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주재관은 나즈르(Nazr)를 고발하면서 법정에 서기를 거부했다. 아우크랜드(Auckland)는 바하두르 샤(Bahadur Shah: 무굴의 마지막 황제)에게 그의 요구와 권리들을 포기하라고 하였다. 그는 법복을 수여받고 재판을 하는1) 특권인 나즈르를 금지하였다. 디와니카스(Diwan-i-Khas)2)와 디와니암(Diwan-i-Am)3)은 폐쇄되었다. 그는 붉은 궁전(Fred Fort)에 거주를 포기하고 왕의 칭호를 금지하며 후계자를 지명하는 특권을 포기하라고 강요했다.4)
남인도에서 폴리가르들과 봉건귀족들이 권위와 지위들을 빼앗길 때 북인도의 반발은 없었다. 그 이유는 영국이 무굴황제와 나와브들, 왕자들과 그를 따르는 기타 사람들의 지위와 특권을 부분적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영대자치제가 소개된 벵갈과 여타 지역에서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영국 정부에 기생하는 중개인이 생겼다. 그러나 영국이 인도전체를 중앙집권식 행정체제로 개편하면서 남인도와 벵갈을 통합하자, 북인도의 부유한 엘리트 계급들도 영국의 지배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1857년부터 1859년 동안 목격된 일은 그런 감정들의 폭발이었다. 영국 정부의 권위적인 대변인은 1857-59년 폭동의 특징을 어떻게 보는지 살펴보자. 명망있는 19세기 영국 관료들 중에 디즈랠리(Disraeli)는 그 투쟁을 “민족적 봉기”라고 특징지웠고 “군인폭동”으로 보는 것에 반대하였다.
1853년도에 동인도회사 회장이 된 엘렌버로(Ellenborough)는 오우드(Oudh)의 탈루쿠다리(taluqdari)들5)의 해임을 비난하였다. “우리는 그 상황에서 오우드 지방에서 일어난 적대 행위들이 반란이 아니라 정통성 전쟁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6)
또 다른 역사학자(저스틴 맥카씨, Justin McCarthy)는 기록했다. “이것은 영국의 인도 지배에 대항한 군사적 불만, 민족적 증오, 종교적 환상이 복합된 것이었다. 토착왕자들과 원주민 병사들이 거기에 참여했다. 이슬람교도들과 힌두교도가 기독교에 대항하려고 연대하면서 그들 사이의 오랜 종교적 적대심을 잊어버렸다.7)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근대 민족주의 관점에서, 1800-1801년 남인도 투쟁과 1887-59년 북인도 투쟁은 많은 취약점과 불충분한 민족주의 투쟁들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인도의 서로 다른 곳에서 일어났던 크고 작은 그 투쟁들의 역사적 중요성과 의의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 모든 투쟁이 저마다 잔인한 힘에도 꺾이지 않는 인도 인민들의 애국심을 보여주었다. 세대로 이어지는 해방투사들이 그 위대한 투쟁들의 전통을 이어갔고 그들의 취약점들을 극복하여 앞으로 전진하였다.
Ⅲ. “세포이 반란” 또는 대중 봉기?
영국은 인도에서 1857년부터 1859년 동안 일어난 사건이 단지 세포이들의 반란에 불과했고 인도 인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다고 떠들었다.
그후 독립을 위한 민족운동이 여세를 모으자, 그 봉기가 독립 투쟁이었으며 인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는 것이 사실임을 단언하는 역사가들이 등장했다. 독립투쟁에 적극 가담하였고 오랜 기간 감옥살이를 했던 비나야크 다모다르 사바르카르(Vinayak Damodar Savarkar)가 쓴 책 ≪인도의 독립전쟁(The Indian War of Independence)≫은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한 몇몇 사실과 믿을 만한 자료들을 제공한다.
사바르카르를 추종하는 민족주의 정치활동가들과 역사학자들이 1857-59년 투쟁을 재평가하였다. 그들의 집중적인 연구의 결과, 그 사건에 직접 개입되었거나 또는 그것을 목격한 영국 관리들이 소위 세포이 반란에 대해서 의견이 갈렸다는 점을 밝혀냈다. G. B. 말레슨 대령(Col. G. B. Malleson)8) 존 윌리엄 케이 경(Sir John William Kaye)9), 찰스 볼(Charles Ball)10), 알렉산더 더프 주교(Rev. Alexander Duff)11)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대중들이 그 반란자들을 지지하는 여러 사례들을 언급했다. 케이에 따르면 강가(Ganga)로부터 야뮤나(Yamuna)에 이르는 힌두와 무슬림들 중에 영국에 저항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없었다.
오우드(또는 아요디야; Ayodhya), 로힐칸드(Rohilkhand), 사가르(Sagar), 나르마다(Narmada)의 다수 인민들이 영국에 저항했다고 말레슨이 지적했다. 더나아가, 이후에 영국 수상이 된 디즈랠리는 1857년 7월 27일 하원에 참석하여 인도에서의 봉기가 단순한 “군사적 반란”이었다는 공식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1947년에 —다른 여러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도 독립 투쟁 연구에 새로운 추동력이 주어졌다. 영국의 통치자들이 “세포이 반란”으로 불렀던 “독립투쟁” 100주년 기념식이 정부의 주관으로 열렸다. 그 행사의 일부분으로 심층적인 연구사업이 조직되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교육부장관인 아자드(Abul Kalam Azad)가 직접 이끄는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앞 장에서 몇 번 인용했던 타라 찬드 교수의 ≪인도 독립운동의 역사≫가 그 작업의 결과였다. 그 작업은 공식적인 후원 하에 진행되었다. R. C. 마줌다르(R. C. Majumdar)의 지도하에 연속적인 논문들이 비공식적으로 출간되었다. 여러 책과 팜플렛 및 학위 논문도 출간되었다. 1857-59년 투쟁의 성격과 내용에 대해서 여전히 ―초창기 같은 형태는 아니지만― 서로 다른 두 가지 접근이 있었다.
