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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후조종자는 CIA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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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붉은_달 2011. 5. 23.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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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한호석의 진보담론 (158)
2011년 05월 23일 (월) 08:29:26 한호석 tongil@tongilnews.com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미8군사령관은 사전에 알았을까?

육군 소장 박정희와 그를 따르는 육사 8기생 장교들이 이끈 반란군이 1961년 5월 16일 새벽 서울을 점령하고 정권을 빼앗았다는 것이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진 5.16 군사반란의 실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알맹이가 아니라 껍떼기일 뿐이다. 사람들은 5.16 군사반란의 껍떼기만 보고 그것을 전부로 믿었다. 50년 동안 헤어나오지 못한 미몽에서 이제 벗어날 때가 되었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5.16 군사반란은 우리 현대사를 뒤엎어버린 큰 사건이다. 5.16 군사반란이 남긴 대미예속과 반민주독재와 반북대결이라는 3대 해악은 이 땅의 사회역사발전에 족쇄를 채웠다. 반세기가 지나도록 우리는 3대 해악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5.16 군사반란의 3대 해악을 청산할 때, 그 때 비로소 자주, 민주, 통일의 3대 과업을 실현할 수 있다.

껍데기 속에 감춰진 알맹이를 찾아내는 것은 역사학의 과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불행과 고통을 강요해온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전환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그것은 역사학의 영역을 넘어 사회변혁의 영역으로 들어선다. 이 땅에서 벌어지는 역사논쟁이 역사학의 쟁점을 다루는 학술논쟁이 아니라, 자주와 예속이 격돌하고, 민주와 독재가 대결하고, 통일과 반통일이 상쟁하는 정치투쟁의 한 형태로 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50년 묵은 5.16 군사반란의 껍떼기를 벗기고 알맹이를 찾아내려면, 1961년 당시 긴박하게 움직인 한미관계 동향에 관한 정보를 분석해야 한다. 얼핏 보면, 5.16 군사반란이 마치 반란군과 장면 정권 사이에서 일어난 것처럼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한미관계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50년 전의 한미관계 동향을 기록한 문서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누구나 짐작하는 것처럼, 미국의 비밀문서고에 들어있는 한미관계에 관한 문서들은 100년 뒤에도 공개되지 않을 것이다. 5.16 군사반란의 알맹이가 은폐될 수 있었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

미국 국무부가 편집한 ‘1961년부터 1963년까지 미국 대외관계(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제22권’에 들어있는 한미관계 외교문서철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5.16 군사반란을 전후하여 워싱턴의 국무부, 중앙정보국, 합참본부 등과 서울의 미8군사령부, 주한미국대사관 등이 교신한 전송문서(telegram)들이 그 문서철에 들어있고, 그들이 작성한 비망록(memorandum)과 정보보고서도 들어있다. 물론 이 문서철은 전문을 공개한 것이 아니라 국무부에서 발췌한 부분만 공개한 것이고, 비밀행위자들의 이름이 지워져 있다.

5.16 군사반란의 알맹이를 찾아내는 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한국군의 작전통제권과 고위지휘관 인사권을 행사하던 미8군사령관 카터 매그루더(Carter B. Magruder)가 반란모의를 사전에 알았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의 5.16 군사반란 개입여부를 밝혀주는 문제다. 이 문제를 해명하려면, 당시 한미군사관계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1961년은 6.25 전쟁이 정전상태로 들어선 때로부터 8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고, 당시 이 땅에는 50,000여 명이 넘는 미국군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지금도 똑같지만, 50년 전에도 한국군 작전통제권은 미국군사령관이 쥐고 있었다. 당시에는 아직 한미연합군사령부가 창설되지 않았으므로, 미8군사령관이 유엔군사령관 모자를 쓰고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행사하였다. 따라서 미8군사령관이 명령을 내리지 않으면, 한국군은 탄약고에서 실탄을 꺼낼 수 없었고 병영밖으로 작전기동을 할 수도 없었다.

