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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결산② : 북한, 새로운 후계자의 등장

불철주야

by 붉은_달 2011. 2. 14.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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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필자가 구속 상태였던 12월 중순에 쓴 연재글로 사정상 당시 발표하지 못하여 지금 발표합니다.

* 새해도 벌써 한 달 반이 지나가고 있지만 작년 한 해를 돌아보는 것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되어 글을 발표합니다.


12월입니다. 21세기 첫 10년도 어느덧 막을 내리려합니다. 비록 전쟁위기로 어수선하지만 연말에는 1년을 돌아보며 자부심과 긍지도 느끼고, 후회와 반성도 해야 더 나은 1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2010년을 결산해보려 하는데 전체를 다 돌아보기보다는 2010년을 뒤흔든 핵심사건 몇 개를 짚어보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북한의 후계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논란은 많았지만 왠지 본격 논의되기보다는 흐지부지 묻힌 느낌이 들어서입니다.


북한의 후계체제는 당대표자회와 그 전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으로 전 세계에 나타난 인물, 김정은 조선인민군 대장 겸 조선노동당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당 중앙위원회 위원(이하 김정은 부위원장)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들 이 부분에 관심을 모으다보니 정작 당 대표자회에서 가장 중요한 안건으로 다뤄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조선노동당 총비서 재추대 문제에는 큰 비중을 두지 않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실제 당대표자회에서 가장 진지하게 토론하고 가장 오랜 시간을 들여 처리한 안건이 바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당 총비서 재추대 안건이었습니다. 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 체제가 지속된다는 의미입니다. ‘건강이상설’만 믿고 있던 정부와 보수언론들은 인정하기 싫겠지만 말입니다. 당대표자회가 끝나고 10여일 후 열린 조선노동당 창건 65돌 기념행사와 열병식을 본 정부 당국자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두 시간이 넘는 행사 내내 서 있었다며 건강에 큰 이상이 없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또 최근 위키리크스에 공개된 외교 전문에 따르면 ‘김 위원장이 건강이 좋고 정신도 또렷해 모든 것을 통제하는 것 같았다’, ‘매사에 상세한 부분까지 파고들고 카리스마가 있었으며 기억력이 좋은 듯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앞으로도 건재할 것으로 예상되므로 당장 김정일 국방위원장 체제가 변화할 것처럼 호들갑떠는 것은 과잉반응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언론은 그저 사람들의 이목을 끌만한 선정적 보도를 좋아하니 이런 편향이 생기겠지요. 또 한편으론 북한에 정치적 혼란이 생기길 바라는 마음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합니다. 컴퓨터 게임에 중독된 사람들은 게임 속 가상세계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더니, 위키리크스에 공개된 외교관계자들의 발언 - 북한붕괴론을 신봉하는 신자들의 신앙고백 - 을 보면 자신의 희망과 현실을 전혀 구분하지 못하는 망상에 빠져있다는 느낌도 듭니다.


후계자 결정은 어디서 하는가


북한의 후계자와 관련해 국내에서 논란이 된 지점을 살펴보면 ① 후계자 자격이 있는가 ② 가족관계에 따른 세습 아닌가 ③ 공정하고 민주적 절차를 밟았는가로 분류해 볼 수 있으며 추가로 민주노동당은 왜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는가 정도로 꼽을 수 있겠습니다. 이를 하나씩 살펴보기 전에 북한은 후계자와 관련해 어떤 이론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봅시다. 왜냐면 북한이 생각하는 후계자와 우리가 생각하는 후임자는 상당히 다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문제 하나 던져보겠습니다. 후계자란 무엇의 뒤를 잇는 사람일까요?

① 국가 주석    ② 당 총비서    ③ 군 최고사령관


죄송합니다. 함정이었습니다. 후계자는 ‘수령의 후계자’입니다. 주석, 총비서, 최고사령관은 수령의 뒤를 잇기에 자연히 따라오는 지위라고 봐합니다.


문제 하나 더. 수령은 어떤 기구에 명시된 지위일까요?

