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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정치실험은 실패한 실험

토론게시판

by 붉은_달 2012. 9. 8.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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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동기 우리사회연구소 상임연구원


통합진보당 사태가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특히 유시민 전 공동대표는 7월 29일, 통합진보당 탈당을 기정사실화하며 새로운 대중적 진보정당의 창당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며 통합진보당 내 당원들에게 탈당을 선동하기에 이르렀다. 진보진영이 하나로 단결해도 힘든 판국에 다시 당을 쪼개고 나가서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시민 전 대표를 바라보는 진보인사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다. 마음을 추스르고 한시바삐 손을 잡아야 할 급박한 시기에,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다며 함께 손잡았던 동지들에게 정치적 사망선고를 내리는 행동은 어떤 논리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국민의식이 갈수록 진보화되어가고 있는 2012년에, 진보진영은 정작 대선국면을 주도하지 못하고 있다. 억장이 무너지는 정국현실은 무엇보다도 진보진영의 이른바 지도자들이 서로 감정이 상한 채 갈라져서 내부 논란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유시민 대표를 바라보는 진보인사들은 또한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스스로 주인공이 되기 위해 당을 갈아타는 행동으로는 어떤 정치실험도 성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54세, 젊지 않은 나이인데도 여전히 자기 당에 침을 뱉고 새 정당을 모색하는 행동은 측은하기까지 하다. 정치인이란 자못 도량이 바다같이 넓어 만 사람을 하나로 품어야 할 것인데도, 도량을 키우기보다 주도권에만 관심을 두고 있으니 일필휘지의 언변과 전직 장관이라는 사회적 위치가 무색하게도 유시민의 정치적 영향력은 날이 갈수록 사그라지고 있다. 



한국 자유주의 정치세력을 대표했던 유시민, 진보와 개혁을 넘나들며 통합진보당의 외연을 넓힐 수 있었던 유시민이었기에 그의 분열정치는 안타깝고 또 안타깝다. 한 때 촉망받는 정치지도자로, 대선후보로까지 거론되었던 유시민이 이처럼 무너져가는 원인은 무엇일까? 

1. 정의로운 자유주의자였던 청년 유시민 

유시민은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으로 정의감에 불타는 애국청년이었다. 그는 1980년 5월,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으로서 신군부 치하 5월 투쟁 당시 서울역 회군 반대파를 대표하기도 하였다. 1985년, 서울대 프락치사건으로 구속된 유시민이 재판과정에서 썼다는 “항소이유서”는 도덕적 양심과 사회적 정의감을 자극하는 화려한 언변으로 당시 대학가에서 널리 읽혔으며, ‘유시민’이란 이름을 세상에 알려 오늘날의 유시민을 있게 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항소이유서’가 계기였는지, 유시민은 1988년부터 이해찬 의원의 보좌관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학생운동에 몸담았던 유시민은 진보운동을 지속하지 못했다. 1991년 졸업 후 독일 유학길에 오른 유시민은 1997년,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유시민은 유럽유학 과정에서 대학운동과 결별하게 되었으며 귀국 후에는 지식인으로서의 사회활동을 모색하게 된다. 2000년부터 2001년까지 MBC 《100분 토론》의 사회자로 대중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며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 겸임교수로도 활동했다고 한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 등 각종 서적을 출판하며 저술가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2002년, 유시민은 개혁적 국민정당을 창당하며 당시 대통령 후보인 노무현을 지원하며 정치권에 뛰어들었다. 2003년 4월, 보궐선거를 통해 16대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2006년에는 참여정부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을 하기도 하였다. 

그는 정의로운 자유주의자였다. 그가 정치권에 입문한 2003년 4월 보궐선거에서 의원선서시에 국회의원의 권위의식을 타파하겠다며 캐주얼 콤비에 라운드 티를 입고 국회에 등원해 논란을 일으켰던 사건은 유명하다. 그는 또한 평소 자유주의적 소신을 바탕으로, 국기에 대한 경례는 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의 강제적 주입이기에 이를 굳이 강제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회의적 입장을 표명한 적도 있다고 한다. 

2. 네 번째 반복되는 유시민의 "정치실험" 

그러나 자유주의가 너무 지나쳤던 것일까, 그의 정치행보는 탈당과 창당의 연속으로 기록되고 있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바람이 불자, 당시 문필가였던 유시민은 2002년 8월, “바리케이드 앞에 화염병을 들고 다시 서는 심정”이라며 절필 선언을 하고 정치에 뛰어들었다. 2002년 10월, 개혁국민정당 창당을 주도했던 유시민은 새로운 정치실험을 선도하였다는 평가를 받으며 정치권의 유력인사로 부상하였다. 