둘째, 미국육군방첩대 한국현지사무소(U.S. Army Counterintelligence Corps Korea Field Office)는 미8군사령부를 거치지 않고 워싱턴에 있는 방첩대 본부에 직접 보고하고 그곳으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았다. 방첩대 본부장은 미국 국방장관에게 직보하였다. 방첩대(CIC)는 중앙정보국(CIA)의 선임기관으로서, 중앙정보국보다 더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황을 보면, 방첩대 한국현지사무소 책임자→방첩대 본부장→미국 국방장관으로 이어지는 직보체계가 가동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울에 있는 미8군사령관이나 워싱턴에 있는 미국군 합참의장은 그 직보체계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를테면, 당시 미국군 합참의장 라이먼 렘니처(Lyman L. Lemnitzer)는 5.16 군사반란이 일어나기 직전 서울을 방문하고 5월 15일에 워싱턴으로 돌아갔는데도 반란모의에 관한 정보를 전혀 듣지 못했는데, 이것만 봐도 미국군 합참의장이 직보체계에 포함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셋째, 1945년 8월 미군정에 의해 창설된 조선경비대 총사령부에서 정보국으로 첫 걸음을 뗀 한국군 정보기관은 같은 해 11월 말 육군본부 정보국으로 개편되었다. 6.25 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50년 7월 육군본부 정보국 안에 HID라 부르는 정보분견대 본부(Headquarter of Intelligence Detachment)가 추가로 설치되었는데, HID는 한국군 육군본부의 명령체계와 무관하였고 미국육군방첩대 한국현지사무소의 명령을 받았다. 이것은 미국육군방첩대 한국현지사무소가 HID를 통해 한국군의 사소한 움직임까지 낱낱이 감시하였음을 말해준다.

5.16 군사반란에 관한 역사자료를 통해 알려진 것처럼, 경기도 김포에 주둔하는 한국군 해병대 제1여단,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경기도 파주에 주둔하는 제6군단 포병단, 그리고 제30, 31, 33 예비사단과 제1공수특전단으로 구성된 반란군 병력은 장교 250명, 사병 3,500명이었다. 반란군은 포탄과 실탄을 지급받고 중무장하였다.

그런데 5.16 군사반란이 일어나기 1년 전 4.19 혁명이 일어났을 때, 계엄군이 서울에 출동한 과정은 이러하였다. 1960년 4월 20일 당시 주한미국대사 월터 매카나기(Walter P. McConaughy)가 국무부에 보낸 전송문서에 따르면, 4월 19일 이승만 정부가 시위진압을 위해 한국군 제15사단의 출동을 허락해달라고 미8군사령관에게 요청하였다. 그 요청을 받은 당시 미8군사령관 대행이었던 육군 중장 찰스 커밍스(Charles W. Cummings)는 매카나기의 동의를 얻고 계엄군 출동명령을 내렸다.

그와 달리, 1961년 5월 16일 새벽 미8군사령관 매그루더는 반란군에게 출동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1961년 5월 25일 매그루더가 합참의장 렘니처에게 보낸 전송문서에서, 반란군 지휘부가 자기 휘하에 있는 전방부대를 반란작전에 출동시킴으로써 주둔군사령관의 권위를 실추시켰다고 불만을 터뜨린 것은, 매그루더가 반란군에게 출동명령을 내리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미8군사령관이 명령을 내리지 않으면, 실탄도 지급받을 수 없고 병영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한국군이 어떻게 3,750명이나 중무장하고 한강인도교를 건너 서울 중심부로 쳐들어갈 수 있었을까? 주둔군사령관의 명령체계를 어기고 반란을 일으킬 만한 조건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미8군사령관에 필적할 만한 어떤 거물이 반란군 배후에 있지 않으면 반란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었다. 반란군 배후에 있었던 거물은 누구였을까?

