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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독립 투쟁의 역사(7)

토론게시판

by 붉은_달 2012. 3. 2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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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디리파드(E.M.S. Namboodiripad)

번역 : 이병진(양심수)


IV 델리전투


1857년 5월 9일, 장교들에 대항하여 미루트(Meerut)지방의1) 세포이들이 봉기를 일으켰는데 이것이 “세포이 반란”의 시작이었다. 그 봉기군이 델리로 향했다. 델리에 도착한 봉기군은 아크바르와 아우랑지브의 후손인 바하두르 샤(Bahadur Shah)에게 그들이 시작한 반영 투쟁의 지도자가 되어달라고 호소하였다.

바하두르 샤는 늙고 멍청하였다. 그는 그의 선대들이 이룩했던 전통들과 명예를 지키지 못했다. 바하두르 샤는 몇 십 년 동안 인도를 통치했던 무갈황제들의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것 외에 더 이상 내세울 게 없었다. 달리 말하면, 그는 무갈제국의 껍데기였다.

그러나 그 껍데기조차도 반영 투쟁의 날카로운 무기가 되었다. 약하고 늙었지만, 그는 마지막 무갈 황제였다. 그리고 델리와 그 주변 지역의 인민들의 사회와 행정체제의 상징이었다. 반영 투쟁을 조직한 지역의 군인들과 시민대중들이 그의 이름을 따랐다.

영국이 벵갈과 그 주변지역에서 델리 황제로부터 디와니로 인정받아 통치자가 되었다는 것은 앞에서 살펴보았다. 명목상이지만, 그것은 비하르, 오리샤와 기타 지역들의 지배권을 영국이 델리 황제에 인정받은 것이다. 한편 벵갈에서는 황제 직속의 지방관인 나와브가 영국의 지배를 인정함으로써 영국이 지배자가 되었다.

이것이 황제 또는 그의 지역 대표자들로부터 동인도 회사가 권력을 획득하는 초기 단계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이 시기에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들의 전략은 황제를 거스르지 않고 심지어 복종하는 시늉을 하며 왕자들 및 나와브들과 정치-군사적 동맹을 맺는 것이었다. 영국이 지배권을 확립할 수 있었던 제국의 모든 변방지역들의 정세는 그런 정책의 결과였다.

같은 시기에 영국은 델리 황제의 지배력이 미치지 않았던 남인도에서 그 곳의 왕자들 및 나와브들과 동맹을 맺어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그 왕자들과 나와브들 가운데에는 명목상으로 황제에 충성하는 하이데라바드(Hyderabad)의 니잠(Nizam)도 있었다. 그는 델리와 계속해서 싸워온 마라타(Maratha)2)들‘처럼’ 보였다. 그러므로 델리 황제의 통치권이 미치지 않거나 단지 명목상 그의 밑에 있던 왕자들과 여타의 사람들이 지배하는 지역들에서 영국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세포이 반란”의 중심지로 지목된 그 지역들의 정세는 총체적으로 달랐다. 그 지역들의 인민들에게, 델리 황제는 먼 지배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몇 세대 동안 황제의 권위 아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엘리트 계급은 행정 체제의 일부분으로서 여러 의무와 책임들을 방면 받았고, 그런 공헌에 대한 보수로 현금, 토지, 혹은 다른 수당과 이권을 얻었으며 권력과 직위를 얻었다. 그런 엘리트들 가운데 무슬림들은 무갈 황제 하의 행정이 자신들의 것이라며 만족했었다. 한편 힌두들은 비록 종교가 다를지라도 총애와 존중을 받을 것이라 확신했다. (반힌두주의자였던 아우랑제브 지배 하에서조차 몇몇의 힌두들은 높은 지위들을 누렸다.) 그러므로 델리 황제는 종교에 상관없이 엘리트 계급들로부터 지지를 받는 행정 수반이었다.

이점을 잘 이해하는 영국은 “세포이 반란”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황제를 온화하게 대하였고 그에게 복종하였다. 델리 황제에 대한 영국의 태도가 바뀌자 북인도에서 세포이들과 시민봉기자들의 반영 감정이 불길처럼 일어났음을 이미 지적하였다. 황제에 종속된 왕자들과 나와브들, 그들에 복종하는 탈루크다르와 다른 봉건 귀족들에 대한 영국의 태도 역시 비슷하게 변했다.

