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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자본 유입의 역사 -2

토론게시판

by 붉은_달 2011. 7. 1.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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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이후 외국자본 유입 형태 변화와 원인
김성훈 우리사회연구소 상임연구원



 1편에서는 해방  IMF 전까지 한국에 유입된 외국자본을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1960년대 초반까지의 첫 시기는 무상원조기로, 1960년대부터의 두 번째 시기는 차관도입기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으로 유입되는 외국자본의 형태는 1990년대에 확연히 변하기 시작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유입 형태에 따른 외국자본의 총량은 증권투자(주식투자와 채권투자)를 중심으로 급증하였으며, 직접투자액도 1990년대 이전에 비해 상당히 증가하였다.

한국사회는 IMF가 강요한 긴축재정, 금융자유화,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으로 인해 공기업 민영화, 비정규직 확산, 대기업 파산, 대량실업 등으로 커다란 변화를 겪었으며 서민들은 심대한 경제적 고통을 당하였다. 그러나 글쓴이는 이 글에서 주제를 제한하여 우선적으로 80년대 이후 변화된 외국 자본의 형태 변화에 주목하고, 이러한 변화를 일으킨 미국의 정치경제적 환경에 대하여 포괄적으로 고찰하려 한다.

1. 역대 정권의 외국자본 도입정책과 그 결과 



1980년 당시 도입된 외국자본은 차관 또는 무역신용이 85%로 압도적이었으며, 직접투자는 5% 정도(매일경제 80년 1월 14일자)였다. 외국자본의 증권투자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후 80년대 이후 한미간 경제회담에서는 시장개방이 주된 화두로 대두하였고 한국 역대 정권은 외국자본에 대한 개방조처를 단계적으로 확대하였다.

외국자본의 증권투자는 1980년 1월 14일 전두환 정권에 의해 채권투자부터 최초로 허용되었다. 이 조치는 ‘국제투자신탁’이라는 기관을 통해 이뤄지는 간접투자 방식이었다. 1.14 조치로 불리는 일련의 자본 시장 개방조치는 이 외에도 직접투자에 대한 개방 내용도 함께 담고 있다. 주목할 만한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외국자본 직접투자 대상사업의 범위를 완전히 개방하였고, 50%였던 투자 상한선도 완전 폐지하였다. 그리고 2년간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던 외국자본의 ‘투자 원금 회수 행위’도 완전히 자유화하였다.

한국 증권시장은 1992년 노태우 정권의 주식시장 개방조치로 인해 다시 중요한 고비를 맞이한다. 노태우 정권은 1992년 1월 1일을 기하여 외국인이 한국 주식시장에 직접 투자하는 것을 10% 한도 내에서 최초로 허용하였다.

자본시장 개방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계기는 1997년 IMF외환위기다. IMF 외환위기를 거치며 한국 자본시장은 완전히 개방되었고, 외국자본의 유입형태는 증권투자(주식투자와 채권투자 를 일컫는 말)위주로 확고히 전환되었다.

2. IMF, 한국 증권시장에 커다란 파문 일으켜 



위 표는 IMF가 한국 정부와 구제금융 제공요청을 받아들인 직후 한국 금융시장에 강제한 제도적 조치이다. IMF는 한국에 상륙하자마자 금융부문에 대한 자율성과 접근성을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주식시장, 채권시장, 외환시장 및 은행 등 한국 자본시장을 외국인에게 전면적으로 개방하게 하였다. 이러한 조치가 취해지는 데 걸린 시간은 한 달에 불과했다. 



일련의 조치가 취해진 결과, 1997년부터 미국 발 금융위기 전인 2007년까지 한국에 유입된 외국자본의 증권투자 총액은 1459억 500만 달러로 원화로 환산할 경우 167조 7907억여 원(환율 1150원/달러 적용)에 이르게 되었다(표 1). 이는 같은 기간 유입된 외국 자본의 총액 중 53.41%에 해당한다. 외국자본은 2004년에 한국 주식시장 시가총액의 42%를 보유한 바 있다.

3. 외국자본에 헐값에 넘어간 주요 제조업과 은행산업

외국인 직접투자액도 IMF 직후 상당히 늘었다. 1992년부터 1996년까지 순투자액 기준(외국인 실제 투자액 - 회수액)으로 연평균 12억 달러였던 외국인 직접투자는 97년 28억 달러, 1998년 54억 달러, 1999년 93억 달러로 약 8배 증가하였다. 외국인의 직접투자는 주식투자에 비해 양은 적지만 해당 기업과 설비를 직접 장악한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1997년 외환위기 과정에서 도산한 수많은 기업들은 재벌만 해도 한보철강을 필두로 30개에 달한다. 대표적으로 대우그룹, 기아그룹, 한라그룹 등이 도산처리 되었고, 1998년 6월까지 총 55개 대기업이 청산 또는 매각되었다. 또한 한국의 대표적 재벌인 현대그룹이 금융위기에 이은 현금 부족현상(유동성 위기)으로 현대자동차와 하이닉스 등 다수 계열사로 해체되기까지 했다. 재벌들은 당시의 극심한 현금 부족 현상으로 인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수익성이 높은 핵심 업종의 계열사까지 헐값에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 외국 자본은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우차, 삼성차, 하이닉스 등 한국의 주요 제조업에 광범위하게 투자하였다.

IMF 직후 제조업을 중심으로 유입된 외국자본의 직접투자는 2000년대 중반에 이르러 금융업으로 집중되는 양상을 보였다. 지식경제부에 따르면, 1999년부터 2000년까지 외국인 직접투자는 제조업이 51%, 금융업이 21%를 차지하였으나 2005년의 경우 금융업 비중이 40%를 상회하고 제조업 비중은 25%선까지 떨어졌다. 이러한 결과 8개 시중은행 가운데 3개는 외국인 소유가 되었으며, 나머지 5개 은행 중 4개 은행도 외국인 보유 지분이 50%를 상회하게 되었다. 사실상 한국의 은행들은 외국자본의 것이 되었다.

