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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독립 투쟁의 역사(6)

토론게시판

by 붉은_달 2012. 2. 20.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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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디리파드(E.M.S. Namboodiripad)

번역 : 이병진(양심수)

[편집자 주: 각주에 원주, 편집자주 등을 밝혔다. 편집자 주는 이병진 동지의 번역문에 대해, 편집부에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추가한 것이다. 이병진 동지의 초역문을 편집부에서 교정을 보고 다시 이병진 동지에게 동의를 구하는 과정을 거치지 못하였는데 문제가 있다면 전적으로 교정자의 책임이다. (최상철 )]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갈 일이 있다. 상층부의 인도 군인들은 영국과 함께 1857-59년 봉기들을 짓밟았고 그들은 봉기를 일으킨 세포이들을 여러 차례 제거하였다. 인도 군대의 도움이 없었다면, 영국은 그 봉기를 진압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쫓겨났을 것이다.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과 민족주의 역사가들이 1857-59년 투쟁을 “최초의 독립투쟁”으로써 규정할 때 바로 그런 진실에 눈을 감는다.

선입견과 편견없이 과학적으로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 앞에는 3가지 중요한 질문들이 제기된다. 첫째, 어떻게 오우드와 그 주변 지역들의 인민들의 봉기에 세포이의 반란이 결합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거의 2년간 영국의 지배에 도전했을까?

둘째, 왜 특정한 지역들을 벗어난 지역들에서 인민의 봉기없이 오직 세포이의 반란만 일어났을까? 여타 지역에서 영국에 저항하는 어떠한 형태의 인민들의 투쟁이 일어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셋째, 왜 다수의 군인들과 시민 대중들이 반란을 시작한 세포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영국을 도왔을까?

이들 세 질문에 답하기 전에 하나는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세포이 반란” 혹은 인민들의 지지와 함께 했고 또 그러지 못했던 1857-59년 투쟁 같은 봉기는 당시 사회에 존재하는 깊은 위기의 지표였다. 모든 혁명들에서 그와 같은 병사들의 봉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레닌의 유명한 용어에 따르면 세포이들 (또는 병사들)은 “제복을 입은 소작농들”이다. 그들의 불만족은 혁명의 국면들에서 사회의 모든 모순들의 정형으로서 드러난다. 바로 그 점이 레닌이 러시아 혁명 전진 과정에서 병사들뿐만 아니라 노동자, 농민들의 혁명조직인 쏘비에뜨(soviets)에 두드러진 위치를 부여한 이유다.

중국, 조선(Korea), 베트남, 쿠바와 같은 근래의 사회주의 혁명들과 여타 역사적 시기들의 모든 혁명들은, 무장된 병사들 사이의 불만족과 그 불만족을 반영하는 봉기들이 핵심 역할을 했다.

인도에서, 영국은 군대를 조직했다. 그것은 인도에 존재했던 모든 형태의 군대조직들과 전혀 다른 성격이었다. 군대 조직들이 인도에 확대될 때까지 그 조직은 봉건 귀족들 아래에 있었다. 그들은 사회와 문화를 포함해서 삶의 모든 영역들을 지배하였다.

황제와 왕이 상층부에, 그 아래에 봉건귀족과 지역 수장들로 구성된 위계적 군대는 인민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들과 인민들 사이의 관계는 군대조직에 역시 반영되었다.

그와 달리, 영국이 만든 군대 조직은 급료와 관료제에 기초한 새로운 종류의 관계로 만들어졌다. 이는 전통적 체제를 깨뜨리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전통적 체제와 달리, 장교와 사병 사이의 관계는 삶의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측면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세포이들은 그들의 선임자들이 정성스럽게 건설한 사회-문화적 제도들과 그 제도들을 이끌었던 지도자들을 파괴하려고 영국의 지배자들이 그들을 이용하려 한다는 점을 인식하였다. 필연적으로 그 점은 그들의 가슴에 분노와 증오심을 일으켰다.

