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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까모의 실체와 실패한 미국의 급변공작

불철주야

by 붉은_달 2012. 8. 7.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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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이미 지난 7월 25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우리에게는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문제를 푸는 방법도 있고 조선반도에서 전쟁의 화근을 송두리째 들어내어 항구적인 평화를 실현하는 방법도 있다≫며 ≪선택은 미국이 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미국이 어떤 선택을 하던 자신의 행동에는 응당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동까모의 실체와 실패한 미국의 급변공작


동북아의 문
http://namoon.tistory.com


지난 7월 16일 북한 조국평화통일의원회(조평통)가 대변인 성명을 통해 이명박 정부와 미국 정부의 지령을 받고 북한에 침투한 테러범을 체포했다고 밝히면서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북한은 이 테러범이 미국과 한국 정보기관의 돈을 받고 북한에 침투하여 동상과 대기념비를 파괴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이 사건을 ≪최고 존엄에 대한 극악무도한 특대형 테러사건이고 국제법을 난폭하게 위반한 중대 국가정치테러 사건≫으로 규정했다.


3일 후인 19일 북한은 체포한 테러범 전영철의 기자회견을 열어 사건의 실체를 더욱 구체적으로 공개했다. 전영철은 2010년 4월에 탈북한 후 입국, 2011년 3월부터 강원도 춘천에서 생활한 인물이다.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이 기자회견에는 북한 측 기자들은 물론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 기자들과 체류 중인 해외동포들이 참석했다.



▲전영철 기자회견 장면


007을 연상시키는 치밀한 작전


기자회견에서 전영철은 자신이 2011년 11월 탈북자 리수복의 소개로 <북한인민해방전선>(북민전) 김성민 대표를 만나 <동상을 까부수는 모임>(동까모) 활동을 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김성민 대표는 동까모 사업에 동참하라고 권유하며 ≪큰 돈을 벌려면 이런 일을 해야 한다. 강연 몇 번이나 삐라 몇 장 날리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성공하면 평생 잘 먹고 살 수 있다. 일단 공화국에 죄를 짓고 남쪽에 왔는데 이런 일을 한다고 해서 누가 탓하느겠느냐≫고 하였다. 조선일보 크로스미디어팀 차장 고동균 등도 자신을 설득했고 결국 동상파괴작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2011년 12월 21일 아침 정보당국 과장과 요원 2명이 찾아와 작전계획을 설명했으며 자신들의 계획은 최종적으로 미국에서 승인되어야 하고 미국에서 자금을 지출한다고 했다. 6일 후인 27일 요원들이 미국에서 도착, 미국에서 계획을 승인했으며 작전 날짜는 2012년 2월 16일 혹은 4월 15일로 정해졌다.


2월 16일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일, 4월 15일은 김일성 주석의 생일로 북한에서 가장 성대하게 축하하는 국가 기념일이다. 요원들은 ≪경축행사분위기를 흐려놓을 수 있고 소문도 더 크게 낼 수 있으며, 북의 민심도 흉흉하게 할 수 있다. 그 파문은 대단할 것≫이라며 ≪이번 폭파사건은 철저히 외부세력이 아니라 공화국 내부에서 일어난 것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전영철은 밀수업자로 위장하여 폭발물을 반입한다. 폭발물은 보온병 형태로 12시간 이후 자동체계로 넘어가며, 설치자가 4~6km에서 원격조종기로 스위치를 누르면 자동 발사된다. 폭발물은 동상 앞에 있는 아파트 옥상에 설치한다. 전영철은 어머니 집에 들려 원격조종장치가 내장되어 있는 휴대전화를 어머니에게 주면서 아침 7시까지 자신에게서 소식이 없으면 전화기에 있는 단추(원격조종단추)를 눌러 나를 찾으라고 말하고는 집을 떠난다. 다시 중국으로 빠져나온 전영철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원격조종장치의 단추를 눌러 동상을 파괴한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이중으로 폭발 대책을 세운 것이다.


