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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평화협정으로 가는 길>1. 정전협정 어떻게 체결됐나

불철주야

by 붉은_달 2013. 7. 29.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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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평화협정으로 가는 길

 

* 이 글은 참교육학부모회 동북부지회 소식지에 연재한 글입니다.

 

1. 정전협정 어떻게 체결됐나

2. 정전협정 어떻게 파괴됐나

3. 평화협정 어떻게 논의되어 왔나 (1)

4. 평화협정 어떻게 논의되어 왔나 (2)

5. 평화협정에 대한 몇 가지 논쟁 지점들

 

올해는 정전협정 체결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보수언론들은 청소년들이 한국전쟁 발발일을 모른다며 역사교육이 어떻고 안보관이 어떻고 개탄합니다. 하지만 전쟁 발발만큼이나 중요한 전쟁 중단에 대해서는 대다수 사람들이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습는다. 정전협정 체결일이 몇 일인지는커녕 몇 년인지조차 모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1953727일 체결된 정전협정은 지금까지 한반도 질서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합의입니다. 그리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기 위한 시도 역시 60년 동안 계속되어 왔습니다. 한반도 질서를 이해하고 예측하기 위해서는 정전협정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에 정전협정이 어떻게 체결되었고, 어떤 내용이며, 어떻게 파괴되었는지, 그리고 평화협정 논의는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연재를 하려고 합니다.

 

1. 정전협정 어떻게 체결됐나

 

흔히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정전협상은 한국전쟁이 시작된 지 1년이 지나고 곧바로 시작되어 장장 2년이 넘게 진행되었습니다. 전체 전쟁기간의 2/3가 회담기간이었던 셈입니다.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살펴보면 흥미로운 결론을 얻게 됩니다. 일단 정전협상이 왜 시작됐는지부터 살펴봅시다.

1950년 시작된 한국전쟁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38선을 중심으로 고착국면으로 넘어갔습니다. 지리한 소모전이 계속되면서 전쟁 당사자와 유관국들은 군사적 방법이 아닌 정치적 해법을 찾기 시작합니다.

정전협상을 먼저 꺼내든 것은 미국이었습니다. 1950년 가을, 맥아더 당시 유엔군 사령관은 추수감사절(1123)까지 전쟁을 끝내겠다며 추수감사절 공세를 개시했다가 대패합니다. 그러나 전황을 여전히 낙관한 맥아더 사령관은 다시 크리스마스 공세를 명령합니다. 청천강과 장진호 등에서 엄청난 손실을 입은 다음에야 맥아더 사령관은 철수 명령을 내렸고 눈보라 휘날리는 흥남 부두의 철수가 시작됩니다.

두 차례 대공세가 실패하자 유엔군은 정전협상을 시작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합니다. 미국과 소련 사이의 물밑 접촉 끝에 유엔사무총장과 소련, 유엔군이 각각 협상을 제안하고 북한과 중국이 이에 동의하면서 정전협상이 시작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협상을 반대했지만 한반도 문제에서 한국 정부는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1951710일 개성에서 첫 본회담이 열렸고 이 때 부터 장장 748일의 정전협상이 계속됩니다.

정전협상 과정에서 두 사안이 첨예하게 맞붙었습니다. 하나는 군사분계선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포로교환 문제였습니다.

군사분계선과 관련해 유엔군은 당시 군사 대치선에서 북쪽으로 더 올라가 군사분계선을 설정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육군에 비해 자신들의 공군력과 해군력이 더 우세하다는 이유를 들었습니다. 북한군은 전쟁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원칙을 내세우며 원래 경계선이던 38선을 군사분계선으로 만들자고 주장했습니다.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미국은 협상을 중단하고 무력 대응으로 방향을 전환합니다. 당시 유엔군은 원산까지 진격하기 위한 교두보 마련을 위해 강원 양구 1211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군사력을 집중했습니다. 그러나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130여 회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8천여 전사자만 남긴 채 철수해야 했습니다.

1211고지 전투의 패배, 미국 내 반전여론, 동맹국들의 요구에 밀려 결국 미국은 자신들의 주장을 철회하고 육상 군사 대치선을 기준으로 군사분계선을 설정하는 데 합의합니다. 당시 육상 군사 대치선은 38선과 거의 일치했기에 북한군도 이에 동의합니다.