노무현 정부는 자유주의에 기반한 개혁세력의 결집을 추구하며 열린우리당을 창당하였는데, 노무현 당선의 공로자로 인정받았던 유시민도 2003년, 열린우리당의 창당을 주도하며 집권여당의 유력인사, 차기 대권주자로까지 부상하였다. 2006년, 유시민은 노무현 정부의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내며 진보적 복지정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정권이 집권하자 유시민은 이른바 “친노세력”과 결별, 2009년에는 국민참여당 창당을 주도하였다. 그의 세 번째 창당이다. 

평론가들은 개혁세력의 정당 창당을 “정치실험”으로 평가한다. 명지대 김형준 교수는 이를 두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 민주당과 결별했다는 유 대표의 정치실험은 성공할 수 있을까?"라며 의문을 던지기도 하였다.

2002년의 개혁적 국민정당, 2003년의 열린우리당, 2009년의 국민참여당은 모두 유시민식 “정치실험”이었다. 일례로 열린우리당 김한길 원내대표도 "열린우리당 창당은 우리정치사에 기록될 정치실험이었다."고 평가하였다. 

통합진보당의 결성이야 민주노동당, 시진보 통합연대 등 여타 정치세력과 합의한 일정이라 하더라도 지금 거론되는 “탈당 후 새진보정당”은 유시민 전 대표의 입장으로 본다면 또 하나의 실험이고 모험의 연장일 것이다. 결국 10년만에 총 4차례의 정치실험을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한국국민은 누구나 정당활동의 자유가 있다. 그러나 정당정치는 정권을 획득하려는 세력의 정치활동이다. 5천만 국민들의 삶과 미래, 희망을 규정하는 정권을 획득하기를 바라면서 4차례나 탈당과 창당을 반복하는 모습에서는 올바른 행보라는 찬사보다는 독단적이고 경솔하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만일 어떤 정치인이 국민의 삶, 진보적 국민들의 지지와 성원을 실험대상으로 여기고 탈당과 재창당을 반복하는 “정치실험”을 즐긴다면, 그런 정치인은 국민의 지탄을 받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3. 자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권위 

유시민 전 대표의 “정치실험” 실패를 두고, 시대를 잘못 만난 비운의 정치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유시민식 탈당과 재창당은 운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반복될 수밖에 없는 문제점을 띠고 있는 잘못된 정치행보다. 

다양한 진보세력이 한 자리에 모인 통합진보당은 자유주의 정치를 추구하는 참여계 뿐 아니라 확고한 정치개혁의 방향과 노선을 가지고 있는 진보진영도 중요한 축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물론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주의 진영과 대중조직의 사회적 정치활동의 자유도 함께 강조하는 진보진영은 분명 합류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있었기에 통합이 가능했다. 

그 연결고리는 바로 민주적 의사결정구조였다. 

민주적 의사결정이 가능해지려면 바로 “자신이 옳다”는 식의 권위주의가 타파되어야 한다. 그래서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노무현 정부 인사들이 자유주의 국가의 전제조건으로, 한국사회의 주된 정치개혁의 과제로 지역주의와 더불어 “권위주의 타파”를 줄기차게 제기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권위주의는 그것을 정책적으로 밀어붙이는 법체계, 질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의 사고방식을 지칭하는 말이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권위주의”보다 “권위의식”이 맞는 표현이다. 

우리 내부의 권위의식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개인의 자유가 사회정치적 조직과 집단을 통해 표출되려면 정치세력들과 국민들의 민주의식이 발전해야 한다. 패배에 승복할 줄 알고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일 줄 아는 민주의식이 필요한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이 경청해야 하는 내용은 “나의 자유가 소중하다면 다른 사람의 자유도 소중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자유를 위해 타인의 자유를 짓밟을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자유주의를 가장한 새로운 권위주의자일 뿐이다. 

그러나 유시민 전 대표는 남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열린우리당의 김영춘 사무총장으로부터 "옳은 말도 그렇게 싸가지 없이 하는 버르장머리는 어디서 배웠느냐"는 혹평을 듣기도 하였다. 2007년 8월, 한겨레 신문은 “유 전 장관의 후배격인 한 386 의원은 유 전 장관과 있으면 가슴이 답답해져서 함께 앉아있기 어렵다고 토로했을 정도. 당에서 회의나 의원총회가 열리면 유시민이 참석하느냐 마느냐에 다른 의원들이 촉각을 세우기도 했다는 후문이다.”라고 보도하기도 하였다. 정치인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이미지를 가져서는 자유주의 이념도 구현할 수 없다. 

