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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번역]인도 독립 투쟁의 역사(4)

토론게시판

by 붉은_달 2011. 12. 20. 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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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디리파드(E.M.S. Namboodiripad)

번역 : 이병진(양심수)


[편집자 주: 각주에 원주, 편집자주 등을 밝혔다. 편집자 주는 이병진 동지의 번역문에 대해, 편집부에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추가한 것이다. 이병진 동지의 초역문을 편집부에서 교정을 보고 다시 이병진 동지에게 동의를 구하는 과정을 거치지 못하였는데 문제가 있다면 전적으로 교정자의 책임이다. (최상철 )]




[3] 초기의 투쟁과 패배


Ⅰ. 남인도에서의 봉기들


1857년 북인도에서 2년 가까이 지속적으로 일어난 봉기들은 인도에서 ‘독립을 위한 최초의 투쟁’이었다. 민족주의 학자들이 이 투쟁을 재평가하고 사실들을 모으기 시작하기 전까지, 그것은 영국인들이 이름 붙인 ‘세포이 반란’으로 알려졌다. 이것은, 사실, ‘세포이 반란’이 아니다. 인민에 의한 투쟁의 위대한 형태다. 물론, 세포이들(sepoys, 용병들)이 그 투쟁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이 점은 지금도 널리 받아들여진다.

한편, 남인도에서는 이러한 대중의 봉기보다 대략 반세기 먼저 또 다른 봉기를 목격할 수 있다. 민족주의 역사가들은 봉기를 일으키게 한 충돌과 관련된 사건들을 이끌던 영웅적인 애국자들을 조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고립적이고 산발적인 무장 봉기들과는 달리 최근까지도, 북인도의 1857-59년 때처럼 널리 퍼진 남인도의 조직적인 독립투쟁은 입증되지 않았다.

독립을 위한 1857-59년 투쟁 100주년 기념의 일부분으로써, 전 교육부장관이었던 카람 아자드(Maulana Abul Kalam Azad)의 주도하에 인도의 독립운동사에 대해서 유능한 연구자들이 연구를 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인도 여러 지역들에서 일어난 독립 투쟁에 관해 연구하도록 역사학자들과 학생들을 고무하였다. 이와 같은 연구 결과의 하나가 ≪남인도인의 반란−1800-1801년 최초의 독립전쟁(South Indian Rebellion — First War of Independence 1800-1801)≫이다. 마두라이 카마라지 대학교(Madurai Kamaraj University)의 라자얀(Rajayyan)은 마드라스 기록보관소에 있는 공식적인 기록들에 기초하여 연구하였다.

남인도의 1800년 봉기는 북인도의 1857-59년 투쟁 만큼 고양(高揚)되었다. 인민의 다양한 계층들에 속한 기획자들, 조직가들, 영웅적 애국자들은 남인도에서의 독립 투쟁의 역사뿐만 아니라 인도 전체의 독립 투쟁의 역사에 위대한 그들의 업적을 남겼다. 이들 애국자들—티루넬베리(Tirunelveli)의 까따보만(Kattabomman), 말라바르(Malabar)의 파자시라자(Pazhassi Raja)—과 그들의 영광스런 공적들을 어느 정도 우리들이 알고 있다.

이때까지, 이들 애국자들의 영광스러운 공적들은 단지 영웅심에 의한 고립된 행동들의 이야기들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것들은 광범위한 운동의 부분이었다. 그 운동은 께랄라(Kerala), 타밀나두(Tamilnadu), 안드라(Andhra), 까르나타까(Karnataka)의 4개 주들뿐만 아니라 마하라스트라(Maharashtra)까지 포함한 남인도 전체에 걸쳐 일어났다. 간단히 말해서, 그 저항과 1800-1801년 봉기에는 여러 계층들의 대중들이 동원되었다. 그와 동시에, 빈드야(Vindhyas) 남쪽 지역들에 거주하는 엘리트들이 외국의 침략자들과 싸우기 위해 무장한 것이다.

라자얀은 이 봉기들을 “‘전-국민회의당(pre-Congress epoch)’ 시기의 해방전쟁들 가운데 가장 널리 퍼진” 그리고 “아주 강고한 최고의 무장 인민 투쟁”으로 특징짓는다1).
그에 의해 밝혀진 역사적 사실들에 압도되어, 저자는 간혹 1857-59년 투쟁의 의미를 작게 본다. 그런 부정확한 결론들과 관련해서 라자얀에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믿을 만한 사실들에 기초하여 남인도의, 독립 투쟁에 대해 책을 쓴 그에게 감사하다.