주둔군사령관과 한국군 중령의 기이한 대면

5.16 군사반란의 알맹이를 밝혀줄 정보는, <조선일보>가 2011년 5월 12일부터 14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한 김종필 회고담에 들어 있다. 회고담에 따르면, 1961년 5월 19일 그는 매그루더의 호출을 받고 미8군사령관 집무실에 불려갔다. 매그루더가 박정희보다 김종필을 먼저 부른 것만 봐도, 반란주모자가 김종필이었음이 드러난다. 매그루더가 박정희를 만난 날은 5월 23일이다.

매그루더는 김종필을 보자마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내 지휘 하에 있는 부대를 맘대로 끌고 가서 뭐를 했다고? 혁명을 해? 마이어협정 위반이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노하여 호통을 치는 매그루더 앞에서 김종필이 취한 태도는 충격적이다. 김종필은 “그런 소리 하려고 오라 했냐. 말 다 했냐. 돌아가겠다”고 하면서 사령관 집무실에서 나가려고 하였다. 매그루더는 김종필에게 “전방부대 즉각 원대복귀시켜라”고 또 다시 소리를 질렀다. 매그루더는 대장 계급의 주둔군사령관이고, 김종필은 그의 말단부하인 한국군 중령이며, 김종필이 불려간 곳은 치외법권지역인 미8군사령부다. 매그루더는 미국군 헌병대에게 명령하여 김종필을 군령체계에 혼란을 조성하고 반란을 일으킨 중죄로 체포하여 군법회의에 넘길 수도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김종필은 너무도 당당하였다. 김종필은 누구를 믿었기에 자기에게 호통을 치는 주둔군사령관 앞에서 그처럼 당당할 수 있었을까?

김종필의 그런 태도보다 더 이상한 것은 매그루더의 태도다. 한참 호통을 치던 그는 김종필을 바라보다가 “오늘은 이걸로 끝내자”고 하였다. 일반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그 기이한 장면은, 매그루더가 김종필 배후에 자기가 도전하기 힘든 어떤 거물이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김종필 배후에 있는 거물의 존재를 의식한 주둔군사령관은 중죄를 저지른 자기 말단부하를 차마 체포하지는 못하고 호통만 치면서 사태를 수습하려는 것이다. 김종필 배후에 버티고 있는 거물은 누구였을까?

그런데 매그루더와 김종필의 대면에 대해 매그루더가 렘니처에게 보고한 내용과 김종필이 회고한 내용이 크게 엇갈린다. 1961년 5월 25일 매그루더가 렘니처에게 보낸 전송문서에 따르면, 매그루더가 반란군을 진압하지 않겠다고 보장하는 경우, 5월 23일 매그루더가 박정희와 만나 작성한 공동성명 초안을 반란군 지휘부가 채택할 것이라는 김종필의 발언이 매그루더에게 전해졌다. 그 말을 전해들은 매그루더는 김종필을 불렀고, 김종필은 5월 25일 평복차림으로 그 앞에 나타났다.

매그루더는 김종필에게 반란군의 일탈을 지적하였다. 반란군 지휘부가 전방부대를 제멋대로 출동시킴으로써 매그루더의 군령권을 훼손하였고, 반란군 지휘부가 매그루더의 허락을 받지 않고 한국군 고위지휘관들을 해임하거나 임명함으로써 매그루더의 군정권을 훼손하였고, 반란군 지휘부가 자기 상관들에게 하극상을 행하고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군사지휘관의 권위를 스스로 훼손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 지적을 듣고 난 김종필은 매그루더에게 군사반란의 정당성을 해명하였고, 매그루더의 작전통제권을 본의 아니게 위반하여 송구하다고 했고, 반란군이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매그루더는 김종필과의 대면에서 어떤 특별한 결론이나 합의를 내오지 않았다고 렘니처에게 보낸 전송문서에 적었다.