4. 원인은 미국 경제의 ‘금융화’와 시장 개방 압력

지금까지 IMF 외환위기를 전후로 변화된 외국자본의 형태가 어떻게 한국의 증권시장과 산업의 소유구조를 변화시켰는지 각각 살펴보았다. 이러한 변화를 촉진시킨 것은 한국 정부의 정책적 조치였다. 그렇다면 한국의 역대 정부는 왜 이러한 자본시장 개방 조치를 계속 확대한 것일까? 한국의 자본시장 개방은 미국경제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외국자본 유입의 역사-1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경제는 미국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받아왔다. 그 결과로 80년 현재 한국 총수출 중 27%, 총수입 중 25%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다(매일경제 80년 2월 3일자). 당시 미국 경제가 한국에 미치는 영향은 자본 유입관계 뿐 아니라 무역 관계를 봐도 막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미국 앞에 놓인 정치적, 경제적 상황은 그리 호락호락한 편이 아니었다. 미국은 70년대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한 것과 더불어 석유파동과 대일본무역에서의 대규모 적자 등 경제적 요인이 더해져, 경기는 침체되는데 물가는 더욱 올라가는 심각한 스테그플레이션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소련과의 군비경쟁을 오히려 심화하였고 이로 인해 재정적자가 크게 늘어났다.

미국은 경제적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일본과의 ‘플라자 합의’를 탄생시켰다. 미국은 일본으로부터 들어오는 막대한 양의 수입상품으로 인하여 자국의 제조업이 엄청나게 피해를 본다면서 일본에게 달러 대비 엔화 환율을 크게 내릴 것을 종용하였다. 일본은 미국의 압박에 못 이겨 엔화절상을 결국 수용하였다. 이 결과로 엔화 환율은 달러화에 대하여 절반으로까지 떨어졌다. 엔화의 대폭 절상은 일본 수출기업에 막대한 피해를 가져왔다.

미국은 이 외에도 자국의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세계 각국에 통상압력을 가하였다. 미국은 한국에도 무역 개방 압력을 행사하여 1978년 432개 품목에 대하여 수입자유화조치를 강제하였다(매일경제 78년 9월 18일자).

미국 정부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제조업은 일본, 독일 등에 밀려 상품판매에서 끊임없는 위기를 겪었다. 세계 무역에서 다방면적 어려움에 직면한 미국의 기업들은 단순히 상품을 팔아서 이윤을 창출하던 전통적인 경영방식을 바꾸기 시작하였다. 이른바 ‘경제의 금융화’라 불리는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이를 두고 크리프너(Krippner)는 2003년과 2004년 논문에서 첫째, 비금융법인의 수입 중 생산활동에 의한 수입보다 금융소득(이자, 배당, 자본이득에 의한 수입)의 비중이 증가하고 둘째, 법인 전체의 이윤 중 금융법인의 비중이 비금융법인의 비중보다 더욱 증가하는 것을 통계수치로 확인한 후 이를 가리켜 금융화가 진전한다고 주장하였다.

크리프너는 1950년부터 2001년까지 미국의 산업을 제조업, 금융ㆍ보험ㆍ부동산업, 이외 기타서비스업의 세 부문으로 나누어 조사하였다. 이 기간 중 미국 국내 총생산의 구성은 제조업이 32%에서 16%로 격감하는 반면, 금융ㆍ보험ㆍ부동산업은 12%에서 24%로, 그리고 기타 서비스가 10%에서 25%로 격증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 부문이 창출한 이윤을 보면 그 격차가 더욱 심하다. 법인기업 전체의 세전이윤(세금을 납부하기 전 이윤)은 제조업이 49%에서 10%로 격감하고, 금융ㆍ보험ㆍ부동산업은 11%에서 45%로 격증하며, 기타 서비스는 2%에서 2%로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크리프너는 비금융법인(제조업과 기타 서비스업)이 생산 활동 전체에서 얻는 수입 중 금융활동을 통해 얻은 이윤의 비율(금융소득/총소득)을 계산하였다. 이 비율은 1950년대와 60년대에는 8~9% 수준으로 매우 안정적이었는데, 1970년대부터 점차 상승하기 시작하고 1980년대에 급격하게 상승하여 1989년에 이르러 45%가 되었다. 특히 이 비율은 불황기에 급증하는데, 제조업에서 더욱 그러하였다(김수행, 자본주의 경제의 위기와 공황 中).

크리프너는 비금융기업들이 노동운동의 강화, 제조업 부문에서의 국제경쟁 격화, 이윤율의 지속적인 하락 등의 이유로 전통적 생산활동 이외에 금융활동에서 수입을 얻으려 노력했으며, 특히 활황과 불황의 반복에 따른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점점 더 금융소득에 의존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조사 결과는 미국 산업의 이윤 창출 방법이 더 이상 제조업에만 의존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미국은 7, 80년대 자국의 위기를 정치군사적인 패권 강화와 해외 시장 개방 압력을 통해 극복하고자 한 듯 보인다. 이 당시 냉전의 심화, 그리고 끊이지 않는 전쟁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90년대의 러시아, 남미, 동아시아 특히 한국의 외환위기는 당시의 시장 개방, 특히 자본시장 개방의 압박 속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은 80년대부터 한국에 적용된 자본시장의 단계적 개방 정책과 흐름을 같이 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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