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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유럽, 북아프리카, 중동 그리고 위스콘신

토론게시판

by 붉은_달 2011. 4. 11.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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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콘신 시위 군중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현상황에 대한 간단한 각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채만수 소장


3년여 전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대대적인 경제위기가 발발했을 때, 그리고 그 위기가 작년에 그리스를 위시한 (남부) 유럽 국가들의 재정위기로 발전했을 때, 우리가 강조하고 또 강조했던 것 중의 하나는 바로 1930년대의 대공황을,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귀결되었는가를 상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이 대공황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최후 중 최후의 단계로서의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파탄을 입증하는 것이란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물론 우리만의 것일 수 없었다. 이 사회에서 ‘진보적’이라고 호가 난 일부 소부르주아 지식인들이야 그 원인과 의의를 단지 ‘신자유주의의 문제’로, 혹은 ‘신자유주의적 정책과 금융관행’의 문제로 왜소화시켰지만,1) 평소 공황의 필연성을 극구 부인해오던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조차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대의 공황’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 그 표현들이야 어떻든 현 위기가 자본주의적 생산체제 그것의 명운과 직결되어 있음을 분명 인식하면서 수조 달러의 엄청난 자금을 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물론 지나가는 말처럼 하는 소리이긴 했지만, 극우 언론 <<조선일보>>조차 1930년대의 대공황이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사 최악의 파괴와 살육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2) 만큼 사태는 엄중하고, 그만큼 저들의 위기의식도 깊다.


그런데 최근 수개월 동안의 부르주아 언론 보도를 보면, 부르주아 세계경제가 혹, 저들의 표현을 빌리면, “바닥을 찍고” 회복 중에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각국의 정부와, 무엇보다도 IMF 등 국제기구들이 특히 앞장서서 ‘지난 xx분기의 세계 경제성장률이 몇%였다’느니, ‘2011년의 평균 성장률은 4.몇%로 예상된다’커니, 운운하고 있으니 말이다. 더구나 저들이 발표하는 한국경제의 실적과 예상치는 그보다 훨씬 높다. 게다가 국내의, 그리고 미국과 유럽의 몇몇 거대 독점자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기록적인 판매를 기록하고, 기록적인 이윤을 긁어모았음을 자랑스럽게 발표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또 다른 한편에서는, 저들의 그러한 태평가(太平歌)와는 전혀 반대의 현상, 사태들이 벌어지고 있다. 고율의 실업률이 장기간 지속되고 있고,3) 그에 따라 노동자ㆍ인민 대중의 빈곤화가 광범하게 확대ㆍ심화되고 있으며, 그에 의해서 강요받는 노동자ㆍ인민의 투쟁, 아니 대중봉기가 세계 곳곳에서 속출하고 있는 것이다.


튀니지에서부터 폭발하기 시작하여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여러 국가들을 휩쓸고 있는 노동자ㆍ인민의 봉기는 우리 사회에도 널리 보도되고 있다. 많은 부분에서 잘못된, 조작된 정보가 넘치고 있고, 특히 리비아에서의 그것과 관련에서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는 <<한겨레>> 등의 보도조차 무비판적으로 서방 제국주의 언론의 시각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지만, 아무튼 널리 보도되고 있고, 널리 알려져 있다. (이들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의 봉기에 대해서는 여기에 함께 게재되는 권정기 편집위원장의 ‘토론회 발표문’에 상세히, 비판적으로 논급될 것이다.)


거기 비해서 미국 중북부의 위스콘신(Wisconsin)주에서, 5대호 주변의 공업 중심지의 하나에서 벌어진 노동자ㆍ민중의 투쟁은, 한편에서는, 중동과 아프리카에서의 투쟁에 가려서, 다른 한편에서는, 가능한 한 대중의 시선을 집중시키지 않으려는 부르주아 언론의 소극적 보도에 의해서, 우리 사회에서는 특히 그다지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위스콘신 노동자ㆍ민중의 투쟁은, 그것을 촉발한 이른바 ‘예산수선법안(budget repair bill)’의 내용과 의의 때문에도, 그에 반대한 노동자ㆍ민중의 대대적이고 완강한 투쟁 때문에도, 그것을 주목하고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 다만 지금은 개인적으로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상세한 분석은 다음 기회로 넘길 수밖에 없는데, 그리하여 그 의의를 간단히만 얘기하자면 이렇다.