그러나 김종필은 매그루더와의 대면을 전혀 다르게 기억하였다. 그의 회고담에 따르면, 매그루더가 김종필과 대면한 날은 5월 25일이 아니라 5월 20일이다. 그 대면에서 구두로 합의한 5개 현안은, 매그루더가 5.16 군사반란을 인정한다는 것과 미국이 반란군을 지지한다는 것, 그리고 김종필이 서울을 점령한 전방부대를 원대복귀시킨다는 것, 한국군 고위지휘관 인사문제를 처리할 때 매그루더와 협의한다는 것, 부대가 이동할 때 미8군사령부의 지시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매그루더의 전송문서와 김종필의 회고담 가운데 어느 쪽이 진실에 가까울까? 매그루더는 반란군이 자기의 군령권과 군정권을 훼손하였는 데도, 반란군의 일탈을 전혀 통제하지 못한 무능한 지휘관으로 전락하였고, 얼마 뒤에 주둔군사령관직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난감한 처지에 있던 매그루더는 직속상관 렘니처에게 김종필과의 대면에 관해 보고할 때, 주둔군사령관이 미국군 말단부하도 아닌 한국군 말단부하와 대면한 것 자체가 위신을 잃는 것으로 여겼을 것이므로 자기에게 불리한 내용은 아예 빼놓거나 적당히 가공해서 보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양자대면에 관해서는 김종필 회고담이 진실에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주목하는 것은, 김종필 회고담에 나온 민감한 정치현안들은 주둔군사령관이 말단부하 중령 한 사람을 만나 합의할 만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 두 사람이 구두로 합의한 5개항은 매그루더가 김종필을 상대로 합의한 것이 아니라, 김종필 배후에 버티고 있는 거물을 상대로 합의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김종필은 주둔군사령관의 협상상대가 될 수 없었다. 김종필은 반란군의 일탈로 권위를 훼손당하고 노여워하던 매그루더를 진정시키기 위해 누군가가 매그루더에게 보낸 전령병(messenger)이었을 뿐이다.

김종필이 작성한 군사반란 계획서

김종필 회고담에 따르면, 장도영이 박정희에게 군사반란 계획서를 보여달라고 하였다. 당시 장도영은 육군참모총장이었고, 박정희는 2군 부사령관이었다. 박정희는 김종필에게 계획서를 장도영에게 보여주자고 하였으나, 김종필은 “뭘 믿고 주느냐, 그러다 일망타진된다”고 하면서 반대하였다. 그러자 박정희는 자기와 장도영이 “남이 모를 만큼 깊은 사이”이므로 자기를 믿고 보여주자고 하였다. 실제로 박정희와 장도영은 가까운 사이였다. “하는 수 없이” 김종필은 박정희에게 “3일 후에 반환받아 주십시오”라고 하면서 계획서를 박정희를 통해 장도영에게 건네주었다.

1961년 4월 26일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장 앨런 덜레스(Allen W. Dulles)가 작성한 비망록을 읽어보면, 1961년 4월 19일 장도영이 박정희와 만났을 때 군사반란 계획서를 건네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장도영에게 건네준 계획서는 “결국 끝끝내” 김종필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김종필 회고담에서 드러난 중요한 정보는 아래와 같다.