① 정부    ② 당    ③ 군대


거듭 죄송합니다. 답이 없습니다. 헌법에도, 당 규약에도, 군 지휘체계에도 ‘수령’이란 직책은 규정되지 않았습니다. 즉, 수령은 국민투표로, 대의원총회로도, 자격시험으로도 뽑을 수 없는 특수한 지위입니다. 그럼 어떻게 김일성 주석은 북한에서 ‘수령’이 되었을까요?



잠깐 화제를 돌려봅시다. 흔히 아인슈타인을 천재라고 합니다. 그가 어떻게 천재로 인정받았나요? 독일인들이 투표해서? 국제 물리학회에서 선정해서? 아니죠. 그의 업적을 보고 사람들이 자연스레 인정한 겁니다. 마찬가지로 에릭 홉스봄을 20세기 최고의 석학이라 하는데 어느 대학도 그에게 석학 인증서(?)를 발급해주지 않았습니다. 진보운동 원로들이 모여 시국선언을 할 때 그 ‘원로’는 누가 선정합니까? 나이 65세 이상 진보운동경력 있으면 자동으로 원로가 되는게 아닙니다. 많은 이들에게 존경과 신뢰를 받기에 어디서 투표를 하거나 자격시험을 보거나 하지 않아도 다들 원로로 모시는 것입니다.


이제 감이 잡히죠? ‘수령’은 북한에서 철학적 개념이지 어떤 기구의 직책이 아닙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수령’으로 부르다보니 ‘김일성 수령’이 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수령의 뒤를 잇는 후계자도 어떤 절차를 밟아야 된다는 규정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후계자로 인정해야 후계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번에 김정은 부위원장도 군대와 당에서 대장,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등의 지위를 맡은 것이지 ‘후계자’란 지위를 맡은 게 아닙니다. 그래서 보통 ‘사실상’ 후계자라 표현합니다. 그럼 ‘정식’ 후계자는 언제 되는가. 많은 전문가들이 2012년에 될 것이라 하는데 2012년에 무슨 당 전원회의나 그런 절차를 밟는 게 아니라 북한 주민들이 보편적으로 후계자로 인정할 때 정식 후계자가 되는 것이며 당이나 정부에서 어떤 직책을 맡는 것은 그 다음 문제가 아닐까요?


그럼 북한 주민들은 수령과 후계자를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가. 보통 보수적인 언론들은 북한 당국의 강요와 언론, 문예, 교육기관 등에서 끊임없이 ‘우상화 작업’을 해서 만들어낸 가상의 ‘충성심’만 존재한다고 합니다.


6~70년대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을 떠올려 봅시다. 비판세력을 군대로 짓밟고 곳곳에 정보부 끄나풀을 심어 국민들이 술에 취해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감옥에 끌려갔으며, 방송, 언론은 하루 종일 독재자를 찬양하도록 했고, 학교에서도 유신을 찬양하는 교육을 했습니다. 그래도 국민들은 박정희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부마항쟁으로 그 의지를 보여줬습니다. 강요와 감시, 거짓 선전으로는 국민들의 마음을 돌려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북한은 반세기가 넘는 지금까지도 주민들 속에서 이런 심각한 조짐이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4.19, 5.18, 6월 항쟁 등 정권의 기반을 뒤흔든 항거가 잇따른 한국과 달리 북한은 3세대가 지나도록 너무 조용합니다. 반정으로 점철된 조선의 역사를 봐도 우리 민족의 기질이 이렇게 소심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닐까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별도로 북한 주민들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수령과 후계자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다고 보는 게 현실에서 더 타당해 보입니다. 김정은 부위원장에 대해선 아직 알려진 바가 없으니 지금 판단하는 건 성급합니다. 다만 언론에선 북한에서 이번 후계자 선정을 반대하는 움직임이 발생했다고 종종 보도하는데 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후계자로 등장했을 때도 끊임없이 나오던 얘기라 어느 정도 신빙성 있는지, 영향력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쯤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논란의 한 복판에 뛰어들어 봅시다.


