위해 반드시 파업이 성과를 거둬야 한다.
▲방송3사 공동파업 집회
어떤 이들은 경제도 어려운데 노동자들이 참고 양보해야지 왜 자꾸 파업에 시위에 하느냐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이 참고 양보하면 경제가 나아지고 서민들이 더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상식적으로 봐도 노동자들이 참고 양보하면 신나는 건 정부와 재벌 등 기득권층 밖에 없다.
최근의 경제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에 대한 성토가 잇따르고 있다. 거대 독점자본의 무분별한 이익을 보장하는 신자유주의로 인해 서민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경제도 거덜 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가 미국과 영국에서 먼저 시작됐음을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영국의 대처, 미국의 레이건 정부는 노조말살정책을 통해 노동자들을 꺾어놓았고 손쉽게 신자유주의를 도입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노조의 힘이 상대적으로 강해서 신자유주의가 뒤늦게 도입됐다. 노동자들의 힘이 약할수록 서민의 삶이 더 피폐해짐을 알 수 있다.
이명박 정부 들어 노동운동에 대한 국민들의 시각도 많이 변했다. 이제는 많은 이들이 노동자 파업을 보면 덮어놓고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왜 파업을 하는지 알아보고, 또 나아가 지지하기도 한다. SNS와 팟캐스트 등을 통해 그동안 언론이 알려주지 않던 진실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자기 권리를 스스로 지킬 때, 서민의 삶도 윤택해지고 국가도 건강해진다. 노동절 122주년을 맞아 노동운동이 더욱 성장하기를 기대해본다. (20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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