첫째, 군사반란 계획서 작성자가 김종필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회고담에서 “내가 만든 게 있긴 있었습니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계획서 작성자였음을 분명히 밝혔다. 김종필이 군사반란 계획서를 작성하였으니, 그가 주모자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김종필의 역할은 계획수립에서 끝난 게 아니다. 1961년 초 육군 중령 김종필이 부패한 군부를 바로잡겠다고 육사 동기생들과 함께 ‘정군운동’을 일으켰다가 하극상 사건으로 몰렸고, 그에 따라 자진 예편하는 형식으로 잠시 군복을 벗은 날은 1961년 2월 15일이다. 김종필 회고담에 따르면, 그는 군복을 벗고 이틀 뒤 대구에 내려가 2군 부사령관 박정희를 만났다. 김종필은 박정희에게 “서울에서는 조직을 상당히 했다”고 알려주면서, “30사단, 33사단, 그리고 서울에서 제일 가까운 6군단, 육군본부, 1군단사령부 내 동기생들과 상당히 깊숙이 얘기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정황을 보면, 김종필은 반란모의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둘째, 김종필이 작성한 군사반란 계획서에는 무슨 내용이 들어있었을까? 김종필 회고담에 따르면, 계획서에는 중앙정보부, 경제기획위원회, 국민운동본부를 창설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실제로 5.16 군부세력은 군사반란 직후인 1961년 6월 19일 중앙정보부(KCIA)를 창설하였고, 김종필이 초대 부장직을 맡았다. 그는 1963년 1월까지 중앙정보부장으로 있었다. 원래 장면 정부는 정보조사국을 설치하고 이후락을 국장으로 임명하였는데, 5.16 군부세력은 정보조사국을 폐지하고 이후락을 부패관리로 구속하고 중앙정보부를 핵심권력기구로 내왔다. 또한 5.16 군부세력은 군사정부에 경제기획원도 설치하였고, 새마을운동도 전개하였다. 이런 사실을 읽어보면, 김종필은 군사반란에 관한 전술계획만 세운 것이 아니라 군사정부수립에 관한 전략계획도 세웠던 것이 분명하다. 반란모의를 주도하고 군사정부를 설계한 사람이 박정희가 아니라 김종필이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셋째, 장도영은 김종필이 작성한 계획서를 돌려주지 않고 어떻게 하였을까? 장도영이 반란모의자가 작성한 비밀문건을 자신만 읽어보고 슬그머니 폐기하였을 가능성은 전무하다. 당시 장도영은 언론에 정체를 전혀 드러내지 않는 막후실권자 두 사람과 비밀리에 접촉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미국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장 피어 드 실바(Peer de Silva)이고, 다른 한 사람은 미국육군방첩대 한국현지사무소 책임자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 Hausman)이다. 김종필 회고담을 읽어보면, 미국 중앙정보국 한국지부가 장도영과 접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하우스만 회고담에 따르면, 하우스만은 장도영과 “매우 친했다.” 장도영의 아내와 하우스만의 아내는 “매 주말마다 모임을 가질 정도로 친해 서로가 가족끼리 돈독한 우의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처럼 장도영이 중앙정보국과도 접촉하고 미국육군방첩대와도 접촉한 것은 그가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였음을 말해준다. 오죽했으면, 1961년 5월 17일 매그루더가 렘니처에게 보낸 전송문서에서 장도영이 “두 얼굴을 가졌다”고 평하였겠는가.

위의 정황을 살펴보면, 장도영은 김종필이 작성한 군사반란 계획서를 피어 드 실바와 제임스 하우스만에게 각각 넘겨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미국 정보기관들이 반란모의 물증까지 확보하였음을 말해준다. 만일 반란모의자들이 미국 정보기관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반란을 모의하였다면, 물증까지 확보한 미국 정보기관은 그들을 모의단계에서 일찌감치 일망타진하였을 것이다.

두 개의 군부세력이 각각 반란을 모의했다

하우스만 회고담에 따르면, 그는 5.16 군사반란이 일어나기 45일 전인 1961년 3월 1일 반란모의에 관한 정보를 “상부에 보고했다”. 그의 직속상관은 워싱턴에 있는 미국육군방첩대 본부장이다. 1961년 4월 25일 중앙정보국장 덜레스가 작성한 비망록에 따르면, 당시 한국군방첩대가 반란모의를 조사하고 있었다. 5.16 군사반란 가담자 조병규의 회고담에 따르면, 1961년 5월 15일 “CIC 참모들이 쿠데타 추진세력의 주요명단을 가지고” 자기를 찾아왔는데, “쿠데타 세력이 구속직전 상태”에 있었다고 했다. 이것은 미국육군방첩대 한국현지사무소 휘하의 한국군방첩대 정보분견대 본부(HID)가 반란모의자 명단을 사전에 확보하였음을 말해준다. 반란모의는 미국 정보기관에 전면 노출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국군방첩대는 반란모의자들을 구속하지 않았다. 군사반란 계획서와 주모자 명단까지 확보해놓고서도 왜 구속하지 않았을까?