또한 유시민 전 대표는 자유주의를 추구한다고 하면서도 본인은 늘상 “지휘자”의 위치에 서고 싶어한다. 

2011년 4월 27일, 경남 김해을의 재보선 국면에서 국민참여당의 유시민 대표는 후보단일화 여부를 놓고 온갖 설전을 벌인 끝에 결국 민주당 쪽의 김경수 봉하재단 사무국장을 눌러앉히고는 이봉수 대통령 농업특보를 출마시켰다. 그러나 노무현 진영의 내부논란을 두고 김해민심이 좋을 리 없었다. 결국 당시 김해을 선거에서는 한나라당의 김태호 후보가 어부지리로 당선되고 말았다. 이 사건은 유시민 전 대표의 대권가도를 결정적으로 가로막고 말았다. 

통합진보당 논란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당 운영의 주도권을 쥐지 못한다고 해서 당을 떠나는 것은 국민적 동의를 얻을 수 없다. 

4.11 총선에서 참여계 인사들은 그야말로 고군분투하였지만 아쉽게도 총선 성적이 저조해 전북지역에서 당선된 강동원 의원이 유일한 상황이 되었다. 전체 13명의 의원 가운데 참여계 의원의 비중이 1명에 불과하게 되자 유시민 대표는 향후 정치행보가 염려스러웠던 듯하다. 

게다가 7월 14일에 발표된 당직선거 결과도 당대표직과 최고위원에서는 이른바 "신당권파"가 상당부분 진출했지만 중앙위원회와 대의원, 지역위원회로 갈수록 참여계를 비롯한 이른바 "신당권파"의 입지는 좁아지고 말았던 것이다.

본인이 주도할 “통합진보당”이 아니라 자주통일 진영이 주도하는 통합진보당을 놓고 유시민은 당을 쪼개는 극단적 행보를 벌이고 말았다. 참여계의 박무, 고영삼 위원들의 책임관할하에 작성한 진상조사보고서는 4.11 총선 비례후보 선출 선거를 “총체적 부정, 부실선거”라고 단정해 통합진보당을 풍비박산으로 만들고 말았다. 

유시민 전 대표는 정작 4.11 총선 곳곳에서 자행된 이명박 정부의 부정, 부실선거는 외면하고 있다. 당시 강남을 지역구에서 미봉인 개표함이 발견되고 부산에서는 부재자투표용지가 사라진 사건은 자못 충격적이었다. 국방부는 장병들에게 특정 정당을 폄하하는 교육을 하고 검찰은 편파수사로 특정정당에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였는데 전국적으로 자행된 이명박 정부의 선거운영이야말로 “총체적 부정, 부실선거”가 아닌가? 

이명박 정부의 4.11 총선 부실운영은 관대히 눈감아주면서 통합진보당의 일부 부실에는 쌍심지를 켜고 달려드는 모습은 일관적이지도 않고, 양심적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4. 군림하는 정치는 반드시 실패 

국민의 머리 위에 군림하려는 정치는 제 아무리 화려한 언변으로 치장해도 결국은 실패한다. 

이번 통합진보당 사태에서도 진보진영이 서로 갈라져 싸운 결과 한 때 10%를 넘는 당 지지율은 현재 2,4% 수준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통합진보당에 참여했던 모든 정치세력들은 당 지지율이 이처럼 참혹하게 떨어진 원인을 냉정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민주국가에서 정치는 설득의 과정이다. 정치세력의 확장은 우리의 정치노선에 군중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제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세상에서 내가 제일 머리좋다”며 군림하려 해서는 그 어떤 군중도 설득할 수 없다. 변화무쌍한 말주변으로 이리저리 처신하더라도 양심의 원칙과 기준을 잃으면 군중을 쟁취할 수 없다. 

옛말에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다. 대중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신망을 얻으려면 “자신의 자유만큼, 타인의 자유도 소중하다”는 진리를 실천할 수 있어야 하며 민주적 절차를 통한 의사결정 과정을 존중하고 겸손과 양보의 미덕을 알아야 한다. 

유시민 전 대표는 뜨거웠던 청년시절, 그의 “항소이유서”에서 “법은 사람이 만들었지만 양심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라며 양심을 따르는 삶을 택했고, 앞으로도 그러겠노라고 서술하였다. 

지금 유시민 전 대표의 행보는 “하느님이 주신 양심”을 스스로 거스르는 행동이 아닌가. 제발 정치논리가 아닌 양심을 지켜, 1985년의 청년 유시민으로 돌아오길 간곡히 부탁드린다. 


2012.9.5.


* 출처 : 우리사회연구소 http://urisociety.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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