저자는 (당시의−번역자) 정세와 인도 최초의 독립 투쟁으로 불리는 남인도 봉기를 야기한 환경들을 기술한다. 그 투쟁을 자세히 보기 전에, (투쟁의−번역자) 성숙 그리고 조직의 기술 그리고 효과적인 지도력, 적들이 꾸며낸 야비한 전술들 그리고 잇따라 일어난 충돌들을 기술한다.

라자얀에 의해서 드러난 사실들을 역사적 유물론의 관점으로 분석한다면 투쟁을 이끌고 대중의 지지를 받았던 그 정치적 요인들이 또한 투쟁을 필연적인 패배로 이끈 것임을 볼 수 있다. 책임이 있었다. 이 정세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북인도의 독립투쟁과 이 투쟁의 차이에 대한 특징들을 이해하는 것을 돕는다.

이와 관련해서, 남인도의 특징들을 언급하는 것은 가치있는 것이다. 마우리아(Maurya)제국 시대부터 무갈제국까지 이 지역은 북인도를 통치했던 황제들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다. 황제들이 이 지역을 정복하려고 하면 그 지배로부터의 해방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포르투갈부터 영국에 이르는 외국 정복자들이 인도에서 그들의 지위를 세우고 통합하려던 시기의 남인도의 모든 지역들은 델리 황제의 명목적 지배조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무갈 황제들에 대항해서 지속적으로 싸워왔던 마하라타인(Marathas)들은 그들의 지역을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북쪽 지역들을 침략하였고 무갈 황제들이 지배하던 일부지역들을 획득하였다. (무갈 황제에게 복종해야 하는) 하이데라바드(Hyderabad)의 니잠(Nizam)은 사실상 독립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 마이소르(Mysore)의 술탄(Sultan)은 무굴황제의 통치권 승인을 거부했다. 그곳에는 마이소르처럼 독립을 유지했던 몇 개의 소국들이 있었다 —탄조레(Tanjore), 마두라이(Madurai), 라마나드(Ramanad), 아르코트(Arcot) 등의 타밀 왕자들, 그리고 라자얀이 지난 1000년 동안 독특하게 정치적 독립을 유지했었다고 지적한 말라바르(Malabar)의 왕자들 코친(Cochin)과 트라반코르(Travancore)는 강한 (소)국가들로 성장하였다.

빈드야 남쪽 지역의 왕자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다. 각각의 왕자들은 그의 통치를 다른 왕자들이 받아들이게 하여 강력한 지위 또는 황제가 되려고 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목적을 얻기 위해서 그 어떤 외국과의 동맹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의 목적에 합당하다면, 언제든 외국 무역 회사들과 우애가 있는 것처럼 꾸미거나 또는 적대적일 수 있게 준비하였다. 그것은 전술의 일부분이었다. 그 지배자들은 그들의 지배를 받는 봉건 귀족들과도 싸워야 했다. 왜냐면 귀족들은 남인도에서 행정체계의 부분을 구성하였기 때문이었다.

‘폴리가르(Poligar)들과 자민다리(Zamindar)들로 알려진 그 수장들은 왕자들과 주민들 사이의 정치구조에서 핵심 지위를 차지하였다. …… 그들은 지배자에게 그들의 토지에 대한 지대를 바쳤다. 그리고 (소)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군대를 보내기 위해서 무장병을 거느렸다. 그들은 약탈로부터 그리고 그들의 지급 불능에 대한 보상금 요구에 반대하여 사적 재산을 지키려 했다. 공안의 수호자로서 그들은 경찰력을 행사하였고, 사법 행정, 마을들의 건설, 종교 축제의 주관, 사원 관리, 경작 증진 그리고 공공복지를 도왔다. 중간 단계의 권력 기관으로써 그들은 지배자들이 공공복지 영역에서 수행하는 일들을 하였다. 일반 인민들은 중앙 행정에서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들은(폴리가르−번역자)는 자신들의 권력 수립에 있어 그 어떤 어려움도 겪지 않았다. 이 점이 폴리가르들과 대중들 사이의 강한 동질감을 만들고 그것을 촉진하였다2). (타밀나두와 까르나따까 봉건 귀족들은 폴리가르로 알려져 있다. 께랄라에서는 그 이름을 사용하지 않지만 여기에서 ‘봉건 귀족들’이라는 용어는 께랄라를 포함한다)