극우적 경향의 신임 주지사 스콧 워커(Scott Walker)가 지난 2월 11일에 발의한 이 법안의 핵심 내용은 위스콘신주 공공부문 노동자들 175,000명의 임금인상률의 한계를 미국 정부 발표의 물가상승률로 법률을 통해서 제한하고, 그리하여 노동조합의 단체교섭권을 무기력화시키려는 것인데,4) 그 배경에는, 일반적으로 지적되지 않고 있는 점이지만, 바로 주(州) 재정의 압박, 주 재정의 위기가 있다. 즉, 예의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파탄이 그 배경에 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미국의 노동운동은 무기력하기 그지없었고, 특히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에 때로는 암암리에, 때로는 노골적으로 협조해온 미 노총 AFL-CIO는, 국제적으로도, 미국 내에서도, AFL-CIA라는 비아냥을 사왔다.


그런데 이번 위스콘신에서의 투쟁, 그 주도(州都) 매디슨(Madison)에서의 투쟁은 사뭇 달랐다. 1월 3일에 스콧 워커 주지사의 취임 반대 시위로부터 시작된 노동자들의 투쟁은, 2월 11일 워커 주지사가 ‘예산수선법안’을 발표하고 주 의회에 그 통과를 요구하자 격렬해지기 시작한 투쟁이 2월 15일엔 주 의사당을 점령하는 사태로 발전하여 수만 명의 노동자, 청년, 학생들이 18일간이나 의사당을 점령하였다. 3월 9일과 10일에 상하 양원이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노동자ㆍ민중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공공부문 노동자들뿐 아니라 사적 부문의 수많은 노조와 노동자들이 이 투쟁을 지지하고 동참해왔으며, 수많은 고등학생들, (욕먹을 소린지 모르겠지만, 정치의식ㆍ사회의식이 상대적으로 낮은) 프로 미식축구나 농구선수 조합들까지 투쟁에 참여해왔다. 그리고 주(州)의 경계를 넘어 미국 전역에서 원정투쟁과 동조투쟁이 벌어져 왔다. 그리고 위스콘신 AFL-CIO가 사실상 투쟁의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위스콘신 노동자ㆍ인민의, 위스콘신 AFL-CIO의, 그리고 그를 지지ㆍ지원하는 미국 전역의 노동자들의 투쟁이 AFL-CIO가, 나아가 미국의 노동자계급 일반이 전투적ㆍ혁명적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될 것인지, 아니면 아직 단발성(單發性)의 투쟁으로 그칠지 ―― 그것을 판단할 수 있기까지는 아직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투쟁의 의의를 강조하는 데에 조금도 주저할 이유가 없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바로 그 배경, 그 원인에 얽힌 성격 때문이다.


다름 아니라, 재정위기!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파탄!


극우적 법안을 밀어붙이고 있는 주지사 스콧 워커나 주의 상ㆍ하원 의원들은 단순한 개인적 성격이나 취향을 드러내고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은 부르주아 사회의 산물이고 그 위기의 한낱 도구(道具)일 뿐이다. 그런데 재정위기, 재정압박에 시달리는 것은 위스콘신주만이 아니다. 캘리포니아주의 재정파탄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 모든 주, 아니 연방 정부 자체를 압박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아니, 실은 사실상 자본주의 국가 정부 전체를 압박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오늘의 남부유럽 국가들, 오늘의 북아프리카와 중동, 오늘의 위스콘신은 부르주아 국가들 전체의 내일이고, 사실은 아직 잔잔한 음률로 시작되고 있는 그 서곡일 뿐이라는 뜻이다.


