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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회는 박근혜의 스승이자 멘토

토론게시판

by 붉은_달 2012. 8. 1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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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사회연구소



군부독재의 실세들로 국민정서로 용납할 수 없는 7인회 인물들이 박근혜 진영에 포진해 있다. 민주당 박지원 원내대표는 5월 26일 “박 전 위원장에게 7인회가 있는데 면면을 보면 수구꼴통이고 도저히 대한민국을 맡길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박근혜측은 7인회의 부각을 상당히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이다. 무엇보다 박근혜 의원측은 박근혜의 측근인 이정현 의원을 통해 “7인회라는 말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며 7인회의 존재를 부인한 것이다. 이정현 의원은 7인회에 대해 “당의 몇몇 원로 되시는 분들이 자발적으로 친목 모임을 하고 가끔 만나 서로 점심을 하는데 한두번 오찬에 가 뵌 적이 있다”고 변명하였다.


 






이에 박지원 민주통합당 원내대표는 5월 29일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박근혜 전 위원장이 해괴망측하게도 ‘7인회’에 대해 ‘그런 일이 없다’고 한다”며 “엄연히 존재하는 7인회를 없다고 부인하는 것은 이제 검증이 시작된 ( 박근혜 전 위원장의) 진실성에 큰 구멍이 뚫린 것이라 할 수 있다”고 대응하였다.

7인회는 박근혜에게 어떤 존재일까? 7인회와 박근혜의 관계를 파헤쳐보자

박근혜와 일생을 함께 한 7인회

7인회 구성원들은 모두 박정희 정권과 가까운 인사들이다. 이들의 박정희 정권 당시 직함을 살펴보면 청와대 경제수석(김용환)과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 부장(김기춘), 법무부 법무실 검사(현경대), 조선일보 정치부장(최병렬)과 조선일보 청와대 출입기자(안병훈), 하나회 육군 중령(강창희), 현역군인(김용갑)들이었다. 

7인회의 결성 시점은 명확치 않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들 모두가 박정희 군부통치에 적극적으로 부역한 인물들이며 아직까지 박정희 시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란 점이다. 

이 가운데 7인회에서 가장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은 가장 나이가 많은 김용환 전 장관이다. 김 전 장관은 박정희의 최측근으로 분류된다. 이에 따라 김 고문이 박 전 위원장의 유년시절부터 지금까지 함께 해왔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정치권의 공통된 해석이다. 

CBS 도성혜 기자는 새누리당 관계자의 말을 빌어 김용환 고문을 평하길 “이미 80세를 바라보는 분들이 무슨 자리 욕심이 있겠냐”며 “김용환 고문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자신에게 보내준 신임을 생각해 어떻게든 박근혜 전 위원장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고 눈을 감아야 된다는 사명감 때문에 박 전 위원장을 돕고 있을 뿐”이라고 밝혔다고 보도하였다.

또한 7인회 성원이자 초원복집 사건의 주모자인 김기춘 전 장관은 정수장학회의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했다고 알려져 박정희 정권에 대한 결집도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박근혜 위원장과 7인회의 관계가 단순한 연합, 야합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다. 7인회는 하나같이 박근혜가 박정희를 보좌하였다고 알려진 1970년대, 청와대에 출입하던 권력실세들로 70년대부터 박근혜와 인연을 맺어 온 40년지기라고 할 수 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측근의 총탄에 사망하자 박근혜는 오갈 데 없이 전두환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처지에 빠졌다. 이후로 1998년, 박근혜가 정계에 입문할 때까지 박근혜의 근 18년 인생은 그야말로 미궁에 빠져 있다. 

한편 7인회 구성원들은 노태우, 김영삼 정권 시절, 막강한 권력실세로 출세하였다. 검찰총장(김기춘), 공보처 장관(최병렬), 총무처장관(김용갑), 조선일보 부사장(안병훈), 국회의원(김용환, 강창희), 민정당 정책위원회 부의장(현경대) 등 권력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이들은 90년대 내내 박근혜 의원을 보살피며 깊은 신뢰관계를 형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일요시사의 이주현 기자는 부모님을 총탄에 잃은 기억이 있는 박근혜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약한 편인데 수십 년 간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은 7인회 원로그룹에 대해선 각별하게 대했다고 보도했다. 권력의 눈치 속에 안가에서 은둔생활을 전전할 때, 7인회가 박근혜의 뒤를 보아주며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박근혜의 믿음을 얻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박근혜와 고락을 함께한 7인회

7인회는 2007년 대선국면에서도 박근혜를 도왔다. 7인회 수장격인 김용환 전 장관이 박근혜 경선캠프 고문으로 결합하였다. 안병훈 전 부사장은 박근혜 캠프 선대위원장을 역임했었다. 캠프 운영을 총괄하는 본부장을 맡은 것이다. 최병렬 전 대표는 박근혜 캠프에서 공동상임고문을 지냈고, 현경대 전 의원의 경우 박근혜의 외곽조직인 '한강포럼'을 주도한 인사다. 

박근혜에 대한 정책 조언은 7인회 중심인 김용환 전 장관이 가장 두드러진다. 박근혜를 위한 친목단체 ‘상록포럼’ 상임고문이기도 한 김용환은 박근혜 의원이 이재오, 정운찬 등과 대립각을 세울 때면 날 선 발언으로 상대를 공격하며 막후에서 박근혜를 든든히 도와주는 역할을 해왔다고 한다. 또한 2010년 말부터 박근혜에게 (좌클릭) 정책기조로 변화가 필요하다고 조언해왔으며 평소 “박근혜 시대가 올 것이라 굳게 믿는다”는 말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7인회의 정치경력은 박근혜의 흥망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최병렬이 2004년 탄핵역풍을 맞아 한나라당 대표에서 물러날 때, 최병렬의 후임이 바로 박근혜 의원이었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2005년 7월 6일, 당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 소장에 7인회 성원인 김기춘 의원을 내정했다. 박 대표는 당 상임운영위원회에서 김기춘 의원을 소장 후보로 단수 추천해 추인을 받은 것이다. 