후계자가 어떤 인물인지 얼마나 알고 있는가


첫째, 후계자 자격이 있는가. 여기선 보통 경력이 없다, 나이가 어리다, 검증되지 않았다는 주장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전에 이렇게 단정할 만큼 정보라도 습득했는지 의문입니다. 1년전 까지도 정확한 이름을 몰라 헤매지 않았던가요?


물론 지금 공개된 정보만으로도 위의 주장들은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일단 김정은 부위원장의 경력으로 알려진 건 김일성종합군사대학과 김일성종합대학 물리학과를 나왔다는 정도입니다. 스위스 유학설이 있는데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일선 포병부대에서 군복무를 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언론이 ‘군 경력이 없는데 대장이 됐다’고 합니다. 김일성종합군사대학은 우리의 사관학교 같은 곳입니다. 사관학교 졸업하고 장교가 된 겁니다. 파격승진이긴 하지만 군 경력이 없다고 하는 건 분명 오류입니다. 그렇게 분명한 사실을 무시하다가 연평도에서 포격을 당한 것 아닙니까? 서해에서 대규모 포사격 훈련이 늘어난 게 포병부대 근무설에 힘을 실어주는 측면도 있습니다. 또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정치학과 같은 학과가 아닌 물리학과를 나온 것도 인상적입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핵, 미사일 개발과 연관 지어 보기도 합니다.



김정은 부위원장의 현재 나이는 29세가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듯합니다. 29세면 너무 젊다는 게 중론입니다. 하지만 이는 상대적인 것 아닐까 싶습니다. 대체로 29세면 사회에 나가 한창 자리 잡기 위해 아등바등할 나이이긴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닙니다. 광저우 아시아경기대회를 보니 10대에 이미 금메달을 딴 이들이 즐비합니다. 수학자들은 나이 30을 넘기면 수학자로서의 생명이 끝났다고 봅니다. 제 주변에 29세에 이미 대학교수가 된 이들도 있습니다. 옛날에 남이장군은 또 뭐라고 했더라. 북한 입장에서 봅시다. 김일성 주석은 20대에 이미 반일운동을 시작하여 ‘건설동지사’란 당조직과 ‘조선혁명군’이란 군조직을 건설했다고 합니다. 북한 입장에서는 나이가 너무 어려 자격이 없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기 힘들 듯 합니다.


또 검증 문제와 관련해서는 검증을 했는지 안했는지 알 수 없으므로 이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건 소모적일 듯합니다.


결론내리자면 후계자 자격이 있는지 따지기 전에 정보부터 수집하자는 겁니다. 장님들이 모여서 코끼리가 기둥 같다, 뱀 같다, 사자 같다 백날 싸워도 승부는 나지 않는 법입니다. 자격이 있다는 증거도, 없다는 증거도 부족한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건 바로 검증된 정보겠지요. 그리고 북한이 우리를 위해 자격이 있다는 증명서를 발급해줄 리 없다는 점도 명심해야겠습니다.


혈연관계에 있는 후계자, 우연인가 필연인가


두 번째로 넘어가 봅시다. 혈연 때문에 후계자가 된 것 아니냐는 주장인데 거꾸로 혈연관계면 후계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지 생각해볼 필요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자격이 있느냐, 최선의 선택이냐지 혈연관계가 아닙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것처럼 자격이 있는지 판단할 근거가 없으니 혈연만으로 후계자가 되었다고 단정할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논리적 판단에 앞서 많은 이들이 ‘왜 하필이면 아들인가’라는 의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후계자를 선정한다면 당연히 ‘장자’를 선택할 텐데 삼남으로 알려진 김정은 부위원장을 선택한 걸 보면 나름 선정의 기준과 검증과정이 있었으리라 추측도 가능합니다.


저는 이 문제를 파악하려면 자본주의 사회, 그중에서도 기형적이고 천민적인 자본주의 사회로 인한 평균주의라는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제 하나 또 던져봅니다. 한국사회에서 성공하려면 뭐가 가장 중요할까요?