부르주아지는, 부르주아 국가는, 원하든 원하지 아니하든, 그 길로 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현재의 위기상황, 대공황은 그들로 하여금 그 길을 줄달음쳐가게 몰아가고 있다.


이미 사실상 모든 나라가 재정위기를 향해 줄달음쳐왔다.5) 그런데 그들 대부분의 국가는 공황의 압박으로 파산해가는 독점자본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즉 자본주의적 생산의 수명을 억지로 연장하기 위해서, 천문학적 규모의 자금을 살포해가지 않으면 안 된다. → 재정의 압박ㆍ위기가 가중된다. → ‘긴축정책’을 펴지 않을 수 없고, 그 내용은 사회보장의 파괴, 노동자ㆍ인민 생활수준의 인하이다. → 노동자ㆍ인민의 저항이 격화될 뿐 아니라, 생산과 소비 간의 격차, 즉 과잉생산의 위기가 격화된다. → 동일한 과정이 보다 대규모적으로, 보다 증폭된 규모로 반복ㆍ반복된다. ―― 그러다 보면 얼마 못가서 ... !!!


인류사에 대한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의 최대의 공헌, 최대의 역사적 임무는 노동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 즉 인류의 자유의 왕국을 위한 물질적 기초, “새로운 생산형태의 물질적 기초”의 창출이다.6)


그런데 자본주의적 생산의 현 발전단계는 그것이 이미 그 역사적 임무를 다하고, 이제 역사의 저편으로 퇴장해야 할 때임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아니, 사실은 이미 1930년대에 그랬어야 했다는 것이 역사의 쓰라린 경험이 말해주는 바다. 앞(주2)에서도 본 것처럼, 극우 중의 극우 언론조차 ““1930년대 대공황이 세계적으로 정치ㆍ경제 위기를 확산시켜 제2차 세계대전이란 격변을 낳(았다)”고 말하고 있지 않던가?!


자본주의적 생산체제 속에서 발전하는, 그러나 결국은 그것을 발전시킨 체제 그것과 양립할 수 없는 모순에 빠지는, 인류의 자유의 왕국을 위한 물질적 기초, “새로운 생산형태의 물질적 기초”로서의 노동생산력의 최근의 발전과 관련해서는, 저들이 자랑하는 과학기술혁명을 특히 주목해야 한다. 이 과학기술혁명의 성과 자체는, 부르주아지 스스로의 표현을 빌면, ‘고용 없는 성장’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즉, 사회 성원의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물질적 생활수단의 생산을 갈수록 더 적은 수의 사람의 노동만으로 가능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아니 갈수록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실업으로, 반실업으로, 극한의 빈곤과 절망으로 떠밀려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의 발전이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귀결될 것인가에 대해서 이미 150여 년 전에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만일 생산력의 발전이 노동자의 절대적인 숫자를 감소시킨다면, 즉, 사실상 전국민이 보다 적은 시간에 그 총생산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면, 그 발전은 혁명을 야기할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인구의 다수를 폐기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 안에 다시 자본주의적 생산의 독특한 제한이 나타나고, 그것[=자본주의적 생산: 인용자]이 결코 생산력의 발전과 부의 생산에 있어서 절대적인 형태가 아니며, 오히려 일정한 시점에서 이 발전과 충돌하게 된다는 것이 나타난다. 부분적으로는 이 충돌은, 노동자 인구의 이런저런 부분이 그 낡은 취업양식에서는 과잉화하는 데에서 기인하는 주기적 공황들 속에 나타난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제한은 노동자들의 과잉시간이다. 사회가 획득하는 절대적인 과잉시간은 자본주의적 생산과는 어떤 관계도 없다. 생산력의 발전이 자본주의적 생산에[=자본가들에게: 인용자] 중요한 것은 단지 그것이 노동자계급의 잉여노동시간을 증대시키는 한에서이지 그것이 물질적 생산 일반을 위한 노동시간을 축소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은 대립 속에서 운동한다.7) (강조는 인용자.)


