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국제법을 유린한 미국의 전쟁범죄
미국 국방부 산하 선진연구사업국(Advanced Research Project Agency)은 1950년대 후반에 ‘프로젝트 애즐(Project Agile)’이라는 화학무기 개발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1959년에 선진연구사업국은 개발에 성공한 새로운 화학무기 시제품의 성능시험을 뉴욕주 북부에 있는 포트 드럼(Fort Drum) 수림지대에서 실시하였다. 성능을 시험한 새로운 화학무기는 에이전트 퍼플(Agent Purple)이라고 부르는 고엽제다.
주목하는 것은, 미국 군부가 개발한 고엽제가 농경지에 뿌리는 제초제(herbicide)가 아니라 미국 군부가 개발한 화학무기라는 점이다. 고엽제 문제는 환경문제이기 전에 군사문제다. 정치군사적 견지에서 고엽제 문제를 파악해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에이전트 퍼플 시제품의 성능을 시험하였던 때로부터 2년이 지난 1961년 8월 10일부터 12월까지 미국 군부는 베트남 중부 산간지대 닥토(Dak To) 주변 열대밀림에서 고엽제를 시험적으로 공중살포하였다. 시험살포 결과에 만족한 그들은 작전준비를 본격적으로 다그쳐 1962년 1월 13일부터 고엽제 살포작전을 개시하였다. 1962년 9월과 10월 에이전트 퍼플을 살포하였고, 1962년 11월에는 농작물을 죽이는 고엽제 에이전트 블루(Agent Blue)를 살포하였다.
1962년 11월 존 케네디(John F. Kennedy) 당시 미국 대통령은, 미국 군부가 베트남에서 전개해온 고엽제 살포작전을 뒤늦게 승인하였다. 미국 군부는 고엽제 살포작전에 대한 미국 대통령의 승인을 왜 뒤늦게 받아낸 것일까? 고엽제 살포작전은 재래식 무기를 쓰는 일반 군사작전과 구분되는 화학전(chemical warfare)이므로, 미국 군부는 뒤늦게라도 화학무기 사용에 대한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두어야 하였기 때문이다. 고엽제 살포는 제초전(herbicidal warfare)이라 부르는 화학전의 한 형태다.
그런데 화학무기 사용은 국제법으로 영구히 금지된 전쟁범죄다. 1925년 6월 17일에 채택되고 1928년 2월 8일에 발효된 제네바 협약(Geneva Protocol)은 모든 형태의 화학무기 사용을 영구히 금지하였다. 제네바 협약 중에서 화학무기 사용을 금지한 조항은, 1993년 1월 13일에 채택되고 1997년 4월 29일에 발효된 화학무기협정(Chemical Weapons Convention)으로 수정, 보완되었다. 그런데도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고엽제 살포작전을 10년 동안 지속적으로 강행함으로써 국제법을 유린하는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베트남 전쟁 당시에는 전쟁범죄를 심판할 국제사법기구가 없었지만, 전쟁범죄를 심판하는 국제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Court)가 2002년 7월 1일에 설립되었으니, 만일 지금 미국이 독극물 고엽제를 살포한다면 고엽제 살포작전을 명령한 미국군 지휘부는 국제형사재판소에 당연히 피소될 것이다.