반란모의자들이 한국군방첩대에 전원 노출되었는데도 구속되지 않고 군사반란 계획을 계속 밀고 나간 것은, 그들이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의 배후조종을 받았거나 아니면 미국육군방첩대 한국현지사무소의 배후조종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가능성은 없다.

그러면 어느 정보기관이 군사반란을 배후조종하였을까? 이 문제를 밝혀줄 정보는 당시 중앙정보국장 덜레스가 1961년 5월 15일에 작성하여 이튿날 미국 대통령 존 케네디(John F. Kennedy)에게 상신한 비망록에서 찾을 수 있다. 비망록에 따르면, 미국 중앙정보국 한국지부는 1961년 4월 21일부터 반란모의 동향을 보고서로 작성해 중앙정보국 본부에 날마다 전송했는데, 비망록에는 두 개의 군부세력이 각각 반란을 모의하였다고 씌여있다. 김종필을 핵심으로 한 군부세력이 반란을 모의하였고, 그와 별도로 박병권을 핵심으로 한 군부세력이 반란을 모의하였다. 육군 중장 박병권은 전투병과교육사령관이었다. 육군 중령 김종필은 일제의 만주군관학교 출신 박정희를 반란군 지도자로 내세우려고 하였고, 육군 중장 박병권은 광복군 출신 극우민족주의자 이범석을 반란군 지도자로 내세우려고 하였다.

김종필이 회고담에서 박병권은 “크레퍼하고 접촉했는데 족청도 움직임이 상당히 활발했”다고 말한 것을 보면, 박병권은 미국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의 배후조종을 받으며 반란을 모의하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김종필 회고담에 나온 크레퍼는 비밀정보요원이 쓰는 가명인데, 그는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에 소속된 대령이었다. 김종필 회고담에 나온 족청은, 1946년 중반 미군정이 거금 500만 달러와 미군장비를 대주고 크레퍼를 고문으로 파견하고 이범석을 책임자로 내세워 창설한 극우조직 조선민족청년단의 약칭이다. 이런 정황을 보면, 1961년 당시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장이었던 피어 드 실바가 족청 출신 장교들의 지지를 받는 박병권과 비밀리에 접촉하면서 반란모의를 조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미국 중앙정보국 한국지부가 박병권과 접촉하며 반란모의를 조종하였으니, 김종필과 접촉하며 반란모의를 조종한 배후실체는 미국육군방첩대 한국현지사무소였음이 자명해진다. 다시 말해서, 김종필은 반란주모자였고, 제임스 하우스만은 배후조종자였던 것이다.

배후조종자의 충격적인 정체

미국육군방첩대 한국현지사무소 책임자 제임스 하우스만(1918-1996)은 누구인가? <한국일보>가 1990년 11월에 실은 연재기사 ‘한국 땅서 35년, 미군장교의 증언: 하우스만 회고록’에 그의 정체 일부가 드러나 있다. 하우스만은 “미군사고문단의 한국군 조직책임자”였으므로, 그가 한국군을 창설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충격적인 사실은, 그가 미군정 시기부터 6.25 전쟁 초기까지 남측 각지에 자행된 수많은 집단학살을 직접 현장에서 지휘한 학살범이라는 점이다. 그는 피살자 머리를 휘발유통에 담아 자기 집무실에 놓아두거나, 처형장에서 총살당한 시신에 권총을 쏘아대면서 자기 군복을 피로 적시는 등 끔찍스러운 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집단학살을 지휘한 나치전범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처럼 국제전범으로 처형당했어야 하였다.

