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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 본 김정은 정치

토론게시판

by 붉은_달 2012. 1. 19.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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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 보는 2012년 북한 -1

우리사회연구소 

세계적 대전환, 대격변의 2012년이 밝았다. 한국의 총선과 대선, 미국과 러시아의 대통령 선거, 중국의 권력교체를 앞둔 2012년의 목전에 북한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급서라는 커다란 정치적 사건을 겪게 되었다. 

지금 북한은 2010년 9월 28일의 조선노동당대표자회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로 지목된 김정은 조선노동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을 중심으로 재편을 완료한 듯하다. 2011년 12월 30일, 북한은 조선노동당 정치국 회의를 열어 김정은 부위원장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하였다. 1월 1일, 김정은 부위원장은 "근위 서울 류경수 105탱크사단"을 현지지도하는 것으로 2012년 북한을 이끌기 시작하였다. 

2012년 북한은 어디로 갈 것인가? 2012년 북한은 "위대한 김정일 동지의 유훈을 받들어 2012년을 강성부흥의 전성기가 펼쳐지는 자랑찬 승리의 해로 빛내이자!"라는 신년공동사설을 발표하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훈에 의거한 정치를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북한의 2012년, 북한의 21세기를 진단하려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훈을 알아야 한다. 이에 우리사회연구소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 보는 2012년, 북한>이라는 연재분석을 실시한다. 



분석은 



1.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 본 김정은 정치 

2.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훈 분석 

3. 2012년 이후, 북한의 대남정책 



으로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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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 본 김정은 정치 



북한은 독특한 사회이다. 12월 29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영결식에서 수십만 명의 북한주민들이 엄동설한에도 불구하고 거리로 나와 눈물로 영구행렬을 맞이하였다. 지난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의 참배과정에서 나타났던 북한주민들의 오열과 흐느낌은 2011년 12월에 그대로 반복되었다. 

북한당국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영결식 장면을 생중계하였다고 한다. 수십만 군중이 몰려있는 거리장면을 생중계한 북한당국의 조치는 당국이 북한주민들의 동요나 소요가 없다고 확신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의 정치체제가 혹자들이 기대하는 "급변사태"와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긴급의사회 소속으로 북한에 체류했다가 북한당국으로부터 2000년에 추방당한 독일 의사 노베르트 폴러첸도 <데일리 NK>와의 인터뷰에서 "1년 반 동안 머물면서 자신들의 최고지도자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하는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며 존경의 표현은 많이 보았습니다."라고 언급하였다. 

북한주민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선대 수령이었던 김일성 주석의 사상과 정치를 계승하였다고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김일성 주석의 사상과 정치에 대한 평가는 별개로 하더라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북한주민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세계의 관심은 북한의 김정은 부위원장에게 집중된다. 김정은 부위원장 역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정은 부위원장의 첫 정치행보는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로 정치무대에 등장하였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치행보를 추적하는 것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김정은 부위원장이 1월 1일, 새해 첫 현지지도 단위로 방문한 곳은 "근위 서울 류경수 105 탱크사단"이다. 이 사단은 한국전쟁 당시 3일만에 서울을 점령했던 기갑사단으로 북한은 1960년 8월 2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근위 서울 류경수 105 탱크사단" 현지지도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군영도의 출발점이라고 주장한다. 김정은 부위원장 역시 첫 현지지도로 "근위 서울 류경수 105 탱크사단"을 지도함으로써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첫 선군정치 현지지도를 그대로 이어받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2012년 김정은 부위원장의 행보를 파악하려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행적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주체사상을 체계화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북한 사회를 지탱하는 기본사상은 주체사상이다. 북한헌법 (정식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 헌법) 제3조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사람중심의 세계관이며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해 혁명사상인 주체사상을 자기 활동의 지도적 지침으로 삼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북한은 온 사회를 "주체사상"으로 일색화하고 있으며 정치도, 경제도, 군사도, 외교도 모두 주체사상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는 "주체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사상을 강조하는 북한에서는 수령의 후계자도 무엇보다 정치사상분야에서 뚜렷한 입지를 구축하고 이를 북한주민들에게 인정받아야 한다. 북한에서 사상이론적 능력과 실력은 "수령"으로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징표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의 2012년 신년공동사설을 보더라도 북한당국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회고함에 있어서 맨 먼저 "위대한 김정일동지는 심오한 사상리론과 비범한 령도로 주체혁명위업을 백전백승의 한길로 이끌어오신 걸출한 사상리론가"라고 하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상이론적 능력과 실력을 부각시키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실제로 1960-70년대 조선노동당에서 활동하던 청년시기에 김일성 주석의 사상을 정식화하고 체계화하는 사업을 주도하였다. 1961년 7월 22일에 조선노동당에 입당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67년에는 조선노동당 선전선동부 과장이 되었으며 만 29세가 되던 1971년에는 조선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 문학예술부 부장을 맡으며 주로 북한의 사상이론 사업을 담당하였다. 