이런 격한 감정이 1806년 최초로 폭발했다. 남쪽의 벨로레(Vellore) 반란은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였지만 그것은 1857-59년의 징후였다. 그 봉기의 뒤를 이어 유사한 성격의 수차례의 작은 봉기가 여러 지역에서 발생하였다. 그것들 각각은 제압되었지만, 그 투쟁들 뒤에 있는 힘, 즉 모순들에 의한 사회적 힘이 존재했다. 그 모순이란 세포이들의 공식적 임무는 외국 지배자들의 도구로써 발포하도록 강제된 것이지만 그들 자신은 매일매일 몰락해가는 인민에 속해있고 바로 같은 외국 지배자들에 의한 착취의 희생물이라는 것이다. 1857-59년 봉기는 그런 힘들의 폭발이었다.

이런 측면을 고려하면, 우리 앞에 또 다시 질문이 제기된다: 왜 1857-59년 봉기는 인도 전체에 퍼지지 않았는가 그리고 왜 그 세포이 자신들과 시민⋅인민들 다수는 오우드와 그 주변 지역들을 제외하고, 영국을 도와주었을까? 그 질문에 대한 자세한 답은 이어지는 장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를 지적한다. 영국이 인도에 권력을 수립하기 전에 인도의 봉건 군사 체제의 고유한 모순이 영국이 군사 조직을 건설하며 생긴 모순보다 훨씬 심각했다. 사실 무굴황제들이 그들 스스로 인도의 지배자들이라고 선언했지만, 무굴황제들 또는 그 보다 앞선 시기에 진정한 “인도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나 군대조직은 없었다. 바로 그 이전 수십년 간 펀자브의 시크, 힌두스탄, 마하라쉬트라, 남인도 등에서 다양한 개별적인 군사 조직과 우두머리가 있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세력을 지배하려고 싸웠다. 외국과 군사동맹과 정치적 관계를 맺은 것은 이러한 싸움의 일환이었다. 맑스의 글에는, “어떻게 영국이  인도에 패권을 수립했는가? 위대한 무갈의 최고 권력은 무갈의 부왕들(副王, Viceroys)에 의해서 붕괴되었다. 마라타(Mahrattas)가 부왕들의 권력을 붕괴시켰다. 마라타의 권력은 아프가니스탄이 붕괴시켰고 이들 모두가 서로를 향해 투쟁하는 중에 영국이 난입했고 그들 모두를 정복할 수 있었다”1)

그러한 정세 또한 1857-59년 사건에 반영되었다. 잔시(Jhansi)의 라니(Rani)2), 나나 사히브(Nana Saheb)3)그리고 여타 공인된 봉기의 지도자들이 있었지만 다른 세력은 자신의 이익을 지키고 대항세력을 패퇴시키려고 영국의 도움을 얻고자 하였다. 그들이 영국에 대항해서 투쟁을 시작했을 때, 그들의 반대자들은 그들을 향해 투쟁하기 위해서 영국의 도움을 구했다. 그러므로 지도자들 스스로가 그렇게 행동했었기 때문에, 평범한 병사들과 낮은 계급의 병사들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영국의 도구처럼 행동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간단히 말해서, 1857-59년 봉기는 새로운 군사조직 그리고 인도에 영국이 통치하는 국가를 세우려는 일의 밑바탕에 있는 사회적 모순들의 폭발이었다. 그리고 봉기의 진압의 이면에는 영국 지배 이전 인도 사회의 고유한 모순이 자리한다. <노사과연>



1) 원주 : On the First Indian War of Independence, op cit. p.33


2) 락슈미바이(Lakshmibai, 1835~1858). 잔시 지역을 다스리던 지방군주의 아내. 라니는 여왕이라는 뜻으로 왕의 부인, 딸, 며느리 등 왕족의 여자들에게 일반적으로 불리는 호칭이다. 락슈미바이는 대영항쟁 중에 전사했다.




3) 귀족출신으로 마라타의 페쉬와(peshwa세습총리)인 바지 라오 2세의 양자로 바지 라오가 죽기 전 자신의 연금을 양도하려 했으나 영국 총독 댈 하우지가 이를 거절한다. 1857년 세포이 항쟁에 합류하여 세포이 항쟁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항쟁 과정에서 사망한다.

 


* 출처 : 노동사회과학연구소 
http://www.lo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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