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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하지만 다른 중국과 북한의 핵노선

불철주야

by 붉은_달 2013. 6. 2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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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지난 3월 7일 외무성 대변인 성명을 통해 ≪침략자들의 본거지들에 대한 핵선제타격권리를 행사≫할 수 있음을 경고했다. 미국이 핵공격을 하려 하므로 미 본토를 미리 선제핵공격하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중국과 다른 북한의 노선을 <적극적 핵무장론>이라고 할 수 있겠다.


비슷하지만 다른 중국과 북한의 핵노선


동북아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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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31일 북한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경제건설과 핵무력 건설의 병진노선>을 결정하였다. 미국과 군사적 대치를 하는 속에서 경제건설도 해야 하는 북한은 이미 1962년 12월 <경제건설과 국방건설의 병진노선>을 채택한 적이 있다. 이번에 새롭게 결정한 병진노선의 특징은 핵무기 개발을 통해 <전쟁억지력>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면서 동시에 국방비를 절약해 경제건설에 투입하겠다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리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은 새 병진노선을 계기로 핵무기 생산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박근혜 대통령은 5월 23일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존 햄리 소장 일행을 만난 자리에서 북한의 경제-핵 병진노선을 ≪새로운 도박≫이라고 평가하며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북한의 핵무기 증산을 막을 수 있는 실질적 수단이 없다는 점이 문제다. 군사적 위협, 경제봉쇄, 주변국을 통한 외교적 압박 모두 무용지물이라는 게 지난 북미 핵대결의 교훈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CSIS 대표단을 접견하고 있다


처음 핵실험을 한 2006년에서 7년이 지나 새로운 핵개발 노선을 채택하면서 북한이 과연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인지 주목된다. 60년대에 핵보유국이 된 중국의 사례는 이런 궁금증을 해결하는 데 참고가 될 것이다.


중국이 핵무기를 개발한 이유


중국은 1964년 10월 16일 오후 3시에 첫 핵실험을 하였다. 이로써 중국은 5번째 핵보유국이 되었다. 앞선 4개 나라는 미국(1945년), 소련(1949년), 영국(1952년), 프랑스(1960년)다. (※괄호 안은 첫 핵실험 년도)



▲중국이 첫 핵실험을 한 고비사막


중국은 핵실험 당일 장문의 정부 성명을 통해 자신들이 왜 핵보유국이 되려하는지 설명했다. 그 내용의 일부를 발췌해보면 다음과 같다.


≪날로 늘어나는 미국의 핵위협을 마주하여 중국은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다. 중국이 핵실험을 진행하고 핵무기를 발전시키는 것은 핍박에 못 이겨서다.≫


≪미국의 핵잠수함이 일본에 진주하여 일본인민, 중국인민과 아시아 여러 나라 인민들을 직접 위협한다.≫


≪중국이 핵무기를 발전시키는 것은 곧바로 핵대국의 핵독점을 깨뜨리고 핵무기를 소멸하기 위해서이다.≫


≪중국정부는 정중히 선포하는바, 중국은 그 어떤 시각, 그 어떤 상황에서도 먼저 핵무기를 쓰지 않을 것이다.≫


≪중국의 핵무기장악은 투쟁 중의 여러 나라 혁명인민들에게 커다란 고무로 되고, 세계평화수호사업에 대한 거대한 기여로 된다.≫


≪일단 그들(미국과 동맹국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도 (핵무기가) 있으면 그들은 그처럼 우쭐거리지 못하고, 핵협잡과 핵위협 정책이 그처럼 잘 통하지 못하며, 핵무기의 전면금지, 철저파기 가능성도 늘어난다.≫


≪세계 여러 나라 수반회의를 소집하여 핵무기의 전면적인 금지와 철저한 파기문제를 토의하자.≫


≪중국정부는 예나 다름없이 모든 노력을 기울여 국제협상을 통해 핵무기의 전면금지, 철저파기라는 숭고한 목표가 실현되도록 촉진할 것이다. 이 날이 다가오기 전에는 중국정부와 중국인민은 흔들림 없이 자기의 길을 걸으면서 국방을 강화하고 조국을 보위하며 세계평화를 수호할 것이다.≫


중국 정부 성명 내용은 놀랍게도 북한의 입장과 매우 유사하다. ▲핵무기 개발 배경이 미국의 핵위협이라는 점 ▲핵무기 개발 목적이 전 세계 비핵화라는 점 ▲전 세계 비핵화를 위한 회의를 요구한 점 ▲자신의 핵보유가 약소국의 평화에 기여한다는 점 ▲전 세계 비핵화 전까지는 핵무기를 계속 보유하겠다는 점 등 많은 부분에서 60년대 중국과 지금의 북한은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다.