① 돈 많은 부모 만나기    ② 줄 잘 서기

③ 실력 쌓기    ④ 성공에 대한 집념


뭐 정답이 있는 문제는 아니겠지만 솔직한 생각을 이야기해봅시다. 일단 부모 잘 만나서 많은 ‘투자’를 받아야겠죠. 원정출산, 조기유학, 고액과외... 그러면 바보가 아닌 이상 좋은 학벌을 거머쥡니다. 그 다음에 줄을 잘 서야죠. 권력이든 재력이든 힘 있는 자에게 잘 보여서 후원을 받아야 합니다. 투자한 만큼 뽑아낼 수 있는 법이죠. 그런데 이것 역시 부모를 잘 만나면 쉽게 해결됩니다. 삼성의 새 사장단을 보면 확실합니다. 이재용 이부진 남매가 나란히 사장이 되었더군요. 아들에게 실력이 있을까요? 저는 기본 실력은 있으리라 봅니다. 돈만 있으면 누구나 양질의 교육을 통해 기본 실력은 갖출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공을 향한 집념은 돈으로도 안 되더군요. 아무튼 이런 사회에서 평범한 서민들이 성공하려면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습니다. 언론은 가끔 나오는 개천 출신 용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마치 서민들에게도 기회가 열려있는 공정한 사회인 것처럼 포장하지만 이젠 그런 걸 믿는 이들도 별로 없어 보입니다.


자, 이런 사회에서 살다보니 사람들은 ‘공정사회’를 희망하게 됩니다. 불공정에 대한 분노가 매우 큽니다. 공정사회라면 모두에게 균등한 기회가 주어지며 공정한 규칙이 작동하는 사회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집착하여 과도하게 적용하면 엉뚱한 결과로 빠지게 됩니다. 전형적인 오류가 바로 기회의 평등을 능력의 평등으로 확장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질과 능력, 기질과 성격은 다릅니다. 사람마다 장단점이 있고 어울리는 자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선천적인 측면과 후천적 측면이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부모의 유전자를 물려받습니다. 유전자는 외모는 물론 지적, 육체적 능력에도 영향을 줍니다. 그리고 어려서 부모를 보며 자라면서 부모의 기질과 성격도 배우게 되고 부모의 능력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학자 집안에서 학자 나고, 예술인 집안에서 예술인 나고, 체육인 집안에서 체육인이 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불평등하다, 불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게 잘못된 모습이라고 해버리면 사람이 다 똑같고 개성도 사라진 사회가 되지 않을까요?


멀리 돌아왔는데 북한이 원하는 수령의 상이 김일성 주석이라면 다음 세대에서 수령의 상을 가진 인물을 찾으려면 김일성 주석의 자녀에게서 찾는 것이 가장 쉽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한 가족으로 살았으니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일성 주석을 가장 많이 닮으리란 것은 상식입니다. 따라서 북한이 김일성 주석과 같은 자질, 능력, 성품을 가진 인물을 후계자로 세우고자 한다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선택하는 게 유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 세대가 지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가장 잘 계승할 사람을 찾는다면 역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자녀 중에서 찾는 게 가장 유리했으리라 봅니다. 이렇게 보면 수령의 후계자는 수령의 혈육 가운데서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후계에 대한 입장보다 입장발표를 강요하는 의도가 더 궁금하다


세 번째 논란은 뭐였죠? 절차군요. 그런데 앞서 살펴본 것처럼 후계자는 어떤 절차를 밟아서 선정되는 게 아니다보니 여기서의 절차문제는 김정은 부위원장의 세 가지 직책, 즉 조선인민군 대장, 조선노동당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공정한 철자를 밟고 수여된 것인가를 논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런데 절차상 문제로 드러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두 북한의 당, 군 규약 등에 따라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부분은 논란거리로 보기는 어렵겠습니다.


