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쿠데타는 국민들의 민주화와 통일 열망을 짓밟고, 강력한 친미반공 정부를 세워야 했던 미국에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물론 박정희는 후에 쓸모가 없어져 미국의 버림을 받고 살해당했다. 외세의 힘으로 정권을 유지하면 어떤 최후를 맞는지 보여주는 전형이다. 박근혜 후보의 수첩에 이런 내용도 있는지 궁금하다.
5.16은 미국에게 최선의 선택
동북아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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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경선후보가 5.16 쿠데타를 두고 ≪최선의 선택≫이라고 하여 파문이 일고 있다. 야권은 물론 보수집단 내에서도 부적절한 발언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한 여론조사에서는 지지율이 4일 만에 4%나 떨어지는 등 박근혜 후보에게 악재가 되고 있다.
▲박근혜 후보
박근혜 후보의 발언은 한국 사회의 보수 인사들, 친미·친일 인사들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은 2004년 8월 한 인터넷 게시판에 ≪내가 볼 때 살아있는 노인들 99% 이상이 친일한 사람들≫이라며 ≪을사늑약 이후 일제가 거의 50년간 지속되었는데 거기서 살아남으려면 친일 안 하고 배겼겠는가≫라며 친일파를 두둔했다. 또 김종훈 새누리당 의원은 한 토론회에서 자신을 이완용이라고 비판하자 ≪앞으로 한국 국민들은 이완용을 따르고 칭송하게 될 것이다≫는 막말까지 하였다.
그런데 박근혜 후보가 한 가지 모르는 게 있다. 5.16 쿠데타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최선의 선택>이 아니라 미국에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미국이 주목한 인물, 박정희
미국이 박정희를 처음 주목한 것은 1953년이었다. 정전협상이 한창이던 당시 이승만 전 대통령이 정전협상을 반대하고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미국을 곤란하게 하고 있었다. 당시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은 이승만을 감금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비상계획이 필요하다고 미국 정부에 통보했다.
▲클라크 사령관을 영접하는 이승만 전 대통령
그리하여 1953년 5월 4일 테일러 미8군 사령관은 한국에 군사정권을 수립하는 <에버레디 계획(Plan Everready)>을 작성하였다. 미국은 이 계획을 실행할 군부 인사를 물색했는데 여기에 박정희 당시 육군본부 작전국 차장도 포함이 되었다. 미국에 충실하며 정치적 야심이 있는 장교로 발탁된 것이다.
하지만 이 쿠데타 계획은 이승만 정권이 정전협정을 수용하였고, 또 이승만을 대체할만한 믿음직한 친미 인사가 없다는 이유로 결국 폐기되었다.
그러나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쫓겨나자 미국은 다시 박정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미국 입장에서는 누가 대통령이 되든 주한미군이 안전하게 주둔할 수 있고, 미국의 요구에 순종하기만 하면 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 국민들의 끓어오르는 민주화 요구, 그리고 연북통일 의식의 확산을 시급히 막을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장면 정권은 이런 미국의 요구를 실현할 능력이 없었다. 미국은 군사정권만이 해답이라고 판단했다.
▲이승만을 몰아낸 4.19 혁명
5.16 쿠데타 직후인 7월 20일 밴 플리트 미8군 사령관은 ≪한국에는 민주정치가 시기상조≫라며 ≪군사정권은 한국의 반만년 역사를 통해 가장 훌륭한 정부≫라고 발언하였다. 미국이 군사정권을 바랐음을 드러낸 발언이다.
5.16 쿠데타의 숨은 주역
실제로 5.16 쿠데타에 미국이 관련된 증거는 여러 가지로 드러났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UN사령부가 1961년 4월부터 박정희의 쿠데타 계획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미국이 가진 상황에서 쿠데타 병력 이동 역시 미국의 승인, 적어도 사후 승인이 있었음을 알려준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쿠데타 직후 박정희는 주한미대사관에 방문하여 막걸리잔을 부딪히며 술을 마셨다≫는 사실도 폭로하였다.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전 대통령
1961년 5월 20일 일본 잡지 <주간 신조>는 ≪CIA는 약하고 무능한 장면내각을 무너뜨리고 <강력한 반공정부>로 교체시키기 위해 군부에게 쿠데타를 감행하도록 교사하였고, 그 후 그런 전략을 은폐시키기 위하여 미국무성을 배후에서 조종하여 서울의 미대사관, 미군당국에 장면 지지성명을 발표하도록 했다≫고 보도했다.
또 1964년 5월 3일 덜레스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영국 비비시(BBC) 방송에 출연하여 ≪내가 재임 중에 CIA의 해외활동으로서 가장 성공을 거둔 것은 5․16 쿠데타였습니다. ...(중략)... 만일 미국이 무언가를 하지 않았더라면 민중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에 현혹되어 남북통일을 요구하는 폭도들을 지원하였을지도 모릅니다≫고 밝혔다.
결백을 입증하려 과잉충성하다
실제로 박정희는 혁명 공약 1항에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는다고 명시했다. 특히 박정희는 해방 직후 남로당에 잠시 가입했던 전력 때문에 미국의 의심을 받을까 우려해 친미노선에 더욱 철저했으며 자신의 반공 성향을 증명하기 위해 극단적인 반공 정책을 펼쳤다.
북한의 특사였던 황태성을 총살한 것도 같은 논리였다. 박정희는 자신의 형 박상희의 절친이며 자신도 친형처럼 따랐다는 황태성이 통일 논의를 위해 밀사자격으로 찾아오자 그를 체포, 고문한 끝에 총살했다. 황태성은 총살을 앞두고 ≪박정희에게 한 가닥 민족적 양심을 기대했었는데 일말의 양심도 없음을 확인했다. 결국 미국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내 나를 죽이려고 한다≫는 말을 남겼다.
▲황태성 총살을 보도한 신문
미국이 박정희 정권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는 하비브 전 주한미대사의 발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박정희 정권을 아마 향후 10여년 정도는 절대적으로 지지할 것이다. 지금 미국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베트남 전쟁이다. 그런데 일각에서 베트남전을 백인 대 황인의 인종전쟁으로 몰아가고 있다. 미국이 인종전쟁 비난에서 벗어나려면 같은 황인종이 미국 편에서 전쟁에 가담하는 수밖에 없다. 즉 한국군이 참전해야 인종전쟁이 이데올로기 전쟁으로 바뀐다. 이러한 목표를 고려하면 미국으로선 한국의 야당보다 박정희에게 더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 이제 박정희가 한국군을 베트남에 보내기로 결정했으니 미국에 그보다 더 도움이 될 만한 사람도 없다.≫ (출처 : 신동아 2004년 2월호 통권 533호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③>)
이처럼 5.16 쿠데타는 국민들의 민주화와 통일 열망을 짓밟고, 강력한 친미반공 정부를 세워야 했던 미국에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물론 박정희는 후에 쓸모가 없어져 미국의 버림을 받고 살해당했다. 외세의 힘으로 정권을 유지하면 어떤 최후를 맞는지 보여주는 전형이다. 박근혜 후보의 수첩에 이런 내용도 있는지 궁금하다. (2012.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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