이 시절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추진한 사업은 조선노동당 내에 김일성 주석의 유일사상체계를 구축하는 사업이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가 2005년에 발간한 "김정일 정권과 한반도 장래"에서 최진욱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74년 2월 19일, "온 사회를 김일성주의화하기 위한 당사상사업의 당면한 몇 가지 과업에 대하여"란 제목의 전국당선전일군강습회 연설에서 "온 사회를 김일성주의화하는 것이 당 사상사업의 출발점이어야 하며 여기에 모든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김일성주의를 유일한 지도지침으로 할 것을 주장하였다"고 거론하였다. 이로써 조선노동당 내에서는 정치적 다원주의가 배격되고 유일사상체계에 의거한 집단주의와 그에 기초한 민주집중제가 확립되게 된다. 오늘날 우리 국민들이 인식하는 조선노동당의 모습이 이 시기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의해 규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북한당국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대표적 사상활동이라고 주장하는 논문은 1982년 발표된 "주체사상에 대하여"란 논문이다. 이 논문을 통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일성 주석의 주체사상을 하나의 논리적 일관성을 갖는 철학 논문 형태로 전면화, 체계화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즉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북한의 당과 군, 정치조직의 지지를 받으며 김일성주석의 후계자로 거론된 데에는 사상이론적 측면, 이념과 노선투쟁에서 조선노동당을 틀어쥔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2010년 9월 28일의 조선노동당대표자회에 적용할 수 있다. 당시 당대표자회의는 김정은 부위원장이 처음으로 공개적인 정치행보를 보인 행사로 이 자리에서 김정은 부위원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로 공식화되었다. 스스로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김일성 주석의 정치를 사상이론적 측면에서 체계화하고 전면적으로 다듬었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서는 자신의 후계자 역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치를 그대로 계승하며 21세기의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발전시켜나가는데 중추적 역할을 해서 그런 사상이론활동으로 조선노동당 내에서 입지를 굳힌 인물을 후계자의 기준으로 보았을 것이다. 조선노동당이 최근 강조해 온 "첨단돌파사상"과 지식경제시대의 "새 세기 산업혁명"이 실제에 있어서는 김정은 부위원장이 후계자로서 조선노동당 내의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낸 활동으로 밝혀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이론저술활동은 정치사상적 분야 외에도 폭 넓고 광범위하다. 위키피디아 백과사전에 의하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주체사상에 대하여(1982), 영화예술론 (1973), 건축예술론(1992), 문화예술론, 미술론(1992), 김정일 저작선집을 비롯한 약 200여 편이 넘는 저작들을 집필하였다고 한다. 연합뉴스에서 펴낸 "김정일 100문 100답"을 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개인 자질에 대해 "예술적 자질과 빠른 두뇌회전, 다재다능"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민주통합당 박지원 의원은 2011년 12월 19일 경향신문 기자와 만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해 "한마디로 굉장히 스마트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김정은 부위원장 역시 다방면적인 학술이론적 재능이 밝혀질 가능성이 높다. 이미 2010년 9월 30일, 한국경제신문은 남북 군사실무회담에 참석한 북한 조선중앙TV와 조선신보 기자들은 "김정은 대장이 컴퓨터 제어 기술 쪽에 해박하다는 것이 맞느냐"는 남쪽 기자들의 질문에 "컴퓨터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것에 정통하신 분"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하였다. 