군사분계선 문제가 일단락되자 포로교환 문제에서 다시 난관이 발생했습니다. 북한군은 제네바협약에 따라 포로를 전원 교환하자고 했고, 미군은 포로 개인의 뜻에 따른 자유송환을 하자고 주장했습니다. 미국은 이대로 정전협정이 체결되는 게 패배로 인식될 수 있고, 전원 송환을 하면 공산권을 독재사회로 묘사해 온 심리전에도 문제가 된다는 이유였습니다.

이 와중에 미국은 대통령 선거를 치렀고 한국전쟁을 조기에 끝내겠다고 나선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당선됐습니다. 이에 맞춰 새로 임명된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은 지지부진한 협상을 중단하고 힘으로 밀어붙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규모 공습을 시작합니다. 전쟁범죄 논란을 빚으며 발전소와 민간주거지 등을 집중 폭격했지만 북한군은 동요하지 않았고, 결국 유엔군은 정전협상 휴회를 선언하고 퇴장해버렸습니다.

전장에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동맹국들의 지원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생각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강원도 감자고지를 대상으로 갈기작전을 준비합니다. 1953125일 미군은 동맹국 고관들과 기자들까지 초청해 새로운 전투 시나리오에 맞춰 감자고지에 대한 엄청난 화력을 쏟아 붓습니다. 그러나 이 작전을 사전에 감지한 북한군은 역공을 펼쳐 대승을 거두고 미군은 엄청난 비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북한군은 이 전투를 정형고지 전투라 부릅니다.

전투를 지속할 동력을 잃은 미군은 426일 정전협상을 재개합니다. 송환을 원치 않는 포로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쟁점이었는데, 북한군은 중립국송환위원회에 넘겨 6개월 동안 소속국가와 면담하는 안을 제시했고 유엔군은 남한지역 출신 포로들을 일반인의 신분으로 석방하는 안을 제시했습니다.

협상이 다시 결렬되자 북한군은 19535월 중순~7월 하순에 걸쳐 3차례 공세를 펼칩니다. 특히 7월에 있었던 중부전선 금성전투에서 유엔군은 5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주요고지를 빼앗기는 등 막대한 손실을 입었습니다.

결국 유엔군은 북한의 입장을 수용하는 대신 면담 기간을 3개월로 단축하기로 합의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크게 반발하면서 618~19일 이른바 반공포로 석방 사건을 일으킵니다. 당황한 미국은 한국군을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켜 이승만 대통령을 몰아내려는 에버레디(Everready) 작전계획을 세웠다가 방위조약을 체결해주면서 달래는 선으로 마무리합니다.

이렇게 하여 1953727, 마침내 유엔군과 북한군, 중국인민지원군 사이에 정전협상이 체결되고 모든 전투행위가 중단되었습니다.

기나긴 협상 과정을 통해 몇 가지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한국전쟁의 주체는 미군과 북한군, 중국인민지원군이라는 사실입니다. 정전협정문에는 유엔군 사령관의 서명이 들어갔지만 사실 유엔군은 미군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유엔 결정이 나기 전에 미국 대통령의 동의 아래 38선을 돌파해 북진한 것이나, 정전협상 개시 전에 유엔 사무총장이 미국은 유엔 총회나 안보리의 추가적인 허가나 지침 없이 정전이나 휴전협정을 체결할 권리를 갖는다고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미군은 전황이 불리할 때 협상에 돌입했고, 협상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꺾었다는 점입니다. 19516월까지 미국은 78,800명의 인명손실, 100억 달러를 상회하는 전쟁비용을 감당해야 했는데 이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첫 1년 동안 입은 손실의 두 배가 넘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미국을 정전협상장에 가도록 만들었습니다. 협상 과정에서도 전투에서 대패할 때마다 쟁점들에 대해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클라우제비츠가 전쟁론에서 전쟁은 외교의 연장이라고 한 지적과 일치합니다.

셋째, 미국은 정권이 바뀌면 협상보다 무력 사용을 선호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새 정권의 위력을 과시하려는 욕심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런 모습은 90년대부터 이어진 북미핵대결 과정에서도 반복됩니다. 미국 대선이 끝나면 원점으로 돌아가는 핵협상의 모습과, 트루먼에서 아이젠하워로 바뀌고 협상이 중단된 모습은 상당히 유사합니다.

넷째, 이승만 정부는 정전협상을 반대하고 전쟁을 통한 무력통일을 추진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전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거나, 전황을 알면서도 승전 가능성과 무관하게 별도의 정치적 목적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반공반북을 기본으로 하는 자신의 정치적 지지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판단을 내렸겠지요. 이후 한국 정권들도 북미 대화의 시기마다 대북 강경 행보를 반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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