베트남 전쟁 시기에 미국 군부는 베트남 농경지에서 자라는 농작물을 죽이는 고엽제 에이전트 블루를 공중살포하는 잔인성을 드러내었다. 이에 대해 알려주는 자료는 ‘베트남에서 에이전트 오렌지 및 여타 제초제를 사용한 범위와 방식(The Extent and Patterns of Usage of Agent Orange and other Herbicides in Vietnam)’이라는 글인데, 거기에는 아래와 같은 충격적인 정보가 담겨있다. 미국 군부는 에이전트 블루를 공중살포하는 미국군 수송기를 남베트남 수송기처럼 위장도색하였고, 미국군을 승무원으로 탑승시키는 것이 아니라 민간복장으로 위장한 남베트남군을 승무원으로 탑승시켜 전쟁범죄를 은폐해 보려고 하였다. 그 위장전술의 작전명은 ‘팜게이트(Farmgate)’였다. 도둑이 도둑질을 자주 하다보면 대담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 군부도 ‘팜게이트’라는 작전명의 전쟁범죄를 계속 저지르다보니 차츰 대담해졌다. 그래서 미국 군부는 ‘팜게이트’에 대한 대통령의 승인을 1963년까지만 받았고, 그 이후에는 남베트남 주재 미국 대사가 현지에서 승인하는 형식적인 절차만 거치면서 마음 놓고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1962년 1월 13일부터 1971년 1월 7일까지 10년 동안 랜취 핸드 작전(Operation Ranch Hand)이라는 이름으로 미국 군부가 남베트남 각지에서 실시한 고엽제 살포작전은 구체적으로 어떠했을까? 10년 동안 고엽제 공중살포작전에 동원된 군수송기 출격회수는 19,905회를 기록하였다. 물론 출격한 군수송기들 중에서 악천후, 피격 또는 요격, 비행 중 기관고장 등으로 공중살포를 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기록에 의하면, 서울시 면적의 17배에 이르는 남베트남 밀림지대 10,343㎢에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를 공중살포하였고, 1962년부터 1968년까지는 서울시 면적의 11.4배에 이르는 남베트남 농경지 6,880㎢에 에이전트 블루를 공중살포하였다. 그들이 살포한 각종 독극물 고엽제는 45,384드럼(9,440,028ℓ)이나 되었다. 그 가운데 66%에 이르는 25,384드럼(5,280,000ℓ)은 독극물 중의 독극물인 에이전트 오렌지였다. 명백하게도, 미국의 고엽제 살포작전은 베트남 영토의 10%에 이르는 열대밀림과 농경지를 독극물로 황폐화한 전쟁범죄였던 것이다.
3대에 걸쳐 죽음과 고통을 안겨주는 만행
미국 군부가 개발한 고엽제는 청산가리보다 10,000배나 독성이 더 강한 독극물인데, 미국 군부의 주문에 따라 고엽제를 생산한 미국 화학회사 다우 케미컬(Dow Chemical)은 제초제보다 독성이 50배나 더 강한 독극물 고엽제를 대량생산하여 미국 군부에 납품하였다. 1969년 말 미국의 바이오네틱스 연구실험실(Bionetics Research Laboratories)에서 동물실험을 실시하였더니, 고엽제에 들어있는 독극물 다이옥신(dioxin)이 2ppt(part per trillion)만 동물 몸속에 들어가도 죽거나 기형출산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이옥신 2ppt의 맹독성을 알기 쉽게 설명하면, 올림픽 경기를 진행하는 대형 수영장(50,000㎥) 10개에 채워 넣은 물에 다이옥신 두 방울을 떨어뜨린 다음, 그 수영장 물을 실험동물 몸속에 주입하면 죽거나 기형출산을 하는 것이다.
베트남 전쟁 시기에 미국 공군 소속 과학자였던 제임스 클래리(James Clary)는 1988년 미국 연방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고엽제에 다이옥신이 그처럼 많이 포함된 까닭은, 다우 케미컬이 제조단가를 낮추고 제조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다이옥신 제거공정을 거치지 않고 고엽제를 생산하였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다우 케미컬은 자기들이 생산한 고엽제에 독극물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고엽제 제조공장에서 일하는 미국인 노동자들이 독성오염으로 질병에 걸렸지만, 1965년 미국 군부는 그 회사에 압력을 넣어 고엽제의 맹독성에 관한 정보를 언론에 공개하지 못하게 막았다.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 정부는 미국군이 살포하는 고엽제에 독극물이 들어 있다고 폭로하며 고엽제 살포를 즉각 중지하라고 항의하였으나, 미국 정부는 그 주장을 “공산주의자들의 허위선전”이라고 되레 반격하면서 고엽제 살포작전을 계속 강행하였다. 더 기막힌 노릇은, 미국 군부가 고엽제는 인체에도 해롭지 않고, 환경도 파괴하지 않는다는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화학무기를 사용한 자기들의 만행을 감추려 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5,000여 명에 이르는 세계 각국 저명한 과학자들과 전문가들이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미국 군부의 고엽제 무해론이 얼마나 뻔뻔스러운 거짓말인지 폭로하면서 고엽제 살포를 즉각 중지하라고 촉구하였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 시기에 10년 동안 강행한 고엽제 살포작전은 열대밀림과 농경지를 비롯한 자연환경만 파괴한 것이 아니라 베트남 국민들을 이루 말할 수 없는 대참사로 내몰았다. 미국군 수송기들이 공중살포한 고엽제 분무를 온몸에 뒤집어쓰고 쓰러진 희생자는 3,181명이었고, 고엽제 독성오염에 노출된 베트남 국민은 480만 명이었다. 베트남 전쟁 종전 직후 베트남 적십자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약 100만 명에 이르는 베트남 국민들이 독극물 고엽제가 유발한 각종 괴질에 걸렸고, 그 가운데 절반인 5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독극물 고엽제가 유발한 기형출산으로 태어난 베트남 장애아동들의 모습을 찍은 사진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참혹하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1994년부터 2000년까지 베트남 보건부와 캐나다의 햇필드 자문회사(Hatfield Consultants Ltd.)가 실시한 공동조사 결과에서 드러났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30년이 지났는데도 독극물 다이옥신이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있었다. 30여 년 전 고엽제가 집중 살포된 지역의 토양과 식물에서 다이옥신이 검출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죽음의 땅에 사는 주민들의 혈액 속에서, 그리고 출산한 여성들의 모유와 유아들의 몸속에서도 다이옥신이 검출되는 참사가 일어났다. 이것은 미국이 베트남에서 강행한 고엽제 살포작전이 3대에 걸쳐 죽음과 고통을 안겨주는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만행이었음을 말해준다.