먼저, 영국 관리들이 그것의 성격을 순전히 “세포이 반란”으로 보았던 것은 옳지 않은 것처럼 세포이와 민간인들이 나라를 영국의 멍에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정부에 대항하기 위해 무장한 것으로 보는 것 또한 그들이 이기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다른 부류의 학자들에게는 1857-59년에 일어난 것은 인민의 봉기이다.
전자의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이 마줌다르이고 후자는 S. B. 쵸우두리(S. B. Choudhury)12)다. 이들의 중간에 S. N. 센(S. N. Sen) 박사가 있는데,13) 그는 마울라나 아자(Maulana Azad)의 서문과 함께 출판된 ≪1857년≫의 저자이다. 오우드와 그 주변 지역에선 인민 봉기였으나, 여타 지역에서는 단순히 세포이 반란이었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그런데 1857-59년 사건의 성격이 독립투쟁이었다는 것에 반대하는 마줌다르조차 그것을 단순히 세포이 반란이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의 책 제목은 “세포이 반란과 1857년 봉기”였다.14) 그는 책의 제목을 설명하면서 말했다. “우리가 어떻게 보았던지 간에, 그 운동의 본질과 성격에 관한 내 의견을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 나는 ‘세포이 반란과 1857년 봉기’라는 제목을 정했다. ‘봉기’라는 단어는 보통 지배자들에 대한 충성을 벗어던지면서, 반감이나 증오와 같은 어떠한 도덕적 비판도 전하지 않을 때 쓰인다.15)
그러므로, 투쟁의 목적에 공감이 없었던 우파 영국 관료와 앞서 언급한 역사가 마줌다르 박사와 같은 인도 학자조차도 대중적 지지가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현재의 우타르 프라데쉬, 비하르 일부 지역, 마디야 프라데쉬(Madhya Pradesh) 지역의 수백만 명의 인민들이 참여했던 항쟁(rebellion)이었다는 것은 주저함 없이 말할 수 있다. 그와 동시에 그것은 벵갈과 펀자브를 포함한 남인도 전역과 동인도에서는 대중적 지지가 없었던 운동이었다. 쵸우드리 같은 학자들조차도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양쪽 진영의 학자들이 똑같이 인정하는 사실들을 고려하여 우리가 이 투쟁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1. 반영 봉기에서 핵심 역할을 했던 세포이들을 고려할 때, 그것은 세포이 반란이었다.
2. 그렇지만, ‘세포이 반란’의 배경에는 인민들의 격렬한 불만이 있었다. 그래서 세포이들이 봉기를 일으켰을 때, 농촌의 가난한 자들이 그들의 삶을 파괴한 지배자들 그리고 지배자들에 빌붙어 기생하는 벼락부자(nouveau riche)에 대항해 봉기했다. 민간인 봉기자들이 행정기관과 공문서들을 파괴했으며 정부 관료와, 벼락부자 고리대금업자 및 무역업자를 물리적으로 일소하였다. 이런 점에서 1857-59년 투쟁은 (최소한 앞서 언급한 지역에서는) 대중봉기였다.
3. 하지만 그 제한된 지역을 제외한다면, 그 투쟁을 대중들이 지지하지도 않았으며 뿐만 아니라 영국 정부 편에 섰던 교육받은 세새대들은 반대하기까지 하였다. 그 이유 때문에 정부나 민족주의적인 정치 지도자 및 역사가들처럼 1857-59년에 일어난 일을 “최초의 독립투쟁”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노사과연>
번역 : 이병진(양심수)
[편집자 주: 각주에 원주, 편집자주 등을 밝혔다. 편집자 주는 이병진 동지의 번역문에 대해, 편집부에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추가한 것이다. 이병진 동지의 초역문을 편집부에서 교정을 보고 다시 이병진 동지에게 동의를 구하는 과정을 거치지 못하였는데 문제가 있다면 전적으로 교정자의 책임이다. (최상철 )]
1) 편집자주: holding Durbars. 여기서 두르바는 페르시아 용어로 샤(Shah)의 고결한 법정을 의미하며 인도, 네팔에서는 봉건 조세를 위한 법정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2) 편집자주: 무굴 황제의 공청회가 열리던 곳.
3) 편집자주: 무굴 황제의 공식 접견장.
4) 원주: Ibid.
5) 편집자주: 지방 정부로부터 토지세를 징수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은 지주귀족들이다. 조길태, ≪인도사≫, 민음사, 1994, 403쪽을 참고 함.
6) 원주: Ibid. p. 41
7) 원주: Ibid.
8) 원주: Col. G. B. Malleson, History of the Indian Mutiny, in three volumes, London, 1878-89.
9) 원주: Sir William, A History of the Sepoy War in India, in three volumes, London, 1878-80.
10) 원주: C. Ball, History of the indian Mutiny, in two volumes, London.
11) 원주: Dr. A. D Duff, The indian Rebellion; It’s Causes and Results, London, 1858.
12) 원주: Choudhuri, Civil Rebellion in the indian Mutinies(1857-59), Calcutta, 1957.
13) 원주 : Surendra Nath Sen, Eighteen Fifty Seven, New Delhi, 1957.
14) 원주: R. C. Majumdar, The Sepoy Mutiny and the Revolt of 1857, Calcutta, 1957.
15) Majumdar, Ibid, Ⅱ, Ed, Introduction, pp ⅩⅥ-Ⅹ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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