부르주아지는 이 모순, 이 충돌을 극한까지 몰고 왔고, 또 몰아 가고 있다. 이것이 지금의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상황이다. <노사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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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이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비판은, 채만수, “새로운 대공황과 그 역사적 의의”(<<노동사회과학 제1호: 공황과 사회주의>>, 2008, pp. 9 이하) 참조.


2) “1930년대 대공황이 세계적으로 정치ㆍ경제 위기를 확산시켜 제2차 세계대전이란 격변을 낳은 것처럼 전례 없는 이번 금융위기도 전쟁에 비견되는 사태를 유발할 수 있다고 퍼거슨 [하바드대: 인용자] 교수는 경고했다”(이용수, “‘악의 축’보다 더 위험한 ‘격변의 축’: 종족 갈등·강대국 영향력 퇴조에 금융위기 직격탄”, ≪조선일보≫ 2009. 2. 18.)거나, “1937년에 2차 경제위기가 다시 찾아왔다는 점에서 대공황의 궁극적 극복은 뉴딜정책이 아니라 2차 대전 발발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장용성 연세대 언더우드 특훈 교수(美로체스터대 교수), “뉴딜정책, 절반은 실패였다”, ≪조선일보≫ 2009. 4. 4.)는, 그리고 “결국 10년이 넘는 경기침체에서 미국을 살려낸 1등 공신은 뉴딜보다는 전쟁(2차 대전)이었다는 게 다수 경제학자들의 평가”이며 “전쟁 덕에 제조업이 대호황을 누리는 계기를 잡았었다”(송희영 논설실장, “루스벨트의 뉴딜, 이명박의 뉴딜”, ≪조선일보≫ 2009. 1. 17.)는 발언들을 상기하라.


3) 예컨대, 미국의 실업률은 이번의 대공황이 폭발하기 전에는 5%대였는데, 금년 2월에는, 지난 3월 10일의 미 노동부의 발표에 의하면, “지난 1월의 9%에서 8.9%로” ‘호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통계조차도 사실은 이른바 ‘경제활동인구’의 축소, 즉 이른바 실망실업자의 증대에 따른 통계의 마술일 뿐, 실질 실업률이 10%를 훨씬 넘는다는 것, 그리고 가까운 시일 내에 그것이 호전될 가능성이 사실상 없다고 하는 것은 부르주아적 분석과 전망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4) <<노동자 교양경제학>>에서 소위 ‘생산성임금제’의 기만성을 설명하면서 인플레이션과 관련하여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부르주아 국가의 인플레이션 통계, 물가 통계는 크게 축소 조작되고 있고, 따라서 임금인상의 상한선을 물가상승률로 제한한다는 것은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이 급격히 저락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5) 예컨대, 유럽연합의 최고의 경제 강국 독일의 누적 재정적자도, 유럽연합 단일통화 유로(Euro)의 출범조건이었던 ‘GDP의 60% 이하’라는 상한을 이미 오래 전에 훨씬 넘어 섰다.


6) “신용제도가 과잉생산이나 상업에서의 과도한 투기의 주요한 지렛대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단지 그 성질상 탄력적인 재생산과정이 여기에서는 극한까지 강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강행되는 것은 사회적 자본의 커다란 부분이 그것의 소유자가 아닌 사람들에 의해서 충용되기 때문이다. 즉, 이 사람들은 소유자 자신이 기능하는 한 자기의 사적 자본의 한계를 세심하게 생각하면서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업에 열중하기 때문이다. ... 신용제도는 생산력의 물질적 발전과 세계시장의 형성을 촉진하는데, 이것들을 새로운 생산형태의 물질적 기초로서 어느 정도의 높이에 달하기까지 만들어내는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역사적 임무이다. 그와 동시에 신용은 이 모순의 폭력적 폭발, 즉 공황을 촉진하고, 따라서 또 낡은 생산양식의 해체요소들을 촉진한다.”(<<자본론>> 제3권, MEW, Bd. 25, S. 457.)


7) <<자본론>> 제3권, MEW, Bd. 25, S.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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