독극물 고엽제는 언제 어떻게 이 땅에 불법반입되었을까?
미국은 100만 명을 사망과 병고의 대참사로 몰아넣은 독극물 고엽제를 베트남에만 불법반입한 것이 아니라, 이 땅에도 불법반입하였다. 웹싸이트 <시크릿 오브 코리아(Secret of Korea)>가 입수한, 미국 육군부 산하 코리아 미군사고문단 본부가 1969년 1월 2일에 작성하여 미국 육군사령관, 전투발전사령부, 화생방국(Chemical-Biological-Radiological Agency)에 제출한 ‘최종보고서, 1968년도 식물통제계획(Final Report, Vegetation Control Plan CY 1968)’을 비롯한 미국 군부 관련자료들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1963년 후반 한국군 화학부대가 비무장지대(DMZ)에 고엽제 2-4-D를 소량 살포하였다. 1965년 10월 주한미국군 제2사단이 비무장지대에 고엽제를 살포하는 문제를 검토해달라고 상부에 요청하였다. 1967년 9월 20일 미국 국방장관 로벗 맥나마라(Robert S. McNamara)와 국무장관 딘 러스크(Dean Rusk)가 고엽제를 남측에 시험살포하는 작전계획을 승인하였고, 미8군사령부는 미국군 제2사단과 한국군 1군사령부에게 고엽제 모뉴런(Monuron)과 2-4-D를 미국군 제2사단이 관할하는 평야지대와 한국군 제21사단이 관할하는 산간지대에 각각 시험살포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1967년 10월부터 12월까지 고엽제 모뉴런과 2-4-D를 아홉 군데에 시험적으로 살포하였는데, 살포면적은 0.3㎢이었다.
1968년 3월 3일과 4일 주한미국군 공병단에서 미국군과 한국군이 고엽제 살포작전에 관한 합동회의를 진행하였고, 살포작전계획은 3월 10일에 승인되었다. 1968년 3월 4일 미국 국방장관 맥나마라는 남측에서의 고엽제 살포작전을 최종 승인하였는데, 고엽제를 제공하고 지침을 내리는 것은 미국군에게 맡겼고, 고엽제를 살포하는 것은 한국군에게 맡겼다. 미국군을 살포작전 현장에 동원하지 않은 까닭은, 고엽제를 살포하는 비무장지대가 지뢰밭인 데다가, 군용차량이 들어가지 못하는 험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엽제 살포작업 중에 한국군 장교와 사병들이 지뢰를 밟아 죽거나 부상당한 사건이 몇 차례 있었고, 한국군 사병들은 고엽제와 살포장비를 등짐으로 나르며 험한 곳에서 작업해야 하였다. 미국이 이 땅에 독극물 고엽제를 불법반입한 경로와 실태는 아래와 같다.
첫째, 미국 군부가 1969년 5월까지 이 땅에 불법반입한 독극물 고엽제는 토던(TORDON)10K 1,415드럼(283t), 에이전트 오렌지 191드럼(39,746ℓ), 에이전트 블루 54드럼(11,356ℓ)이다.