이 계획에 따라 전영철은 3월 24일 고동균, 심아무개와 함께 중국 연길에 도착했으나 폭발물이 준비되지 않아 재입국했다. 최종 작전이 북한의 전승기념일인 7월 27일 0시로 확정됐고 5월 5일 다시 중국으로 갔다. 5월 11일 심아무개와 준비상황을 최종 점검한 뒤 13일 밤 두만강을 통해 폭발물과 비슷한 물품을 북한으로 들여보냈다. 하지만 작전에 앞서 현지 점검을 위해 전영철 씨는 6월 18일 밤 북한 국경도시로 잠입한 후 이튿날 새벽 중국으로 나오려다가 체포됐다.


전영철은 자신을 동까모에 포섭하고 동상폭파작전을 지시한 인물은 한국 정보당국 소속으로 조선일보 기자로 위장한 고동균과 심아무개라고 주장했다. 고동균은 2008년 12월 조선일보 크로스미디어 탈북취재팀 작가로 대한언론상을 수상하기도 한 인물이다. 또한 전 씨는 군 기무사 처장인 손기만과도 연계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대한언론상을 수상한 고동균(왼쪽에서 네 번째 인물)


그는 또 ≪북민전 대표도 저들이 조직한 동까모가 미국의 후원을 받고 있다고 하였으며 <작년 6월과 8월에 미국에 갔다왔다>, <성과가 없어 미국의 신용을 잃고 있다>고 하면서 미국 소리만 계속 하였다≫고 하면서 사건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고 주장했다.


동까모와 북민전의 정체는 과연?


정부는 일단 탈북자 전영철의 존재는 확인했지만 전영철의 기자회견 내용은 사실관계를 더 확인해봐야 한다며 한 발 물러섰다. 다만 정부 당국자는 22일 ≪북민전의 김성민씨는 동까모라는 조직이 말로만 있었지 실제로 행동에 옮겨진 것은 없다고 부인하고 있다≫며 동까모의 존재 자체는 인정했다. (<경향신문> 7월 22일자 보도)


주간조선 2217호는 동까모의 실체에 대해 더욱 구체적으로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동까모는 지난 2010년 12월 말 탈북자가 만든 대북 매체인 자유북한방송(대표 김성민)이 주최한 송년회 자리에서 처음으로 제안됐다고 한다.


북민전 대표를 겸하고 있는 김 대표는 이날 송년회 인사말에서 ≪북한을 바꾸는 상징적 행동은 아마도 김일성 동상을 까는 일일 것이다. 북한 주민들의 뇌리에 새겨진 우상화를 까부수는 일에 여기 모인 여러분이 함께했으면 한다≫고 하였다. 김 대표의 말이 끝나자마자 참석자들은 박수를 쳤고 즉석에서 동까모의 후원금을 내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날 송년회에는 자유북한방송 소속 직원과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등의 탈북자단체 대표 그리고 정부 당국자를 포함해 80여명이 모였다.


김 대표는 며칠 뒤 동까모 회비를 모으는 데 사용할 은행 통장을 개설했다. 송년회 당일 모은 돈과 이후 1000~2000원씩 탈북자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동까모 회비는 어느새 수백만 원으로 불어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동까모를 만든 모(母)조직 북민전은 어떤 단체일까?


북민전은 인민군 출신 탈북자들이 북한 정권 붕괴를 목표로 만든 단체다. 북민전은 2010년 5월부터 10여 차례에 걸친 준비모임을 가졌으며 이 해 9월 9일 서울 지하철 신길역 앞에서 300여 명의 회원으로 결성식을 진행했다. 이들은 자체 <군기>를 만들고 군사위원회/위원장, 대표, 행동대, 참모부, 작전국, 안보국, 정보국, 대북전략국, 행정국, 대외사업국 등 각종 부서를 만들어 사실상 준군사조직으로 활동하고 있다.