대중들과 봉건 귀족들 사이의 우호적인 관계는 각각의 왕자들에게 (적대적 관계에 있는−번역자) 다른 왕자들의 군사적 힘처럼 위험하게 보였다. 봉건 귀족들이 대중들의 지지를 받는 한 그 어떤 왕자도 봉건 귀족 위에 군림하는 지배력을 세울 수 없었다. 왕자들이 그들의 적들을 패배시키는 데 성공하고 그들의 영토를 정복하였다 하여도, 봉건 귀족들이 존재하는 한 그들의 통치를 지속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들의 봉건 귀족들 뿐만 아니라 여타의 왕자들과도 전쟁을 벌이는 그 왕자들은 외국 무역상들을 팔 벌려 환영하였다. 왕자들은 이 두 싸움에서 외국 무역상들이 그들을 돕고 원조하는 것으로 믿었다.

이 두 개의 싸움에서, 물론 그들은 지역의 동맹자들, 즉, 여타 왕자들과 그들의 군대에 어느 정도 의존하였다. 그러나 외국 회사들은 두 가지 이유로 더 효과적으로 그들을 도왔다. 첫째, 외국 회사들은 매우 성능이 좋은 무기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 무기들을 잘 다룰 수 있었다. 둘째, 대규모 해군력을 지휘하는 외국 회사들은 그들을 위해서 더 많은 상품들을 가져 왔고 적의 해상로를 봉쇄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인도에 온 외국 회사들에 의지하는 것은 왕자들에게는 정책의 부분이 되었다.

그들의 지배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외국 무역회사들에 의존하는 그 정책은 16세기 인도 전체의 왕자들에게는 일반적인 것으로 되었다. 그러나 남인도에서는 북인도와 비교해서 특별한 특징이 있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남쪽에는 명목적인 황제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저마다의 왕자들은 독립하였다. 그리고 왕자들 사이에서 발생한 여러 싸움들에서 승리 또는 패배는 각각의 전투원들의 군사적 힘에 기초했다.

더욱이, 남인도는 북인도 지역들보다 해안선이 가깝다. 그래서, 육․해군을 거느린 외국 상업회사들은 남인도에서 정치적 관계들에 북인도보다 더 기술적으로 그리고 빠르게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18세기 말, 남인도 전체는 영국의 통치하에 놓였다. 이 지역 왕자들은 하나 둘씩 서로 다른 시기에 영국에 투항하였다. 트라반코르(Travancore), 푸두코타이(Pudukkottai), 텐조르, 아르코트, 마이소르의 라자(Raja)3)들, 푸나(Poona)의 페슈와(Peshwa)4) 그리고 하이델바드의 니잠도 영국에게 그들의 권력 또는 영토를 넘겼다. 18세기가 끝날 무렵 남인도에는 영국식 인도와 토착 국가의 이중적 행정이 존재하였다.

라자얀의 책에는 왕자들에게 복종했던 봉건 귀족들이 새 지배자들에 대항해서 일으킨 봉기를 다루고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런 봉건 귀족들은 평범한 인민들과 친선적인 관계들을 유지하였고 영국에 적대하는 그런 봉기는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다. 개개의 봉건 귀족은 전장에서 수천 명의 병사들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형제적 동맹을 맺은 여러 봉건 귀족들의 지도력이 모두를 움직였을 때, 그것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변했다.

남쪽 끝 티루넬벨리의 까따보만부터 까르나따까 북부를 아우르는 돈도지  와그(Dhondoji Wagh)지역과 남부 마하라스트라까지, 이 봉기들의 지도자들을 포괄하는 조직은 군대를 동원하였고 그들의 활동들을 지휘하였다. 라자얀은 그 지도자들의 특징, 동원방법과 통제 그리고 그 결과와 행동강령을 자세히 분석하였다. 1857-59년 봉기의 사례처럼, 남인도의 봉기는 매우 긴 전선의 무장 투쟁이었다. 영국은 지도자에 의해 조직된 봉기를 계획적으로 탄압하였다.

