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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는 전쟁전야①]누가 남북관계를 단절시켰나

토론게시판

by 붉은_달 2012. 3. 2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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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남북공동선언과 10.4선언의 밝은 미래가 남북을 비추던 것이 불과 몇 해 전 일이었다. 2007년 10월 4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더불어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에 서명한 노무현 대통령의 상기된 표정이 국민들의 마음에 생생하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집권한 이후 ‘남북관계 발전’은 ‘남북관계 파괴’로, ‘평화번영’은 ‘전쟁위기’로 뒤바뀌었다.


5.24조치로 시작된 관계단절

 

남북관계 단절은 이명박 정부의 5.24조치로부터 본격화되었다. 5.24조치란 2010년 5월 24일, 이명박 대통령이 용산전쟁기념관에서 천안함 침몰의 원인이 북한이라고 주장하면서 북한이 천안함 침몰을 사과하기 전에는 남북관계를 개선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5.24조치의 근거가 된 것은 천안함 합동조사단의 잠정 결론이었다. 하지만 천안함 침몰원인에 대한 여러 이견들이 상당한 여론을 형성하고 있었고 국방부의 조사결과는 국민들의 신임을 받는데 실패하였다. 


결국 5.24조치는 오히려 이명박 정부에게 악재로 작용하고 말았다. 당시 시점이 지방선거를 불과 1주일 앞둔 상황이었으므로 5.24조치는 결국 지방선거를 노린 북풍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어버렸고 그 역풍으로 한나라당은 지방선거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5.24조치는 단순한 지방선거용만은 아니었다. 6.2지방선거가 끝난 지 2년이 다 되어가지만 이명박 정부의 5.24 조치는 아직도 기능하며 남북관계를 철저히 가로막고 있다. 


천안함에 더해진 연평도 포격전


천안함 침몰사건은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달구었으며 북한 공격이 맞느냐를 두고 법적공방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명박 정부는 2010년 11월 23일, 서해상에서 남북간 해상분계선 분쟁이 일고 있던 연평도 해역에 K-9 자주포를 무더기로 발사해 북한의 응전을 불러오고 말았다.


북한군의 방사포가 170여발이나 남측 진영에 떨어졌다. 북측의 전파교란시스템에 의해 해병대의 대응포격은 무력화되었다고 한다. 연평도의 해병대 진지가 피격되었으며 연평도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기어이 충돌을 불러 온 위험천만한 대북정책을 재검토할 대신 그동안 줄기차게 요구하던 천안함 사과 요구에 연평도를 추가하는 것으로 응대하였다. 섣부른 대북대결정책으로 아까운 인명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태 진정에 나서기보다 대결정책을 오히려 더 강화한 것이다.


한반도의 서해지역은 이명박 정부가 그렇게 군사훈련을 맹렬히 벌이지 않아도 군사적 긴장이 원래부터 첨예하던 지역이었다. 1998년과 2002년의 서해교전은 남북 군인들의 군사적 대응이 유혈충돌을 빚어냈던 것이다.


정부가 수천만 국민의 생명을 책임지겠다는 입장이 있다면 일단 유혈사태를 빚어낸 서해지역에 대한 합리적인 대책을 세웠어야 했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7년,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라는 합리적 대책에 합의하였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남북 두 정상이 합의하였던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폐기한 것으로도 모자라 북한의 거듭된 경고를 무시하고 해병대의 포격훈련을 고집하다가 유혈충돌 사태를 빚고 말았다.


문제는 이명박 정부의 향후 대응이다. 서해가 분쟁수역으로 있는 이상 연평도 포격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려면 남북 쌍방이 서해에서 자극적인 군사훈련은 피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이명박 정부는 그 무슨 복수심을 내세우며 천안함 침몰 2주기가 되는 3월 26일을 ‘응징의 날’로 선언하였는데 복수는 필연코 복수를 낳을 수밖에 없으며 결코 평화를 보장하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가 서해문제에 대해 합리적 대책을 세우려했다면 재발방지 약속을 제시했어야 옳다. 이를테면 남측도 이제 서해에서 자극적인 포격을 하지 않을 테니 북측도 응당한 재발방지 대책을 세우라고 요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포격을 자제하는 것이 아니라 서해 5도 지역에 서해방위사령부를 구성하는 것으로 대답하였으며 연평도 일대에 대규모 화력훈련을 지속하면서 서해 긴장을 오히려 더 악화시키고 있다. 국지적 충돌은 언제든 전면전으로 확대될 수 있다. 38선 부근의 크고 작은 무장충돌이 결국에는 전면전으로 터져버렸던 1950년 한국전쟁이 우리민족에게 주는 역사적 교훈이다.