▲북민전 군기



▲북민전 조직체계(출처:북민전 홈페이지)


북민전은 자신의 사명으로 북한 체제를 붕괴시키고 자유, 민주주의에 근거한 통일을 내세웠다. 또 이를 위해 종북세력 척결, 한국 내 반북선전, 인민군 해방, 반북전선 형성 등의 행동 과제를 제시했다.


이들은 실제로 각종 반북집회를 열고 국내 통일운동단체들을 규탄하는 활동을 했으며, 2010년 G20 정상회의 당시에는 진보단체들의 반대집회를 저지하기 위해 기동대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또한 2010년 9월 30일부터 <탈북민 특별예비군> 설립을 위한 탄원사업을 진행하여 실질적인 무장군사조직으로 발전시키려 하고 있다. 또 북한군 관련정보를 수집하고 연구하는 활동을 진행하고 있으며, 대북 삐라 살포에도 적극 가담하고 있다.



▲북민전 결성식 장면


또한 외곽단체로 통일부 사단법인 <겨레얼통일연대>를 등록해 정부자금을 합법적으로 지원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50년 전 피그스 만 침공사건의 재판


북민전과 동까모를 들여다보면 마치 1961년 미국의 피그스 만(Bay of Pigs) 침공사건을 보는 듯하다.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미국의 행태는 변한 게 없는 셈이다.


1959년 카스트로 군대가 쿠바 수도에 입성하면서 쿠바 혁명을 승리로 이끌자 미국은 쿠바 정부를 전복하고 친미 정부를 세우기 위한 계획에 돌입했다. 1960년 3월 17일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미국으로 망명한 쿠바인을 훈련시켜 카스트로 정부를 전복하자는 미 중앙정보국(CIA) 계획을 승인하였다.



▲쿠바 혁명을 승리로 이끈 카스트로(오른쪽)와 체 게바라


CIA는 1400여 명에 달하는 쿠바 망명자들을 모아 2506여단을 구성하고 무장시켰으며 플로리다 남부와 과테말라 해안가에서 이들을 훈련시켰다. 이 와중에 미국은 대선으로 정권이 바뀌었고 새로 당선된 케네디 대통령은 수차례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한 끝에 쿠바 침공을 승인하였다.


한편 미국의 침공이 임박했음을 파악한 카스트로 정부는 쿠바 내 반란세력 색출에 나섰다. 혁명안보위원회(CDR) 주도로 경찰과 비밀경찰(G-2)은 미국과 내통한 반체제 세력들을 다수 검거하였다. 이 와중에 수도 아바나에 있는 백화점에서 폭탄이 터지는 등 각종 테러사건이 발생했다.


마침내 1961년 4월 15일, 쿠바혁명군 표식을 단 폭격기들이 쿠바 곳곳의 비행장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이틀 후인 17일에는 2506여단 1511명이 수송선을 타고 쿠바 피그스 만에 상륙작전을 개시했다. 쿠바군과 민병대는 미군의 네이팜탄 공격을 받아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격렬히 저항하였다.


원래 2506여단은 쿠바 내 반란세력이 봉기하여 자신들과 합세하리라 예상하였다. 그러나 반란세력은 이미 쿠바 정부에게 분쇄된 후였다. 게다가 미국 개입을 숨기려는 케네디 정부가 공습을 중단하기까지 하였다.


2506여단은 불과 사흘 만에 궤멸되었다. 2506여단 병사 68명을 포함하여 미군 전체 전사자 수는 104명에 달했고 1209명이 포로가 되었다. 쿠바 정규군 사망자는 161명이며 민병대는 1천 명이 훨씬 넘는 수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부분은 미군 공습으로 인해 사망했다.



▲쿠바군의 포로가 된 2506여단 병사들


쿠바 카스트로 정부는 1961년 12월 몸값으로 5300만 달러어치의 식품과 의약품을 받은 뒤에야 1113명의 포로를 풀어줬다. 미국 케네디 정부는 작전 실패의 책임을 물어 CIA 국장 알렌 덜레스와 부국장 찰스 카벨, 작전 책임자 리처드 비젤을 경질했다. 1961년 8월 체 게바라 쿠바 산업부장관은 케네디 대통령에게 ≪침공에 감사드립니다. 침공 전엔 혁명의 힘이 미약했지만, 이젠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해졌습니다≫라며 조롱하는 쪽지를 전달하였다고 한다.