대중운동을 지휘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조선노동당 활동에 전면적으로 나서던 첫 시기, 사상이론집필 사업 뿐 아니라 각종 대중운동에도 주도적으로 관여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모든 역량을 핵심고리에 총집중시켜 사업을 전격적으로 밀고나가 계획을 앞당겨 실현하는 사업방식을 이른바 "속도전"이라 칭하고는 속도전에 입각한 대중운동을 불러일으켰다. 여러 가지 사업을 병렬적으로 늘어놓고 진행하는 것보다 하나씩 순차적으로 집중해서 풀어나가는 것이 전체 사업성과가 더 높다는 주장인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속도전" 방식을 북한의 대중운동에 도입하여 각종 사업성과를 내왔으며 이를 통해 북한 내 지지를 넓혀나갔다. 속도전은 1970년대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도했던 문학예술부문에서 태동한 개념이다. 북한당국은 1970년 2월, 영화 "한 자위단원의 운명"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영화의 핵심종자를 제대로 찾고 제작한 결과 불과 40여일만에 대작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1974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속도전을 경제사업 전반에 적용하였으며 이를 "70일 전투"라 칭하였다. 연합뉴스의 2004년 1월 12일 보도에 따르면 "70일 전투"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74년 10월, 경제발전을 위한 '6개년계획'(71~76년)의 원만한 달성을 위해 제시한 노력경쟁운동이라고 한다. 연합뉴스는 북한이 이 전투를 통해 전국 1천100여개 공장, 기업소에서 6개년 계획을 2년 이상 앞당겨 수행하고, 공업생산은 전투 이전 보다 1.7배 늘어났다고 밝히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또한 연합뉴스는 "70일 전투"의 결과, 인민경제 모든 부문에서 일대 비약적 성과가 이룩돼 6개년 계획을 노동당 창건 30돌(75년 10월) 이전에 완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보도하였다. 

이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75년 11월, 사상, 기술, 문화의 3대 분야에서 성과를 이룩하자는 목표에서 "3대혁명 붉은기 쟁취운동"을 발기하였다고 한다. 2011년 12월 26일, 미국의 싱크탱크인 우드로윌슨센터는 지난 1970년대 평양주재 옛 동독 대사관이 본국에 보낸 외교전문을 입수해 검토한 결과 1975년 12월 전문에서는 "3대혁명 붉은기 쟁취운동이 전국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며 "당중앙이 이 운동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전했다. 우드로 윌슨센터는 "당중앙"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라고 풀이하였다. 

연합뉴스는 2005년 11월 18일, "3대혁명 붉은기 쟁취운동" 30주년을 맞아 관련 "노동신문"의 사설을 인용 보도하였다. 보도는 "3대혁명 붉은기 쟁취운동"이 북한의 검덕광업연합기업소와 청산협동농장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하며 북한 노동신문은 이 운동의 성과로 "지난 30년 간 전국적으로 2만1천288개 단위가 3대혁명 붉은기를, 3천177개 단위가 2차례, 127개 단위가 3차례 3대혁명 붉은기를 쟁취했으며 236만3천여 명의 3대혁명 기수가 배출됐다"고 소개했다고 보도하였다. 

연합뉴스의 보도를 통해 보면 "3대혁명 붉은기 쟁취운동"은 1975년에 발기되었다가 끝난 한시적인 운동이 아니라 이후 30여년간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지속형 대중운동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처럼 각종 대중운동을 발기하고 그 성과를 제시하는 것을 통해 조선노동당의 지지기반을 확고히 하고 북한주민들의 지지를 얻어 나간 것으로 판단된다. 