그러나 미국군 지휘부는 6.25 전쟁 중에 그를 워싱턴으로 불러들여 국방부 한국정보과 과장에 임명하였다가, 1956년 3월에 미8군사령관 특별보좌관(special advisor)으로 다시 서울에 보냈다. 미8군사령관 특별보좌관은 위장명칭이고, 실제로는 미국육군방첩대 한국현지사무소 책임자로 파견한 것이다. 미국육군방첩대 한국현지사무소 책임자는 경무대(청와대의 당시 명칭)의 대통령 집무실을 제 방처럼 아무 때나 드나드는 특권을 누렸다. 최고권력자로 위세를 떨친 미8군사령관, 주한미국대사, 미국군사고문단장 3인방은 경무대의 대통령 집무실을 마음대로 드나들지 못하였는데, 유독 하우스만은 그 곳을 마음대로 드나들었으니 하우스만이야말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사실상 최고권력자였던 셈이다.

하우스만 회고담에 따르면, 그의 집무실은 미8군사령관 옆방이었는데, 그는 미8군사령관 명령체계에 있지 않았고, “내 나름대로 행동”하였다. 그는 영관급 장교였지만, 한국군 각급부대에 배치된 미국군사고문단 소속 중령들과 대령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영관급 장교인 그가 그처럼 대장급 사령관에 버금가는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국방부와 백악관의 확실한 보장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고, “창군 이래 많은 한국군 장교들의 미 군사학교 유학을 주선해주면서” 한국군 지휘부를 완전히 장악하였기 때문이다. 미8군사령부, 주한미국대사관, 중앙정보국 한국지부 등이 하우스만에게 정보를 요청해왔는데, 그는 정보제공으로 그들 부서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그는 1946년 8월 12일 미국 육군 대위 계급장을 달고 조선점령군사령부에 배치되어 조선경비대사령부를 창설한 때로부터 광주학살자 전두환을 대통령 자리에 앉히고 나서 1981년에 63세로 전역하기까지 무려 35년 동안 이 땅의 정치와 군사를 주물렀다.

하우스만 회고담에 따르면, 박정희는 5.16 군사반란 이틀 뒤에 하우스만 자택을 방문한 자리에서 “혁명위(반란군 지휘부를 뜻함-옮긴이)는 하우스만 당신 친구들이 거의 전부이니 당신네들 혁명이오”라고 말했다. 이것은 하우스만의 직속 하수인들인 한국군 정보국 출신 인맥이 5.16 군사반란을 일으켰음을 암시한 발언이다. 그렇게 말한 박정희 자신도 정보국 출신이었다.

하우스만이 5.16 군사반란 배후조종자였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정보는 그 자신의 회고담에 있다. 회고담에 따르면, 그는 5.16 군사반란이 일어나기 1주일 전부터 자신과 반란군 지휘부 사이에 연락장교 한 사람을 배치하여 구두메세지나 쪽지를 주고받으며 군사반란을 배후에서 조종하였다. 이를테면, 한국군 고위지휘관들의 동향에 관한 정보를 반란군 지휘부에 알려주어 누구를 해임하고 누구를 임명하라고 지시하였고, 명목상 반란군 지도자로 잠시 내세운 장도영을 끌어내리고 박정희를 반란군 지도자로 내세울 것을 지시하였을 뿐 아니라, 미8군사령부 영내에는 반란군 병력을 들여보내지 말 것과 반란군이 흰색 완장을 두르지 말 것 등 세심한 문제까지 지시하였다.