쿠바 정부는 미국이 다시 침공할 것에 대비해 소련에 핵미사일 배치를 요청하였고 이는 1962년 3차 세계대전 위기를 부른 쿠바 미사일 사태로 이어졌다.


전쟁을 부르는 미국의 급변공작


피그스 만 침공사건을 보면 최근 있었던 동까모 사건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피그스 만 침공사건이 3차 세계대전 위기로까지 번진 것처럼 동까모 사건도 한반도 전면전, 나아가 세계대전으로 번질 수 있었다.


만약 동까모 작전이 성공했다면 미국은 작전계획 5029에 의거, 한국군의 북한 침공을 명령했을 수 있다. 동상과 대기념비 폭파는 작전계획 5029가 규정한 6가지 급변사태 유형 가운데 하나인 <북한의 내전 상황>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침공은 한국군이 주도하는 것으로 역할분담이 되어 있다.


아마도 미국과 이명박 정부는 작년 말 북한이 갑자기 국상을 당하자 내심 급변사태를 바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다려도 급변사태가 일어나지 않자 연초부터 급변사태를 만들기 위한 <급변공작> 활동에 들어갔다. 동까모 전영철이 처음 중국에 간 것도 3월이며, 북한 고위인사를 기획망명하려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김영환이 중국에서 체포된 것도 3월이다. 이 시기에 치열한 대북 공작활동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북한에 새 지도부가 들어서자마자 제2의 황장엽 사건 같은 고위급 망명사건이 발생하고 동시에 동상과 대기념비가 폭발하는 사건도 터진다면 미국은 충분히 이를 급변사태로 규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때문인지 북한은 동까모 사건을 두고 미국에게 강경한 목소리를 날리고 있다.


북한 외무성은 7월 20일 대변인 성명을 통해 ≪미국의 구태의연한 대조선 적대시정책으로 조선반도에서는 대결과 긴장격화의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조선반도 비핵화도 더욱 요원해지고 있다≫며 ≪제반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핵문제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 5월 22일과 6월 9일 외무성 대변인이 핵실험 계획이 없다고 했는데 이를 재검토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북한은 7월 31일부터 8월 2일까지 사흘에 걸쳐 싱가포르에서 조엘 위트 전 미 국무부 북한담당관을 만나 위의 이야기를 재확인하였고 그 내용을 미국 언론에 이메일로 알려주기까지 하였다.



▲싱가포르 접촉에 참가한 최선희 북한 외무성 미국국 부국장


또 지난 7월 29일 북한은 국방위원회 대변인성명을 통해 ≪미국의 대조선적대시정책에 실제적인 초강경대응으로 맞설 것≫이며 ≪미국의 국가정치테러에 강한 물리적 대응공세로 맞설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이어 31일에는 조평통 성명을 통해 ≪미국과 남조선괴뢰패당은 우리 주민들에 대한 유인, 납치행위를 당장 중지하며 우리의 최고 존엄을 겨냥한 특대형 국가정치테러범죄에 대해 공식 사죄하고 책임 있는 주모자들을 엄중히 처벌≫할 것을 요구하면서 이를 거부할 경우 ≪범죄자들에 대한 처단을 비롯한 상응한 조치들이 뒤따르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애초에 북한은 이명박 정부와 한국 내 반북언론들에 대한 <특별행동>을 경고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개입이 드러난 이상 그 대상을 미국으로 확대시키는 분위기다. 북한은 이미 지난 7월 25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우리에게는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문제를 푸는 방법도 있고 조선반도에서 전쟁의 화근을 송두리째 들어내어 항구적인 평화를 실현하는 방법도 있다≫며 ≪선택은 미국이 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미국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미국이 어떤 선택을 하던 자신의 행동에는 응당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201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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