2007년, 대선경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패하자 7인회도 권력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안병훈 조선일보 전 부사장은 2008년 총선 당시 한나라당 비례대표 신청을 했었으나 박근혜를 도왔다는 이유로 찬밥 대접을 받기도 했다. 박근혜 의원으로는 늘 미안한 마음을 느낄 법 하다. 현경대 전 의원은 지난 2008년 총선에서 친박계로 몰려 한나라당 공천에 떨어진 바 있으며 이에 한나라당을 탈당,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전력이 있다. 

그러나 2012년 4월 총선에서 박근혜가 부상하자, 7인회는 다시금 권력중심부에 다가서고 있다. 2012년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충청지역에서 의외의 선전을 벌이며 불리한 정국을 뒤집었는데, 7인회의 충청지역 영향력이 지대하다는 점을 결부시켜 보아야 한다. 김용환, 강창희가 자민련 계열 인사들로 충청권을 박근혜 지지세로 만드는데 전력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박근혜가 새누리당의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취임 한 2012년 초, ‘하나회’ 출신의 강창희 의원은 5공실세 ‘하나회’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공천권을 얻어 대전에 출마했으며 이후 19대 국회의장이 되었다. 

한편 현경대 전 의원은 새누리당으로 복당이 승인되었으며 새누리당의 후보로 4월 총선에 나서기도 하였다. 70대임에도 불구하고 새누리당에서 공천을 얻어 제주에 출마한 현경대 전 의원이 선거에서 떨어졌기에 망정이지 현경대 의원도 당선되었더라면 7인회 내에서 현경대와 강창희 간에 국회의장 싸움이 벌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김용환 전 장관과 동서지간인 이한구 의원은 4.11 총선 이후 새누리당 원내대표 자리를 꿰찼다. 

박근혜, 신뢰를 저버리나

지금껏 살펴본 바에 의하면 박근혜 의원과 7인회의 관계는 단순히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아져서 1-2년 협력하는 관계를 뛰어넘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2012년 4월 총선에서는 ‘좌청원-우용환’ 설이 나돌았다. 7인회 수장 김용환 고문과 더불어, 지난 2008년 18대 총선에서 친박연대의 돌풍을 일으킨 서청원 전 대표가 박근혜의 핵심 측근이라는 설이다. 

그러나 박근혜 측은 7인회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일자 즉시에 이들과 거리를 두며 7인회 존재감을 소멸시켰다. 새누리당 박근혜 의원은 5월 28일, “7인회라는 말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부정했다. 박근혜 의원은 “당의 몇몇 원로되시는 분들이 자발적으로 친목 모임을 갖고 가끔 만나 서로 점심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며 “그분들이 초청을 해 한두 번 오찬에 가 뵌 적이 있다”고 말했다고 대변인 격인 이정현 의원이 전했다. 이 의원은 그러면서 “소위 ‘멘토 그룹’ 운운하는 것은 잘못 알려진 내용”이라고 말했다. 

이정현 의원은 7인회에 대해 “모르는 이야기”라며 발뺌하였다. 서병수 사무총장도 라디오 인터뷰에서 “실체가 없는 7인회를 두고 박 전 위원장의 정치적 멘토라든지 후원 성격을 갖는다고 공격하는 것은 정치 도의를 넘어선 것”이라고 반박했다. 5월 29일, 한겨레신문에 따르면 친박계의 다른 의원도 “7인회는 김용환 고문이 자신의 위상을 과시하려 언론에 내보이면서 논란이 커진 것”이라며 “실제 영향력은 그 정도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7인회 논란이 벌어진 지 하루 만에 이들이 ‘멘토’가 아니라고 선을 그은 것이다. 신중한 박 전 비대위원장으로서는 신속하고 명백한 부정이다.

극우성향의 유신인물들이 박근혜 주변에 비춰서 대선에 도움될 것이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김용환 전 장관이 제 입으로 7인회의 실체를 공개한 것도 이같은 박근혜의 “거리두기“가 일면 섭섭하게 다가온 데 대한 반응일 수도 있다. 

박근혜가 7인회의 존재를 거부하는 것은, 그 동안 강조해 오던 신뢰의 정치를 저버리고, “표 계산의 정치”를 흉내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대통령의 꿈에 방해가 된다고 해서 일생을 두고 은혜를 입은 7인회도 매몰차게 뿌리치는 것이다.

박근혜는 자신의 70년대 유신과거를 묻어두고, 심지어 이명박 정부와도 일변 다른 듯한 모양새를 취하려 노력 중인데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7인회가 박근혜에 대한 묵은 정을 내세우며 대선가도에 기웃거린다면 박근혜로는 곤혹스러울 것이다. 

7인회를 보면 박근혜가 70년대 유신공주였으며 지금도 군부독재의 극우정객들에 휩싸여 있는 구시대 정치인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박근혜는 극우보수 성향의 정치인이다. 눈앞의 지지율에 눈이 멀어 일생을 두고 은혜를 입은 7인회를 외면하는 것은 그가 강조해 오던 “신뢰의 정치”를 스스로 저버린 정치적 배신이다.


* 출처 : 우리사회연구소 http://urisociety.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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