핵보유국이 된 중국의 변화


중국이 핵보유국이 되는 과정, 그리고 핵보유국이 된 후 중국의 국제 위상이나 미국과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중국은 1955년 중국 공산당 중앙서기처 확대회의 결정을 통해 핵무기 개발에 뛰어들었다. 중국의 핵실험이 임박하자 기존 핵보유국들은 중국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1963년 미국, 영국, 소련은 <대기권 내, 우주공간 및 수중에서 핵무기 실험을 금지하는 조약>(부분적 핵실험 금지 조약)을 체결하여 지하 핵실험을 제외한 사실상 모든 핵실험을 금지하였다. 1964년 핵실험 직전에는 미국 맥나마라 국방장관이 핵개발 장소인 신장 위구르 지역은 물론 수도 베이징에 대한 공중폭격도 불사하겠다며 3차 세계대전 발발 가능성까지 언급했다.(통일뉴스, <중국 핵개발과 북한 핵개발에 대한 비교단상>, 정기열, 2009.6.15.)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


기존 핵보유국들의 압박에도 중국은 1964년 10월 첫 핵실험에 성공한다. 그리고 3년 후인 1967년에는 수소폭탄 실험에도 성공한다. 1970년에는 인공위성 발사도 성공해 대륙간탄도미사일 기술을 보유했음을 보여주었으며 1972년에는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훈련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소련과 미국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다. 소련은 전부터 중국과 노선갈등을 빚고 있었는데 중국의 핵실험에 반대하며 중국을 더욱 압박했다. 나아가 1969년에는 국경 분쟁까지 벌였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 내에서 주도권 싸움을 벌인 것이다. 소련은 핵개발을 통해 중국의 국제 지위가 올라가면 <사회주의 종주국>으로서의 자신의 지위가 위협받을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당시 마오쩌뚱 중국 주석은 ≪미국보다 오히려 소련을 더 싫어했다≫고 한다. 마치 북한 핵보유를 반대하는 지금 중국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미국은 소련과 달리 대화를 통한 평화공존을 선택했다. 1971년 키신저 당시 미 국무장관이 극비리에 베이징을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1972년 이른바 <핑퐁외교>, 1973년 닉슨의 중국방문으로 중국과 미국은 관계정상화의 길을 걸었다.



▲마오쩌뚱-닉슨 정상회담


중국은 미국에게 세 가지 요구사항을 가지고 있었다. 대만을 인정하지 말고 자신을 인정할 것, 대만 주둔 미군을 철수할 것, 대만과 군사동맹을 파기할 것, 이렇게 세 가지를 주되게 요구했다.


첫 번째는 곧바로 실현됐다. 1971년 10월 유엔총회에서 중국의 유엔 가입이 승인됐고 대만은 축출됐다. 중국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었다. 그러자 눈치를 보던 일본이 미국보다 먼저 중국과 손을 잡았다. 1972년 9월 29일 중국과 일본은 전격적으로 수교를 맺었다.


나머지 요구는 시간이 걸렸다. 미국 내에서 반발이 심했기 때문이다. 특히 대만에 무기를 수출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미 군수업체와 공화당이 격렬히 반대했다.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당시 대선 후보는 선거 기간 내내 중국과 관계정상화를 반대했으며 베리 골드워터 공화당 상원의원은 카터 행정부를 대법원에 제소하기까지 했다.


결국 1979년에야 대만 주둔 미군이 철수하고 상호방위조약도 폐기했으며 중-미 수교도 이루어졌다.


이처럼 중국은 핵개발을 통해 자신들이 요구하던 미국과 관계정상화를 했을 뿐 아니라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었고 대만에서 미군을 철수시키고 <통일>(대만은 정부로 인정받지 못하므로 중국은 형식적으로 분단 상태가 아니다)을 할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며 마오쩌뚱 주석은 ≪핵개발은 미국, 서방의 문을 여는데 있어 최고의 방법≫이라고 평가했다.


