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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를 좌우하는 수구보수 7인회

토론게시판

by 붉은_달 2012. 8. 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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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의 대선주자인 박근혜 의원이 논란에 빠졌다. 박근혜 의원은 7월 16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5.16쿠데타를 두고 “돌아가신 아버지로서는 불가피하게 최선의 선택을 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언급한 것이다. 그녀의 일천한 민주의식은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에 상당한 논란을 일으켰다. 

박근혜 의원은 먼저 정권을 찬탈한 가장 엄중한 불법행위인 쿠데타를 정당한 행위로 비호하였다. 헌정질서를 지킬 의지가 없는 것이다. 만일 현 시점에서 “민생경제 회복”을 외치며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다면 박근혜 의원은 과연 이에 맞서 결사항전하겠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지적은 공적 자리에서 박정희를 개인적 호칭인 “아버지”라고 언급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가족적 이미지를 부각시켜 자신의 5.16 발언에 대해 일종의 면죄부를 받으려는 꼼수로 볼 수 있다. 아울러 박근혜 의원이 그만큼 70년대 유신정권의 그늘에 묶여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박근혜는 70년대 수준의 정치인인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최근에는 70년대 유신정권의 주역들이 박근혜 의원 주변에 포진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박근혜 의원의 고문 역할을 하고 있는 김용환(80) 전 재무부 장관이 5월 24일,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박근혜를 돕는 친박계 원로그룹 '7인회'의 실체를 언급한 것이다. 

김용환 전 장관은 "사람들이 7인회라고 부르는데 가끔 만나 식사하고 환담한다"며 7인회를 소개하였으며 "나를 포함해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 안병훈 전 조선일보 부사장, 김용갑 전 의원,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 현경대 전 의원, 강창희 전 의원"이라며 구체적 실명을 거론하였다. 이들은 지난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에도 박근혜 후보 캠프에서 선거대책위원장과 고문 등의 직책을 맡았던 바 있다. 

또 김용환 전 장관은 "4.11 총선이 끝난 뒤에도 박근혜 전 위원장과 한 번 모였다"고 해, 7인회가 지난 과거의 모임이 아니라, 총선이 끝난 지금까지도 유지되는 살아있는 조직임을 밝혔다. 

박근혜 의원의 배후에 밀착된 7인회 인물들을 살펴보자. 

히틀러에 비교되는 수구꼴통 대부 최병렬 

7인회 가운데 정치성향으로 보나 정치행적으로 보나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다. 

최병렬은 1974년, 조선일보 정치부장으로 유신의 “정당성”을 찬양하고 민주화투쟁을 깎아내리는 등 조선일보의 정치기사를 이끌었다. 전두환이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하자 이를 정당화하고, 1980년 광주 5.18 항쟁을 색깔론, 지역주의 공세로 뒤덮는데 가장 앞장선 신문도 조선일보였는데 당시 조선일보 정치부장이 최병렬이었다. 그러한 언론조작의 공로였는지, 최병렬은 1980년, 조선일보 편집국장으로 승진하였으며 1985년에는 전두환 직계인 민정당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다. 

1987년 6월항쟁으로 민주화투쟁이 본격화되자 최병렬의 극우성향은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1988년 최병렬은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으로 정치권 동향을 노태우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1988년에는 문화공보부 장관에 발탁되어 방송언론 탄압을 주도하였다. 

1990년, 최병렬은 공보처 장관으로 서영훈 KBS 사장의 사퇴를 주도하였다는 의혹을 받았다. 당시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은 KBS 노조와 함께 “권력에 의한 방송 재장악 음모가 고도의 정치공작 차원에서 자행되고 있음을 국민 앞에 고발한다”며 최병렬 공보처장관의 해임을 촉구했다. 그러자 최병렬 장관은 1990년 4월 30일, KBS에 공권력을 투입하며 방송노조의 투쟁을 강경진압하였다. 사복경찰관들과 ‘백골단’이라고 불리는 ‘체포조’ 1천여명은 사원들이 투쟁을 하고 있던 서울 여의도 본관에 난입해 무려 333명을 연행했다. 경찰이 평화적으로 농성하는 언론종사자들을 수백명이나 잡아간 것은 세계 언론사에 유례가 없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최병렬 장관은 나치의 히틀러에 비교되며 “최틀러”라는 별칭까지 얻게 된다. 

