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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자본 유입의 역사 -1

토론게시판

by 붉은_달 2011. 6. 22.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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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훈 우리사회연구소 상임연구원


한국 사회에서는 IMF 구제금융 사태를 계기로 외국자본이 경제에 이로운가, 해로운가에 대하여 그 동안 각계에서 많은 연구들이 진행되어 왔다. 특히 국경을 넘나드는 투기자본에 대한 규제는 최근 미국 발 경제위기를 계기로 하여 하나의 세계적 추세로 형성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유독 한국의 기성 정치권과 재벌 등은 오로지 외국자본을 많이 유치하고, 그 활동을 자유롭게 하는 길이 한국경제가 살 길이라는 주장만을 해오고 있다.

외국자본의 득실을 명확하게 평가하는 것은 앞으로 한국 경제가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는데 핵심적 요소이다. 여기서는 그 첫 단계로 해방 이후 외국자본의 유입 역사와 실태에 대하여 포괄적으로 살펴본다.

 외국 자본이 한국 경제로 유입된 과정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된다. 1960년 4.19까지의 무상원조 기간이 1시기. 70년대 이후 노태우 정권에 이르는 차관 도입기를 2시기, IMF 이후 지금까지 직접투자와 증권투자가 전면화된 3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이 가운데 1992년 주식시장 개방부터 1997년 IMF 사태 직전까지를 전면 개방을 향한 과도기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무상원조와 개발차관 도입에 이어 금융시장 개방 압력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던 97년 IMF사태 전까지를 다룬다.

1. 미국의 무상원조에 의존한 한국경제

 자본의 움직임은 기본적으로 정치에 의해 규제된다. 따라서 해당 시기의 자본 이동을 둘러 싼 국제적인 정세를 먼저 짚어보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2차 세계대전 직후 국제 사회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을 다른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진영이 대립하였다. 해방 후 한반도가 이들 외세에 의해 분단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미국은 2차 대전 이후 사회주의 진영에 맞서 미국중심의 자본주의진영을 군사, 경제적으로 강화할 요구가 있었다. 특히 소련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서독을 비롯한 유럽, 분단 후 단독정권이 수립된 대한민국, 중국과 분열된 대만, 그리고 전략적 요충지인 일본에 대하여 마셜플랜을 비롯한 막대한 무상원조 정책을 실시하여 각국에 친미 성향의 정부를 수립하고 공고히 하는데 노력하였다. 한국에 미국의 무상원조가 들어오게 된 것은 당시의 이러한 국제정세와 미국의 요구를 고려했을 때 필연적인 것이었다.

미국은 1945년 한반도의 북위 38도 이남을 점령하여 과거 일제가 남기고 간 적산을 다시 친일파들에게 불하하고 친미세력 양성에 돌입하였다. 이와 더불어 미국은 점령지역 구호원조를 시작으로 한반도 남쪽에 그들의 원조자금을 투하하였다. 무상원조 물품의 구성은 대체로 전쟁 후 남아도는 자국의 군수물자와 잉여농산물, 그리고 완제품위주의 소비재 등으로 이루어 졌다. 또한 무상원조 물품은 이승만 정권과 이에 결탁한 과거 친일 세력에게 독점적으로 제공되었다. 이는 자국의 잉여물자를 해소하고, 원조대상국에 초보적인 무장력을 갖추는 효과에 더불어, 친미 성향의 매판 자본가를 양성하는데 기여하였다. 반면 한국 경제는 자생력을 가진 경제로 발전하는데 완전히 실패하였다.

미국은 전쟁 후 56년부터 미공법 480호(PL480)을 제정하여 자국의 잉여농산물 본격적으로 한국에 투하하였다. 대표적인 물품은 밀가루와 설탕, 그리고 면화였는데, 이 역시 소수의 친미 매판자본가를 중심으로 독점적으로 제공되었다. 매판자본가들은 미국 농산물을 시장 가격보다 훨씬 낮은 가격으로 판매하여 한국 농촌을 붕괴시키고 막대한 이익을 축적하였다.

이 시기 한국에 도입된 외국자본은 사실상 미국의 무상원조가 전부였다. 미국의 무상원조는 60년을 전후로 감소하기 시작하여 71년 자국 잉여농산물 2500만 달러 투하를 마지막으로 종료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농업 기반이 붕괴되기 시작했으며, 3백 산업 등의 제조업은 그 원료를 미국의 원조물품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기형적 형태로 외연을 확대하게 되었다. 미국은 무상원조를 통해 한국 경제 전반을 재편하고 장악했으며 정치적으로 공고한 친미세력을 양성했던 것이다.

2. 정부 주도의 차관 도입과 미국의 경제개입

미국은 1957년부터 세계정세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하여 자국의 대외원조정책을 무상원조에서 개발차관의 형태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주목할 사실은 사회주의 진영이 세계적 범위에서 빠른 속도로 확대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선 전후 복구를 마친 소련이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였다. 소련은 세계 두 번째로 원자폭탄을 개발한 데 이어, 미국보다 이른 시기에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등 정치군사적으로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초강대국으로 등장하였다. 또한 한국전쟁에서 북한이 정권을 유지하였고 쿠바와 베트남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진행되었다.