중국의 경험을 잘 알고 있는 북한 역시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이 반대한다고 해도 핵보유국의 지위를 끝까지 요구하며 미국과 관계정상화를 이루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려 할 것이다.


소극적 핵무장론, 적극적 핵무장론


하지만 중국과 북한의 핵노선에는 차이점도 존재한다.


앞서 발췌한 중국 정부 성명에 따르면 중국은 ≪그 어떤 시각, 그 어떤 상황에서도 먼저 핵무기를 쓰지 않을 것≫이라는 원칙을 스스로 설정했다. 즉, 설사 핵보유국과 전쟁을 할 때에도 상대가 먼저 핵으로 공격하지 않는 이상 자신도 핵으로 상대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를 <소극적 핵무장론>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실제로 중국은 상대의 핵공격을 억제할 정도의 핵무기만 보유한 채 핵무기 증산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미국과학자연맹(FAS)이 추정한 데 따르면 2013년 초 기준 핵무기 보유량은 러시아가 8500개, 미국이 7700개, 프랑스가 300개, 중국이 250개, 영국이 225개 순이다. 러시아와 미국을 제외한 나라들은 2~300개의 핵무기만 보유하고 있는데 이정도로도 충분히 핵 억제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핵보유국들의 핵무기 보유량(*미국과학자연맹 홈페이지)


그러나 북한의 핵노선은 다르다. 북한은 지난 3월 7일 외무성 대변인 성명을 통해 ≪침략자들의 본거지들에 대한 핵선제타격권리를 행사≫할 수 있음을 경고했다. 이는 그동안 한국이나 미국이 공격하면 그에 대응하여 반격하겠다는 주장과는 전혀 다른 경고다. 미국이 핵공격을 하려 하므로 미 본토를 미리 선제핵공격하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중국과 다른 북한의 노선을 <적극적 핵무장론>이라고 할 수 있겠다.


북한이 중국과 달리 <적극적 핵무장론>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중국에 비해 북한은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은 중국에 비해 인구도 적고, 땅도 좁다. 중국과 똑같이 해서는 미국에게 무시를 당하기 십상이다. 중국보다 더 강하고 적극적으로 나서야 미국을 움직일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북한의 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북한의 지도사상은 주체사상이며 여기서 <속도전> 개념이 나온다. 북한은 천리마 운동부터 시작해서 <평양속도>, <비날론속도>, <강선속도>, <희천속도>에 이어 최근의 <마식령속도>까지 속도를 매우 중시 여기고 있다. 북한은 어떤 일을 할 때 힘을 집중해 전격전, 섬멸전, 공격전, 입체전의 방식으로 하면 속도를 높일 수 있으며 이것이 가장 우월한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선군정치가 정립된 후 <단숨에의 공격정신>과 같은 군인정신이 강조되고 있다.


이런 북한의 사상, 기질은 중국의 만만디(慢慢地)와 큰 차이가 있다. 북한은 <어차피 핵무기를 만들어야 한다면 적당히 만들어 핵위협만 막을 게 아니라 압도적으로 많이 만들어 아예 미국을 굴복시켜야 한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핵무기 증산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여길 것이다.


<적극적 핵무장론>에 따라 북한은 핵무기 증산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세계 최대 우라늄 매장국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산하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세계 우라늄 총매장량을 474만 3천 톤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대한상공회의소가 2007년 11월 펴낸 자료집에는 북한의 우라늄 매장량이 2600만 톤이며 채굴 가능한 우라늄만 400만 톤이라고 한다. 우라늄 농축 시설만 있으면 세계 최대 핵보유국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의 핵물리학자인 지그프리드 헤커 박사는 2010년 11월 북한의 우라늄 농축 시설을 둘러본 후 방북 보고서에서 ≪(연간) 최대 40kg의 고농축 우라늄을 제조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영변에 공개된 농축 시설 외에 비공개 지하 농축 시설이 있다면 연간 제조량은 훨씬 늘어날 것이다. 참고로 4.5kg 정도의 고농축 우라늄만 있으면 소형 핵탄두 하나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북한의 끝없는 핵무기 증산에 과연 미국은 어떻게 대응할지 궁금하다. (2013.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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