1990년 12월, 최병렬은 노동부 장관으로 옮겨 언론탄압에서 노동탄압으로 자리를 옮겼다. 최병렬 노동부 장관은 1991년, 전국 주요공단지역을 돌며 “임금인상 자제, 불법쟁의의 공권력 투입” 등 협박성 발언에 매달려 노동계의 반발에도 불구, 총액임금제를 관철시켰다. 

최병렬은 진보운동이 가열차던 노태우 정권 시기, 강영훈 총리, 이승윤 부총리, 이종남 법무부장관, 최영철 노동부 장관과 더불어 시국관련 5부장관으로 활동하며 노태우 정권의 민주화운동 탄압을 진두지휘하였다. 

1994년 최병렬은 관선 서울시장에 발탁되면서 보수진영 내에서 인지도를 높이기 시작하였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는 한나라당 공동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며 이회창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앞장서기도 하였다. 

1997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패배하자 최병렬은 한나라당 대표를 맡아 정권을 잃은 한나라당을 이끌었다. 최병렬은 2000년 6.15 공동선언 국면에서 “정상회담은 성공적으로 치러져야 한다”고 언급하면서도 “김대통령은 할 말은 하고 요구할 것은 요구해야 한다”고 강조해 남북화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최병렬은 노무현 정권에 대한 반감이 높기로도 유명한 수구보수인사다. 2003년 7월 8일, 최병렬은 노무현 대통령을 겨냥해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고 한데 이어 8월 20일에는 “솔직히 말해 대통령 잘못 뽑았다”며 노골적인 반 노무현 정서를 드러내었다. 10월 21일 최병렬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지금의 대통령에게 앞으로 4년 이상 더 정권을 맡기면 나라가 거덜이 나지 않겠느냐”면서 “대통령의 이 같은 행위를 끝나게 만들 수 있도록 힘을 모아 달라”고 말했다. 

급기야 최병렬은 2004년 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진두지휘해 홍사덕, 조순형, 유용태와 더불어 “탄핵 4인방”으로 규정되기도 하였다.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최병렬은 “지금은 전쟁과 흡사한 상황”이라며 “(대통령 탄핵을 결정한) 당론에 따르지 않을 경우 출당 및 공천박탈 등 강경대응하겠다”며 한나라당 의원들을 대통령 탄핵에 내몰았다. 또한 당시 박관용 국회의장이 경호권 발동을 머뭇거리자 직접 전화를 걸어 “나라를 구한다는 각오로 사회를 보라”며 국회의장을 압박하였으며 3월 12일 오후 기자간담회에서는 “국회에서 3분의 2로 가결됐으니 (노 대통령은) 헌재 판단 전에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말해, 노무현 대통령의 하야를 사실상 요구했다. 

그러나 민심을 거스른 최병렬의 탄핵발의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한나라당이 탄핵심판의 대상이 되어 16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에게 과반의석을 내주고 만 것이다. 

결국 최병렬은 당권을 박근혜 위원장에게 일임하며 모든 당직을 그만두게 된다. 그러나 그의 수구적 이미지는 나치의 히틀러에 비교되면서 국민들에게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유신헌법을 직접 만든 김기춘 

권력을 앞세워 진보진영을 탄압하는데서 최병렬 못지않은 인물이 김기춘이다. 김기춘은 유신이 한창이던 1974년 9월,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 부장을 역임하며 공안탄압을 주도하였다. 1980년에는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공안부장을 맡아 1991년 5월에는 노태우 정권에 의해 법무부장관에 발탁된다.

1960년, 고등고시 12회에 합격한 그는 71년 법무부 법무실 검사시절, 검사자격으로 유신헌법의 기초작업에 참여했다. 박정희 정권의 10월 유신헌법을 직접 만든 당사자란 뜻이다. 

이후 김기춘은 1974년 육영수여사의 저격범으로 문세광을 수사하면서 박정희대통령의 눈에 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에 오르게 된다. 김기춘은 1979년에는 청와대 법률비서관을 지냈고 1981년에는 법무부 검찰국장, 이후 서울중앙지검 공안국장을 담당한 7-80년대 대표적 공안검사였다. 노태우 정권이던 1990년에는 검찰총장에 이르는 등 군부정권에서 검찰권력 요직을 두루 섭렵한 인물이다. 

일례로 1990년 2월 13일, 김기춘 검찰총장은 “우리사회 각 분야에 침투한 좌익세력들은 국론분열과 체제전복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며 “검찰은 자유민주체제 수호를 위해 좌익세력의 발본색원에 힘쓰라”고 지시한 바 있는 대표적 공안통이었다. 