미국은 이러한 사회주의권의 성장에 대응하기 위하여 소련보다 우위에 있는 자본력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냉전체제를 전개하였다. 미국은 구체적으로 서유럽에서 NATO체제를 수립하고 동북아시아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 미일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을 세계적 범위에서 군비경쟁을 촉발하였다.

특히 미국은 서유럽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취약한 경제적 기반을 가진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에 자본주의적 산업 구조를 정착시키면서도, 인접한 사회주의권보다 경제적으로 부흥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자기 나라에서 골칫거리로 떠오르는 노동집약산업과 공해유발 산업을 한국 등 주변국에 떠넘기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미국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반영한 ‘국제 분업론’으로 포장되었다. 미국의 과잉 자본을 주변부 국가에 수출하고, 동시에 낙후하고 공해를 유발하는 사양 산업을 해외로 이전하는 것이다. 이렇게 주변부로 이전된 노동집약적 산업은 해당 국가의 저렴한 노동력에 의해 생산되어 미국으로 다시 수출된다. 이로써 과잉 자본이 이식된 국가는 자신의 경제구조가 더욱 미국에 종속된다.

따라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지난 시기의 무상원조보다 더 치밀하고 장기적인 운영계획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경제적 요구에 의해 미국은 자신의 대외경제개입 방식을 무상원조에서 개발차관 형태로 전환하였다.

우리나라의 차관도입은 1959년 동양시멘트가 개발차관기금(현재의 미국 국제개발처)으로부터 도입한 공공차관을 효시로 한다. 특히 박정희 정권 시기에 발표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으로 미국으로부터 정부 주도의 차관 도입 본격화되었다. 미국은 차관도입 시 한국과 경제개발계획을 공동 수립하는 형태로 차관을 철저히 관리하였다.

또한 이 시기 미국은 일본을 정점으로 하고 한국을 전진기지로 하는 동북아 반공기지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한국과 일본 간의 국교 수립을 막후에서 종용하였다. 이 결과로 박정희 정권은 65년 굴욕적 한일협정을 맺고 일본으로부터 무상3억, 유상2억의 원조와 차관을 각각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은 차관의 대부분을 세계은행(IBRD), 아시아개발은행(ADB) 등 국제경제협력기구와 미국 및 일본에서 도입 해왔다. 사실 상 모두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자본인 셈이다. 차관형태의 외국 자본 유입은 1959년 첫 도입 이래 1992년까지 공공차관 194억 1700만 달러, 상업차관 210억 2200만 달러, 도합 404억 3900만 달러에 달한다(표 1). 



 광주시민의 생명을 대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 역시 초기부터 차관 도입 정책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였다. 그러나 한국은 86년 일반 정부의 장기 차입이 -1.26억달러를 기록(한국은행)한 이후 꾸준히 마이너스 수치를 나타내어 사실상의 차관 상환국면으로 돌입하였다. 이는 당시 ‘3저 호황’에 힘입은 바가 크다. 경제의 활황국면에서 한국의 외자도입 방식은 과도기를 맞이하게 된다. 86년 이후 도입된 전체 외국 자본 중 차관 도입량은 30%수준으로 급감한 반면, 한국 정부와 기업의 신용이 좋아지면서 대외채권 발행이 증가하기 시작(표 2)하였고 외국인의 직접투자도 81년 1억 달러 수준에서 점차 증가하여 89년에 처음으로 10억 달러를 돌파(한국은행)하였다.

한국은 1988년 아시아개발은행 차관공여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며, 90년에는 일본 해외경제협력기금(OECF) 차관도입이 종료되었고, 1995년 3월부터 세계은행의 차관대상국에서도 제외되어 공식적으로 정부 주도의 차관도입 시대를 마감하였다.

세계은행이 우리나라에 대해 95년 당시 서둘러 차관졸업계획을 수립토록 종용하게 된 것은 92년 소련의 붕괴가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미국이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국가들이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서는 많은 자금이 필요한데 한국 등 여유가 있다고 판단되는 나라에 대해 지속적인 차관공급을 하게 되면 그만큼 동구권 지원 여력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정부주도의 개발 차관을 도입한 25년을 거치며 한국은 미국의 잉여상품 투하지에서 미국의 하청기지로 완전히 전락하였다. 이 시기에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은 미국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여 노동집약적 산업에 필요한 저임금 노동자를 대량 확보하기 위해 저곡가정책을 비롯한 농업말살정책으로 화답하였다. 이로써 미국은 자국의 사양산업과 공해산업을 한국으로 이전하고, 한국에서 값싸게 생산된 물건을 자국으로 수입하는 구조를 완성하였다. 당시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며 수출주도형으로 발전한 듯 보이는 경제는 본질적으로 시작부터 끝까지 미국의 각본대로 진행된 하청경제 수립의 과정이었으며, ‘기적’의 뒷면에는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민중의 막대한 희생이 자리하고 있다.