라자얀은 시바간가(Sivaganga)의 마루다 판디안(Maruda Pandyan)을 ‘지도자 가운데 최고의 특출한 이 운동의 정치전략가’로 기술한다. 그는 티루넬벨리의 까따보만을 포함해서, 마두라이 남쪽 지역 안에 있는 봉건 귀족들과 그 지역들의 인민 대중들을 동원했을 뿐만 아니라 영국의 요새를 공격하기 위하여 딘디갈(Dindigal), 코임바토르(Coimbatore), 말라바르, 마이소르, 마하라스트라(Maharashtra) 지역들에서 반영투쟁 활동가들을 동원하려는 사업을 하였다.

그 행동계획은 아주 성공하였다. 나중에 일어난 북인도의 1857-59년 봉기처럼, 영국은 1800-1801년 봉기를 제압하기 힘들었다. 라자얀은 영국군 수장들과 관료들의 의견들과 논평들을 인용하여 그것을 증명했다. 이 봉기에 관한 무용담은 남인도의 투쟁가들에 대한 경의와 존경심을 우리 마음속 깊이 갖게 한다. 그러나 남인도 봉기는 영국에 의해서 잔인하게 탄압받았다. 같은 방법으로 영국은 1857-59년 투쟁을 포함하여, 인도 안에서 일어난 모든 자유를 위한 투쟁을 탄압하였다. 이 투쟁에 참가했던 백여 명의 영웅적인 애국자들이 사형당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들의 모든 재산을 몰수당해서 가난해졌다. 수십 명이 추방당했다. 그들의 삶에서 목표로 품었던 민족독립은 단지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꿈이 되었다. 인민대중들도 잔인한 영국의 발길질에 말할 수 없는 비참한 고통을 겪었다.

이렇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투쟁의 지도자 가운데 가장 위대한 마루다 판디안은 간단하게 답한다. 그는 1801년 티루치(Tiruchi) 선언에서 이야기하였다. 유럽인들의 ‘이중성’을 알지 못했던 왕자들은 ‘멍청하게’ 그들을 믿었다. 그리고 인민들 사이에 ‘단결과 우정’이 없었다.


“위대한 무함마드 알리(Mohammed Ali) 나와브(Nawab)는 바보같이 그 자리를 유럽인들에게 주었고 당신들은 과부처럼 되었다. 신의를 깨뜨린 유럽인들은 사기를 쳐서 그 왕국을 그들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인도인들 위에 군림하여 토착민들을 개처럼 간주한다. 당신들에게는 단결도 그리고 우애도 없다. 그런 유럽인들의 이중성을 알지 못한 상층 카스트들(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그리고 이슬람지배자들<mussalmans>)은 … 서로가 분별없이 반목(反目)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왕국을 완전히 넘겨주었다.”5)


라자얀은 그것에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만족할 만한 설명이 아니다. 왕자들의 ‘멍청함’과 인민들이 ‘분열’한 이유에 대한 설명이 없다. 몇 세기 동안 유지되었던 체제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라자얀 역시 설명하지 못했다.

그 질문에 진짜 답은 이미 앞 장에 있다. 그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고유의 사회체제와 새롭게 탄생한 외국 사회체제 사이의 투쟁이었다. 한쪽에서는, 새 사회를 갈망했던 반면에 다른 쪽에서는 그들의 토지, 고대의 관습 그리고 전통들을 지키려고 했다. 인도에 외국인들을 통해서 전래된 근대 사회의 정수를 흡수하고 또 우리 사회를 근대화할 때만이 외국인들의 공격으로부터 우리 조국을 지킬 수 있다. 하지만 독립투쟁을 계획하고 조직한 이들에게는 그들 저마다의 영토들에서 자신들의 지배를 다시 세우려하는 것이 자신들의 신념과 관습들에 조화되는 것이었다. 이어지는 장에서 우리는 북인도 봉기의 조직자들을 보게 된다. 반세기 후에 똑같은 목적들을 위해서 싸웠던 봉기에는 여전히 투쟁의 취약점이 반복되었다.


-Ⅰ절 끝- <노사과연>




1)원주: 라자얀, ≪남인도인의 반란−1800-1801년 최초의 독립전쟁≫, p. 20.



2)원주 : 라자얀 같은 책, pp. 22-24



3) 편집자 주: 산스크리트어로 왕을 의미. 왕권 강화 이후 왕국 내의 지방수장의 호칭이 되었다.



4) 편집자 주 : 인도 마리타인의 최고 성직자직.



5)원주 : 라자얀 같는 책, p. 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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