그러던 가운데 김기춘은 1992년 대선의 '초원복집 사건'의 당사자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당시 법무부장관이던 김기춘은 1992년 대선을 앞둔 12월 11일 오전 7시, 김영환 부산시장, 박일용 부산지방경찰청장, 이규삼 안기부 부산지부장, 우명수 부산시 교육감, 정경식 부산지방검찰청장, 박남수 부산상공회의소장 등과 함께 부산의 ‘초원복집’이라는 음식점에 모여 민자당 김영삼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우리가 남이가, 이번에 안 되면 영도다리에 빠져 죽자"라고 하며 당시 14대 대통령 선거에 영향을 미칠 목적으로 지역감정을 부추기자고 모의한 것이다. 

결국 김기춘 전 장관은 선거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구형받고 공직에서 물러났다. 1993년 10월 4일, 김기춘에 대한 변호사 등록이 허용됐으나 변호사 1백여명이 “과거 공안통치의 주역이며 대표적 정치검사의 변호사개업을 반대한다”는 집단성명을 내는 등 반발하고 나서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기춘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인 2004년, 국회법사위원장 자리에 있으면서 대통령 탄핵에 힘을 보탰다. 김기춘은 3월 17일, “노무현 대통령을 신문하게 되면 선거법 위반 등에 대해 조목조목 따져 탄핵의 정당성을 입증하겠다”고 말했다. 김기춘은 또 “내가 검사 시절 사건을 결코 호락호락 처리하지 않았다. 두고 봐라”며 대통령 탄핵에 자신감을 보인 수구보수세력의 대표적 인사였다. 

수구보수 대표정객 김용갑 

그 외에도 7인회에는 수구보수진영의 대표정객으로 김용갑 전 의원이 있다. 김용갑은 신군부의 실세로 통하던 육사 17기 출신이다. 그의 동기들 가운데 김진영, 허삼수, 허화평 등이 있다. 

김용갑 전 의원은 1985년 2월부터 국가안전기획부 기획조정실 실장을 지낸 대표적인 공안통이다. 김용갑은 6월 항쟁이 한창이던 1987년 6월, 청와대 민정수석에 있으며 대중투쟁 동향을 청와대에 보고하였다. 당시 김용갑은 집회대오가 농성투쟁을 벌이고 있던 명동성당을 직접 답사하며 민심동향을 분석하는 역할을 맡았다. 

1988년 2월부터 1989년 3월까지 제24대 총무처 장관을 지내는 등 노태우 정권의 실세로 군림하였다.

1996년, 신한국당 국회의원으로 국회에 입문한 김용갑은 대표적인 수구보수 국회의원으로 악명을 떨쳤다. 1997년 2월 25일, 김용갑은 국회에서 신한국당 최병렬 강용식 김기춘 박세환 정형근 의원 등 31명과 더불어 <나라의 안보를 걱정하는 의원모임> 결성식을 가졌다. 

특히 김용갑 의원은 2000년 한반도를 강타했던 남북정상회담에 극렬하게 반발하였다. 김용갑 의원은 2000년, 여당인 민주당을 “조선노동당 2중대”라고 발언하는 등 국회논란을 이끌었으며 11월 30일에는 국회 예산결산특위 질의에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대한민국 대통령인지 북한 지원을 위한 대통령인지 의심스럽다.”고 포문을 열었다. 또한 2001년 9월 23일에는 “대북 쌀 지원 철회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남북교류협력을 방해하는 데 앞장서기도 하였다. 

2001년 10월 19일, 김용갑은 “햇볕정책은 7000만 민족에게는 오히려 그림자정책이 될 수밖에 없다” “햇볕정책은 우리 사회 내 좌파세력의 활동공간만 넓혀준 완벽한 실패작이다” “정권이 앞장서 헌법정신을 부정하고 북한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을 사실상 인정하려 하는 것 아니냐”며 수구보수세력의 입장에서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을 맹비난했다. 

김용갑 의원은 또한 국가보안법 개정을 반대하다 실신하기도 하는 등 체질적인 반민주인사였다. 그를 비롯한 한나라당의 '통일과 안보를 생각하는 의원 모임'소속 의원 51명은 2001년 7월 12일, 당시 김대중 정부와 여당이 추진하고 있는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금 지급을 위한 법률 개정이 참전용사 등과 형평에 맞지 않는다며 반대 의견을 밝히기도 하였다. 