거부당한 북측의 대화제의


한반도에 심상찮은 전쟁위기가 고조되자 북한은 2011년 1월 5일을 기해 ‘정부, 정당, 단체 연합성명’을 발표하였다. 북한은 정부당국 뿐 아니라 민간진영에게까지 폭넓은 대화협상을 제안하였으며 이명박 정부가 그토록 요구하던 천안함, 연평도 문제도 “일단 만나서 의논하자”며 대화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정부는 북한의 대화제의도 간단히 거부해버린 채 대북군사훈련에 매달렸다. 북한의 대화제의는 2011년 2월, 한미연합군의 키리졸브 훈련으로 되돌아왔다. 이명박 정부는 2011년 8월에는 을지프리덤가디언 훈련을 벌였으며 서해5도 방위사령부를 대폭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며 북한을 연일 자극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명박 정부의 강경일변도의 대북대응은 뿌리 깊은 대북우월의식과 대미추종의식이 빚어낸 결과이다. 한 마디로 이명박 정부는 아무런 구체적 타산과 정세분석도 없이 한미동맹만 있으면 북한을 이길 수 있다, 북한을 압박하면 금방 붕괴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에 의존하고 있다.


한반도 안보문제는 2011년 1월, 미-중 정상회담 자리에서까지 거론될 만큼 한반도를 뛰어넘어 국제적 현안으로 부상하였다. 북미대화 재개와 6자회담 재개 문제는 이미 국제적 관심사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달라지는 국제형세는 관심도 없이 한미동맹에만 의존하면 북한을 이길 수 있다는 초등학생 수준의 정치적 안목으로 대북대결정책을 지속하였다.


한심한 돈봉투 사건


2011년 5월에 접어들어서야 이명박 정부 내에서도 이러다 동북아에서 외교적으로 고립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5월 19일, 청와대 김태효 대외전락비서관은 통일부 김천식 정책실장과 국가정보원 홍창화 국장과 함께 비밀리에 북한과 접촉을 시도하였다.


이 자리에서 북측대표가 “우리가 공격하지도 않은 천안함에 대해 사과할 수 없다”고 주장하자 김태효 대외전략비서관은 “그렇다면 제발 북측에서 보기엔 사과처럼 안 보여도 남측에서 보기엔 사과처럼 보일 수 있는 절충안이라도 제시해 달라”며 북측에 매달렸다고 한다. 이러는 와중에 김태효 비서관은 북측대표에게 돈봉투를 내밀다가 오히려 북측대표에게 호되게 역공을 당하고 말았으며 북한이 이를 폭로해버려 세계적 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북한의 폭로에 대해 이명박 정부는 진의가 왜곡됐다고 해명했다. 바꿔 말하면 사실관계는 맞다는 것이다.


청와대 비서관이 나라와 민족의 중대현안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돈봉투를 내민 이유는 무엇일까? 남측의 주장대로 떳떳한 회담경비의 지불이라면 굳이 봉투의 형식을 띠지 않고 실무진들이 계좌로 입금했으면 그만일 것이다. 관련 경비를 책임자가 직접 봉투로 지급하는 것은 이명박 정부가 그토록 주장하던 ‘투명한 대북접촉 원칙’에도 맞지 않는 것이다.


최후통첩 9개질의


시사주간지 시사인 234호에 따르면 그동안 남북 사이에 네 차례나 비밀 접촉을 해 합의를 보았으나, 결국 남측이 다 뒤집었으며 류우익 통일부장관이 취임한 후 남북접촉을 시도했지만 북한은 “류(우익 통일부)장관과 합의해봤자 김태효가 뒤집어버리는 것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월간 신동아 2010년 통권 613호에도 이명박 정부가 북한의 뒤통수를 때렸다고 할 만큼 비밀 접촉을 통한 합의사항을 손쉽게 뒤집었다는 보도가 실렸다.


이처럼 대화에 진정성을 보이지 않으면서 대결만 고집하자 북한은 결국 이명박 정부와 “상종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그 결정판으로 공개질의서를 발표했다. 북한이 발표한 9개항의 질의는 1) 북측 최고지도부에 대한 비난에 대해 사죄 2) 6.15 선언 이행 3) 천안함 연평도를 거론치 말 것 4) 대북군사훈련 중단 5) 한반도 비핵화에 성실히 나설 것 6) 대북심리전을 중단할 것 7) 남북협력을 재개할 것 8) 평화협정 체결에 나설 것 9) 국가보안법을 철폐할 것 등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9개항에 대해 답변할 대신 대북대결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2월 20일에는 서해 대잠수함 훈련을 벌인 데 이어 3월 26일을 ‘응징의 날’로 규정한 것이다.


지금 남북 사이에는 어떠한 의사소통 경로가 없다. 대화통로가 없으며 오로지 대결, 보복, 응징 따위만 존재한다. 어느 한 쪽의 군사적 우발행동이 일어나도 이는 전면전으로 확대될 위험성을 안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남북관계를 대화국면으로 연착륙시킬 수 있는 기회들이 있었다. 2009년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당시 북한이 특사조문단을 보냈을 때도 그랬고, 2011년 1월 ‘정부, 정당, 단체 연합성명’을 발표할 때도 그랬다. 심지어 2011년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급서 당시에 조문 문제만 현명하게 해결했어도 극적인 반전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북측의 대화요구에 강경대응으로 화답하였으며 결국에는 위험천만한 군사적 충돌이 예견되는 전쟁정세가 펼쳐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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