군사반란 직후 반란군 지휘부가 신경을 곤두세운 것은 군사반란에 대한 미8군사령부와 미국 정부의 견해와 태도였고, 특히 매그루더가 초기에 1군 사령관 이한림에게 명령하여 반란군을 진압하려는 강경한 태도를 취하였기에 반란군 지휘부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우스만 회고담에 따르면, 하우스만은 반란군 지휘부에게 미8군사령부와 미국 정부의 동향을 그때 그때 재빨리 알려주면서, 대처방법까지 지시하였다. 그것만이 아니다. 하우스만은 자기 휘하에 있는 한국군방첩대 HID 병력을 김종필에게 넘겨주어 중앙정보부를 창설하도록 하였다.

워싱턴에 나타난 배후조종자

하우스만은 1948년 말에 박정희의 목숨을 건져준 생명의 은인이다. 그 사연은 이러하였다. 하우스만 회고담에 따르면, 남조선노동당에 연계된 한국군 지휘관을 색출, 처형하는 이른바 ‘숙군작업’을 지휘하던 하우스만은 날마다 경무대에 들어가 이승만에게 진행형편을 보고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남조선노동당 연계사실이 드러나 군법회의에서 사형판결을 받은 박정희를 사면해줄 것을 이승만에게 요구하였다. 당시 하우스만은 ‘숙군작업’에 걸린 군지휘관들을 모두 처형하였으나, 체포당한 직후 남조선노동당에 연계된 군지휘관 명단을 방첩대에게 넘겨준 박정희만 살려주었다.

그런 과거경력을 지닌 박정희가 군사반란 이틀 뒤인 1961년 5월 18일 하우스만 자택을 찾아갔다. 그가 하우스만을 만난 목적은, 워싱턴에 가서 군사반란에 대한 미국의 승인을 받아달라고 그에게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박정희가 그런 부탁을 하기 오래 전에 하우스만은 군사반란에 대한 미국의 승인을 받기 위해 워싱턴으로 떠날 채비를 마쳤다. 1961년 5월 19일 하우스만은 “남의 눈에 뜨이지 않게” 워싱턴으로 떠났다.

하우스만은 워싱턴에서 누구를 만났을까? 그의 회고담에 따르면, “가장 먼저” 합참의장 렘니처에게 보고하였고, 그 다음으로 육군참모총장 조지 덱커(George H. Decker)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중앙정보국과 국무부, 그 외의 몇몇 요로를 찾아”가서 5.16 군사반란을 정당화하고 승인을 받으려고 애썼다.

하우스만의 그런 노력은, 케네디 정부가 5.16 군사반란을 승인하게 만든 결정적 요인으로 되었다. 1961년 11월 14일 박정희가 백악관에 들어가 케네디를 만난 것도 하우스만의 막후활동으로 가능하였다. 5.16 군사반란 배후조종자가 하우스만 자신이었으니, 그가 워싱턴을 급히 방문하여 자기가 조종한 군사반란을 정당화하고 승인을 받으려고 애쓴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시 국방장관 로벗 맥나마라(Robert S. McNamara)는 하우스만이 5.16 군사반란을 조종한 공로를 치하하여 “장문의 공적서와 함께 공로표창장”을 수여하였다.

세계 각국에서 일어나는 우익군사반란은 예외 없이 미국 중앙정보국의 지원과 조종을 받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다. 그런데 5.16 군사반란은 미국육군방첩대 한국현지사무소 책임자의 배후조종을 받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사건이었다. 이런 특이한 현상은 미국이 남측에 무거운 족쇄를 채워놓았음을 말해준다. 무거운 족쇄는 며칠 전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면에서도 발견되었다. 미국군이 엄청난 분량의 고엽제를 비롯한 살인적인 맹독성 화학물질을 땅에 파묻는 만행을 저질렀어도 ‘주둔군지위협정(SOFA)’의 족쇄에 채워진 이명박 정부는 미국군 기지 안의 매립현장에 접근하지도 못한다. 족쇄를 풀어야 치욕과 고통을 떨쳐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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