박정희 그늘 자민련의 김용환, 강창희 

이들 뿐만 아니라 7인회에는 김용환, 강창희 등 자유민주연합(자민련) 계열 인사들도 포진해 있다. 자민련은 1995년 3월 30일, 김종필 전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창당된 충청지역에 기반한 지역정당이었다. 김종필은 1971~73년에 공화당 부총재를 역임하고 1971년 6월부터 1975년 12월까지 국무총리를 지냈던 박정희의 최측근이다. 김종필은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3김시대”를 열기도 하였다. 박정희의 최측근들을 긁어모았던 자민련에는 당연히 박근혜와 가까운 보수인사들도 포진해 있었다. 자민련을 이끌었던 김용환, 강창희는 그 대표적 인물들이다. 

7인회 가운데 나이가 80으로 가장 많은 김용환 전 장관은 박정희 유신정권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을 거쳐 재무부장관을 지냈다. 1980년 신군부의 '숙정' 대상에 올랐지만 “3김시대”의 한 주역인 김종필을 따라 1988년 13대 총선에 신민주공화당 공천으로 충남 보령에서 당선된 이후 충청 지역주의를 이끌면서 4선을 했다. 그는 김종필의 최측근으로 자민련의 수석부총재를 맡으며 자민련의 2인자 역할을 하였다. 1997년 대선에서 DJP연합 출범 당시 핵심적 역할을 했지만 이내 김대중 정권을 비판하며 2001년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강창희는 7인회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나이가 낮은 인물이다. 육사 25기 하나회 출신으로 신군부의 막내 격인 강창희는 1980년 육군중령으로 예편한 이후 민정당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이번 4.11 총선에서 6선에 올랐으며 19대 국회의 국회의장에 선출되면서 박근혜 의원과 가까운 정치인임을 내외에 입증하였다. 

조선일보 안병훈과 제주 친박의 수장 현경대 

7인회의 또 한 성원인 안병훈은 유신 시절 조선일보 청와대 출입기자를 지내며 박정희와 박근혜를 지근거리에서 보아오던 인물이다. 안병훈은 후에 조선일보에서 발행인까지 지냈다. 지금은 도서출판 기파랑의 대표로 보수적 성향의 서적을 출간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기파랑은 바로 뉴라이트 단체가 출간한 대안교과서를 출판해 논란이 된 그 출판사이다. 

현경대는 박정희 정권 시절이던 1971년, 인천지방검사로 재직했던 자로 1977년 법무부 법무실 검사로 발령받으면서 권력에 가까워졌다. 1980년 서울지방검찰청 특수부 검사를 재직한 현경대는 이후 민정당 국회의원으로 출마해 1981년부터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88년에는 민정당 정책위 부의장, 1992년에는 국회 법사위원장을 맡았으며 1995년에는 민자당 원내총무를 맡기도 하였다. 

현경대는 제주출신의 검사로 1981년부터 제주지역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사실 제주지역의 친박계 수장이라 불릴 만하다.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7인회는 공통적으로 1970년대 박정희 정권과 이후 신군부 정권에서 핵심요직을 차지하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박정희 정권의 실세였던 이들은 청와대에 자주 출입하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장녀인 박근혜를 자연스레 알게 되고 가까워졌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6.15 공동선언을 반대하고 국가보안법에 근거한 유혈독재를 선호한 극우반북인사들이다. 이들은 또한 하나같이 민주화투쟁을 적극 저지하는데 앞장섰으며 민주화운동에 나선 이들에게 강경진압으로 화답한 파쇼인사들이다. 

2012년에 한국의 주요 대선후보의 지근거리에 이같은 극우파쇼정객들이 결집하고 있는 현상은 대단히 우려스럽다. 진즉 박물관에 처박혀 있어야 할 군부독재 시절의 퇴물들이 권력의 중심부에 다가서겠다며 나서는 모습은 전형적인 한국 정치의 후진, 퇴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곧 박근혜 의원의 정치적 성향이 유신정권의 성향과 동일하게 극우파쇼성향이라고 볼 수 있다. 2012년의 대선에서 70년대 수준의 후보를 낼 수밖에 없는 것은 궁지에 몰린 친미보수세력의 현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실례라 할 수 있다. 




* 출처 : 우리사회연구소 urisociety.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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