사실상 지난 30년간의 북한의 산업설비, 사상문화적 작품들은 모두 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기획과 관할 아래 이뤄졌다고 보는 것이 맞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우리 국민들이 알고 있는 북한사회, 북한문화를 창안, 설계한 기획자이며 연출, 감독까지 직접 맡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북한사회와 북한문화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이러한 사업추진능력을 통해 조선노동당과 북한주민들의 지지를 획득해나간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주목되는 김정은 부위원장의 행보 

김정은 부위원장의 초기활동 방식도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다르지 않다고 보인다. 주목할 점은 북한이 이미 2009년, 전국적으로 "150일 전투"를 진행한 바 있다는 점이다. 북한 당국은 2009년 4월 20일부터 9월 16일까지 2012년 "강성대국 건설"을 내걸고 "전당적인 총공격전, 전국가적인 총동원전, 전인민적인 총결사전"이라는 "150일 전투"를 실시해 공업부문에서 전투계획을 112%로 넘쳐 수행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북한은 "150일 전투"의 과정에서 최대 성과 중의 하나로 "희천속도"를 제시하고 있다. 인터넷 통일뉴스는 2009년 9월 29일, 조선신보를 인용보도하였는데 조선신보는 "희천속도"라는 명칭이 나오게 된 경위를 이렇게 소개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0년 이상 걸려야 할 방대한 희천발전소 건설을 김일성 주석 탄생 100돌까지 무조건 끝낼 데 대한 과업을 주었고, 희천발전소 건설자들은 언제(댐) 기초콘크리트치기를 비롯하여 5년이 걸릴 방대한 작업량을 불과 5개월 동안에 해냈다. 150일 전투가 결속된 다음날에 이곳을 찾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 위훈을 높이 평가하고 "희천속도"라고 명명했다는 것이다. 

사실 "150일 전투"가 진행되었던 2009년을 두고 북한은 "변이 난 해"로 칭하며 2009년 4월 5일의 우주발사체 "은하 2호" 발사, 2009년 5월 25일의 제2차 지하핵시험 등을 성과로 거론하고 있다. 

2009년에는 김정은 부위원장이 이미 북한 내 각지를 "현지지도"하고 있던 시기였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이 2010년 12월 22일 공개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정은 부위원장의 자강도 희천청년전기련합 기업소 시찰사진에 김정은 부위원장이 이 기업소를 2008년 12월 20일 현지지도 했다는 내용의 현판이 들어있다"고 전했다. 김정은 부위원장이 이미 2008년경부터 북한 내 각 산업단지를 활발히 지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러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김정은 부위원장 역시 "150일 전투"를 진두지휘하며 "희천속도"를 내오고 우주발사체 발사와 지하핵시험을 성과적으로 마친 데 기초해 조선노동당과 북한주민들의 지지를 공고히 하고 이를 바탕으로 2010년 당대표자회에서 공식 후계자로 선출되었다는 가설을 세워볼 수도 있는 것이다. 

김정은 부위원장은 앞으로 북한사회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군중운동, 대중운동을 펼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의 2012년 신년공동사설을 보면 북한은 조선인민군 차원에서 "오중흡 7연대칭호쟁취운동"을 지속할 것임을 확인하였다. 아울러 공동사설은 "천만대중의 정신력을 천백배로 발양시켜 나가는 것은 올해 대진군의 승리를 위한 중요한 열쇠이다."라며 "도처에서 대중의 정신력을 발동하기 위한 대중운동과 사회주의경쟁을 활발히 벌려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유일사상체계에 입각한 북한의 정치체제를 이해한다면 김정은 부위원장의 정치방식을 전망하는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통해 가능하다. 북한은 2012년 신년공동사설에서 "경애하는 김정은동지는 곧 위대한 김정일동지이시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정은 부위원장의 정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 그대로일 것이라는 점은 내외 평론가들의 일치한 견해이다. 그런 측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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