이제 마지막 논란으로 넘어갑시다. 민주노동당은 왜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는가라는 주제인데 사실 민주노동당은 입장을 밝혔습니다. 국민들이 이해하기 어렵지만 남북관계를 고려할 때 굳이 입장을 밝히는 건 부적절하다는 것이지요. 남북관계는 통일을 앞두고 두 개 정부가 존재하는 특수한 관계입니다. 서로의 내정을 간섭하면 갈등이 생기고 다툼으로 이어집니다. 갈등이 무서워 모른 척 하는 게 옳은가 물을지 모르겠는데 모른 척 하는 게 옳습니다. 미국이 세계 여러 나라의 인권문제에 간섭하는 이유가 뭘까요? 인권이 소중하니까? 아니죠. 인권이 소중하다면 고문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부시 전 대통령을 가만두지 않겠죠. 내정간섭은 아무리 미화해도 자국의 이익을 위해 타국을 공격하는 행위입니다.


만약 한국이 북한 정치체제를 비난한다면 북한도 마찬가지로 한국 정치체제를 비난하고 나설 것입니다. 남측 국민들이 보기에 북한 정치체제가 남측상식에 맞지 않는 것처럼 북한주민들이 보기에도 한국정치체제가 북한상식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한국에 지금의 정치체제가 정착된 건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세계 각국은 다 저마다의 독특한 정치체제가 있고 다 장단점이 있습니다. 어쨌든 남북이 서로 비난하고 나면 뭐가 바뀌나요? 누구에게 어떤 이익이 있죠? 제가 볼 땐 민주노동당의 입장이 당시로선 가장 현명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사실 이 입장은 미국정부와도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국민이 원하니까 정당은 입장을 밝힐 의무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 논리도 이상하지만 여론조사 결과 국민 다수는 입장을 밝히지 않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니 그 주장의 전제도 틀렸습니다. 국민들은 대체로 현명하게 판단하지요.


제가 궁금한 건 북한의 후계 문제에 대한 입장이 아니라 입장발표를 강요하는 이들의 의도가 뭐냐는 것입니다. 왜 마녀사냥하듯, 종교재판하듯 물고 늘어지냐는 거죠. 아마 민주노동당이 북한을 비난하는 한 마디를 듣고 싶어하는 이들이 있는 듯합니다. 왜 이 문제에 집착할까요? 저는 진보세력 내 주도권 다툼이 아닌가 추측합니다. 지금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진보를 표방하는 정치세력들 내 일부에서 통합논의가 있습니다. 문성근씨가 관여하는 ‘백만민란’은 아예 민주당까지 포괄하여 야당통합을 추진하기도 합니다. 통합이 가시화될수록 보이지 않는 주도권 다툼이 증가하겠지요. 그런데 진보정당 가운데 현재 가장 영향력 있고 역량이 큰 정당은 민주노동당입니다. 그러니 비 민주노동당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민주노동당을 공격해야 자신들의 주도권이 커진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발 제 추측이 틀리기를 바랍니다. 이런 식의 주도권 다툼은 별로 진보적 모습이 아니니까요.


제가 구속되기 전에 후계자 문제와 관련해 몇 차례의 강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보통 강연 제목을 ‘후계문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렇게 잡던데 한번은 좀 역설적이긴 하지만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이해하지 마라, 남들 이해시키지도 마라.” 과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후계자로 공식화됐을 때도 많은 이들이 이해하지 못했고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문제로 떠드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내가 이해하든 못하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미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이며 북한을 움직이는 최고지도자가 되었으며 한국의 대통령 두 분과 정상회담을 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지금의 후계자 논란도 일 년도 못 가 잠잠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에겐 더 생산적인 고민과 토론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김정은 부위원장은 어떤 인물이며 앞으로 북한은 어떤 행보를 가질 것인가, 남북관계와 국제질서에 어떤 영향을 줄까, 이런 주제로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열리길 기대해봅니다.


끝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조선노동당 총비서로 추대되던 1997년에 2학년 후배가 선전물에 쓴 글을 인용해봅니다. 선배들과 한 마디 토론도 없이 자기 생각을 쓴 것이라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누구의 아들이냐에 관심가질 일이 아니라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느냐, 앞으로 북한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 것이냐에 관심을 돌려야 한다. 그게 우리에겐 더 중요하니까.”

2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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