영국은 동인도와 남인도의 사회 경제적 구조를 전환하여 그들에게 우호적인 인민 계층을 만들고 난 후 그 지역에서 권력을 공고히 한 후에야 델리와 주변 지역의 봉건 지주들, 왕자들 및 나와브들에 대처하기로 했다.

그런 결정에 따라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났는데 즉, 영국이 황제에게 알현하고 조공 등을 바쳤다는 점은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다. 그와 함께 영국은 왕자와 나와브들이 후계자로 채택되어 오랜 기간 누리고 있던 관습적인 권리와 이권들을 박탈하였다. 게다가 영국은 비리들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왕자와 나와브들의 행정 기능들을 감시하였고, 행정권을 자신들에 이전하였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델리 황제, 왕자들과 나와브들을 적대하여 보이지 않는 공격을 하였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영국은 그러한 공격을 하기 전에 동쪽과 남쪽 인도에 그들의 통치권을 이미 통합시켰다. 펀자브, 네팔, 북-서 변방 지역까지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조차 영국이 통치하였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서 영국이 델리 황제와 이웃 지역들의 봉건귀족들의 도움과 협조를 받았다.

그 목표가 완성되자, 오직 델리의 황제와 그 주변 지역의 지배자들이 장애물로 남았다.

대결적인 국면에 들어서자 영국이 다른 지역들의 엘리트 계급과 병사들의 도움을 확보하려는 것이 명확해졌다. 그렇게 되자 그들은(세포이들: 번역자) 델리와 그 주변 지역의 지배자들에게로 돌아섰다. 그 이유 때문에, 앞 장에서 기술했듯이, 1857-59년 투쟁과 인민들의 봉기는 주로 그 지역에 한정되었다. 다시 같은 이유 때문에 세포이 반란이 적어도 한정된 그 지역들에서 광범위한 인민대중들의 협력 속에 진행되는 동안에, 농촌과 도시의 빈민들과 중간 계급들도 영국에 대항하는 투쟁들을 하였다.

그 지역들만 고려한다면, 그것은 진짜 인민들의 운동이었다. 그것은 영국의 공격과 억압을 받은 델리의 황제, 왕자들, 나와브들, 탈루크다르 그리고 여타의 봉건 귀족들만의 저항이 아니었다. 그 지역 안의 인민 대중들의 생활양식은 델리의 황제가 최상층에 위치한 봉건적 요소들의 지배에 기초하였다. 봉건귀족들의 지배를 파괴하는 일은 인민들의 생활양식을 무너뜨리는 것을 뜻했다. 또한 그것은 전체 인민들이 몇 세대 동안 살아왔던 그들의 생활양식의 변화를 강제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일반 인민들의 봉건적 요소들을 급격하게 지지하는 것으로 표출된 반영 감정의 물결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인민들은 그들의 전통적 지도자들로써 황제를 포함한 봉건귀족들을 바라보았고 그래서 그들이 조직한 반영 투쟁에 참여하였다.

앞 장에서 인민들의 봉기들을 동반했던 세포이 반란의 모습을 보여주는 증거로써 몇 가지 사건들을 특별히 언급하였다. 영국 관리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관공서에 불을 질렀다. 대중들 역시 금융업, 상업을 통한 폭리 등으로 신흥 부자(Nouveau riche)가 된 이들을 지원하는 기록들을 파괴하였다. 그러한 사건들은 봉기한 인민들이 전통적인 봉건귀족들이 아니라 영국 행정가들의 그늘 아래서 살쪄가는 신흥 엘리트들을 공격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 엘리트 계급의 재산들을 파괴하는 동안에, 봉기자들은 그들의 지도자로 잔시(Jhansi)의 라니(Rani), 마라타의 페쉬와(Peshwa)3)가 된 나나 사에브(Nana Saheb) 같은 전통적 엘리트들을 따랐다. 델리로 행진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미루트에서 일어난 세포이들이 악바르와 아우랑제브의 후손을 계승자로 옹립하려 한 것이 그런 것의 일부분이었다. 영국은 봉기가 북인도 전체에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알았다. 영국은 무굴 황제가 명목적인 존재로만 지내길 원했지만, 바하두르 샤를 인도 군인들의 영국에 대한 저항을 지도하는 왕자들 및 나와브들의 우두머리로 보는 인민들을 두려워했다. 결국 영국은 어떠한 비용을 치르더라도 황제의 수도인 델리를 접수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황제”를 포로로 잡았다. 한편 저항하는 세포이들은 델리를 영국에게 양도하지도 허락하지도 않기 위해 항전하였다.