3. 미국 경제의 ‘금융화’와 금융시장 개방 압력

전두환 군사정권은 87년 6월 항쟁을 통하여 역사에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이 시기를 전후로 한국 경제는 석유가격과 금리, 그리고 원화가치가 낮게 형성되어 유래 없는 수출 호황을 누리게 된다(3저 호황). 석유가격이 떨어지자 원료에 대한 조달비용이 낮아지고, 금리가 떨어져 기업들의 금융비용이 감소하였고, 원화가치가 절하되어 일본 상품에 비하여 한국 상품의 가격경쟁력이 한껏 재고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한국은 역사상 최초로 대규모 무역흑자를 기록하게 되고, 주가가 1000포인트를 돌파하는 등 경제적 활황기를 맞이하였다.

3저 호황에 직접적인 요인을 제공한 것은 미국이다. 미국은 70년대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한 것과 더불어 석유파동과 대일본무역에서의 대규모 적자 등 경제적 요인이 더해져, 경기는 침체되는데 물가는 더욱 올라가는 심각한 스테그플레이션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소련과의 군비경쟁을 오히려 심화하였고 이로 인해 심각한 재정적자까지 발생하게 되었다. 미국은 경제적 난국을 정치적으로 타개하기 위해 일본과의 ‘플라자 합의’를 탄생시켰다. 미국은 일본으로부터 들어오는 막대한 양의 수입상품으로 인하여 자국의 제조업이 엄청나게 피해를 본다면서 일본에게 엔화 가치를 대폭 절상할 것을 종용하였다. 일본은 미국과의 정치군사적 관계로 인하여 이러한 요구를 수용하였다. 이 결과로 엔화는 달러에 대하여 100%, 즉 두 배 가량 절상되었다. 엔화의 대폭 절상은 일본 수출기업에 막대한 피해를 가져왔다. 미국은 일본의 직접적인 희생을 발판으로 일시적 재기에 성공하였다.

다방면적 어려움에 직면한 미국 내 기업의 자본 축적 방식은 80년대를 거치며 ‘경제의 금융화’라고 불리는 커다란 변화를 맞게 된다. 비금융법인의 수입 중 생산활동에 의한 수입보다 금융소득(이자, 배당, 자본이득에 의한 수입)의 비중이 증가하고, 법인 전체의 이윤 중 금융법인의 비중이 비금융법인의 비중보다 더욱 증가하는 것을 가리켜 금융화가 진전한다(크리프너, Krippner 2003, 김수행 ‘자본주의의 위기와 공황’에서 재인용)고 말한다. 실제로 80년대 미국의 금융, 보험, 부동산 업계에서는 고용을 거의 창출하지 않으면서도 GDP와 법인기업 전체의 세전이윤총액은 격증하였다. 이들은 상업과 상품생산을 통해 얻는 전통적인 방식이 아니라 주로 금융적인 통로를 통해 이윤을 축적(크리프너, 위와 동일)하였다. 

이러한 자본의 축적 방식의 변화는 한국에 그대로 금융 시장 개방 압력의 파장을 몰고 왔다. 미국은 한국의 3저 호황에 이은 주식시장 폭등을 보며 선차적으로 주식시장을 개방하라는 압력을 지속적으로 가했다. 결국 노태우 정권은 92년 1월 1일을 기준으로 종목 당 10% 범위에서 외국인의 지분 확보를 허용하는 개방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이로써 한국 경제에 대한 외국 자본의 유입 방식은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표 2>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1992년 주식시장 개방을 기점으로 증권투자액이 급증하였다. 외국인의 증권투자는 개방 직전 6억 달러에서 외환위기 직전까지 215억 달러로 33배 수직상승하였다. 그러나 정부와 중앙은행을 통해 유입되는 장기 차입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차관 도입이 주를 이루었던 과거와는 달리 외국인 직접투자도 일정하게 늘어났다. 외국인 직접투자는 80년대에 거의 이루어지지 않다가 90년 7억 8900만 달러 규모에서 96년 23억 2500만 달러 규모로 3배 증가하였다. 이러한 자본 유입 형태의 과도기적 변화는 97년 IMF 사태를 계기로 한국 경제에 전면화 된다.

4. 맺음말

지금까지 해방 이후 무상원조부터 시작된 외국자본의 유입 흐름을 살펴보았다. 사실상 한국에 자본을 끌어다 놓은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자신의 이익과 요구에 맞게 그 형태를 변화시켜가며 끊임없이 자본을 한국으로 유입시켰다. 미국 경제가 금융화 과정을 거친 이후, 미국은 한국의 금융시장에 대한 개방 압력을 가중시켰다. 주식시장 개방 이후 물밀듯 들어온 외국자본은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하여 전면적으로 한국 경제에 진입하였다.

다음 편에서는 IMF 외환위기 이후 유입된 외국 자본의 형태와 성격을 포괄적으로 짚어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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