결과적으로, 몇 주 동안 지속된 “델리 전투”는 1857년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전투의 정치적 측면이었다.

델리가 함락되고 (무굴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번역자) 바하두르 샤를 옥에 가두었다고 하여 세포이 반란과 인민들의 봉기가 무력 진압되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몇 세대 동안 황실의 수도인 델리가 함락되고 무굴 제국의 수반인 황제가 포로로 잡힘으로써 세포이들과 인민 대중 양쪽 모두에게 봉기의 도덕적 정당성이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사태가 이와 같이 발전되자, 세포이와 인민들은 봉기를 오랫동안 지속시킬 수 없었다. 봉기의 중심들이 하나씩 무너졌고 마침내 봉기의 지도자들 역시 투항하거나 붙잡혔다.

델리 전투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바하두르 샤와 그의 가문의 역할이었다. 황제와 그 가족들은 외국 지배자들과 대면하는 것에 대해서 준비가 없었는데 일가의 명예와 위신을 유지하는 것에서도 그러했다. 바하두르 샤가 봉기군의 지도자로 옹립되는 것을 동의한 것은 병사들과 민중들의 압력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그는 그들의 지도자로서 비공식적으로 남아 있는데 동의하였고 선전포고문에 서명하였으며 투쟁이 고조됨에 따라 대중들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 투쟁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그는 (실제는 그의 부인을 통해서) 그의 생명을 구하고 가능한 많은 재물을 위해서라면 영국과 기꺼이 협상을 하였다. 포로로 잡혀 델리 성에 갇혀 있는 동안, 그리고 악바르와 아우랑제브의 후계자로서 재판을 받을 때 봉기군들의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의 이름을 사용하게 허락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반영 행위를 하지 않았다며 결백함을 주장한다. 이것은 바하두르 샤 개인의 수치와 항복이 아니라 그가 대표하는 계급의 수치와 항복이었다.

나나 사에브와 잔시의 라니 역시 같은 계급에 속해 있었지만, 이들은 독립 투쟁의 역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렇지만, 그들 역시 그들이 속했던 계급의 다수에 의한 배신으로 결국 패배하였다. 봉기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다수는 봉기군 편에 서는 것을 거부하였고 외국인들을 도와 봉기군들을 진압하였다. 중요한 시기에 적에게 항복한 바하두르 샤와 적군의 편에선 봉건귀족들로 구성된 그 계급이 그 당시 사회의 정점에 있었다. “최초의 독립투쟁”이라는 성격을 지닌 운동에는 그와 같은 근본적인 취약점이 있었다. <노사과연>


※ 타이핑을 도와주신 ‘덕’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최상철)


1)역주: 인도 우타르 프라데시(Uttar Pradesh) 주의 작은 도시다. 델리에서 약 60km 정도 떨어져 있다. 

2)역주: 인도 중서부 데칸 고원을 중심으로 고유한 언어와 전통문화를 갖고 있는 민족이다. 마라타 족은 게릴라 전법과 경기병대의 기습작전에 능하였다. 무갈 제국에 대항하여 힌두 왕국을 세워 끊임없이 전쟁을 하였다. 무갈 황제들은 마라타 족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였다. 동인도 회사도 마라타 족과 힘들게 싸워 겨우 뭄바이만을 얻을 수 있었을 만큼 마라타 족은 용감한 민족이었다. 

3)역주: 마라타 국의 실권자인 수상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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