둘째, 미국 군부는 에이전트 오렌지처럼 다이옥신 성분이 많은 에이전트 핑크(Agent Pink) 2,331드럼(464,164ℓ)과 에이전트 그린(Agent Green) 149드럼(31,026ℓ)을 미국 화학회사들로부터 구입하였는데, 그 가운데 15,000ℓ를 시험용으로 썼고, 50,000ℓ를 남베트남으로 보냈다. 그러면 2,067드럼(약 430,000ℓ)의 에이전트 핑크와 에이전트 그린이 미국에 남은 것인데, 그처럼 막대한 분량의 고엽제 잉여분을 어디로 반출하였는지 그 행방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그렇다면 미국에서 생산된 고엽제 잉여분 약 2,067드럼은 어디로 반출되었을까? 1968년과 1969년은 베트남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시기였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에서도 전쟁위험이 극도로 높아진 때였으므로, 미국이 남베트남에 보내고 남은 고엽제 잉여분을 보내줄 대상은 주한미국군밖에 없었다. 물론 고엽제 잉여분 전부를 주한미국군에게 공급하지는 않았겠지만, 그 가운데서 상당한 분량이 이 땅에 불법반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미국 군부는 베트남 전쟁에서 쓰는 고엽제를 주한미국군에게 공급하였다. 미국 군부 기록에 따르면, 1969년 5월부터 7월까지 남베트남에서 이 땅으로 불법반입한, “제품명을 숨긴(unnamed)” 고엽제가 비무장지대 인근 12.8㎢에 살포되었다. 미국 군부가 남베트남에서 불법반입한, 제품명을 숨긴 고엽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미국 군부가 에이전트 오렌지 이후 새로 개발한 에이전트 오렌지 II였던 것이 확실하다. 그렇게 보는 까닭은, 미국 군부 기록에 남베트남에서 1968년 이후에 살포한 것으로 보이는 에이전트 오렌지 II를 어디론가 반출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위의 정보를 종합하면, 미국 군부는 미국에서 생산된 모든 종류의, 막대한 분량의 독극물 고엽제를 이 땅에 불법반입하였음을 알 수 있다.
미8군사령부가 강행한 고엽제 살포작전
이 땅에 불법반입된 막대한 분량의 각종 독극물 고엽제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물어보나마나, 비무장지대를 비롯한 각지에 무더기로 살포되었다. 미국 군부는 1968년 3월 20일부터 4월 8일까지 주한미국군에게 각종 고엽제를 공급하였고, 1968년 3월 31일 고엽제 살포작전을 개시하였다.
경기도 의정부에 있는, 미국군 제2사단이 주둔하는 캠프 스탠리(Camp Stanley)에서 1968년에 군복무를 하였던 래리 앤더슨(Larry Anderson)은 2011년 5월 25일 <동아일보>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자신이 1968년에 군복무를 하던 캠프 스탠리 창고에 에이전트 오렌지가 저장되어 있었고, 같은 해 경기도 부천에 있는 캠프 머서(Camp Mercer)에서 자신이 직접 에이전트 오렌지를 막사 주변에 뿌렸다고 말했다. 그의 발언에 나온 1968년은 미국 군부 기록에 나온, 고엽제 살포작전이 개시된 1968년과 일치한다.
미8군사령부는 2년 동안 한국군 병력 70,000명을 동원하여 고엽제 살포작전을 벌였다. 한국군 병력은 1968년 4월 17일부터 5월까지 고엽제 모뉴런 5,000드럼을 8.1㎢에 살포하였고, 1968년 5월부터 8월까지 디젤유와 혼합한 에이전트 오렌지와 물과 혼합한 에이전트 블루를 74.5㎢에 살포하였다. 독극물 중의 독극물인 에이전트 오렌지와 에이전트 블루를 이 땅에 살포한 분량은 기록에 남기지 않았다.
고엽제를 살포한 지역은, 민통선에서 비무장지대 남측 경계선 사이에 있는 폭 300-500m의 공간을 동서로 연장한 것이었다. 물론 비무장지대에만 고엽제를 살포한 것은 아니다. 주한미국군 제대자 래리 킬고어(Larry Kilgore)는 2009년 3월 29일 웹싸이트 ‘코리안 워 프로젝트(Korean War Project)’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비무장지대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고엽제가 널리 사용되었다”고 폭로하였다. 주한미국군 제대자 래리 앤더슨도 2011년 5월 25일 <동아일보>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에이전트 오렌지는 미국이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한국에서 사용됐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미국 군부는 이 땅 곳곳에 독극물 고엽제를 무더기로 살포한 자기들의 범행을 인정하지 않고 모르쇠로 일관하였다. 자기들이 화학무기를 사용한 것이 전쟁범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차마 고엽제 살포범행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1995년 6월에 가서야 미국 국방부는 자기들이 비무장지대에만 고엽제를 살포한 것처럼 범행을 축소한 살포사실을 인정하고 넘어갔다.
독극물 고엽제를 살포하다가는 독성에 오염되어 죽을 수도 있음을 알았던 미8군사령부는 한국군에게 위험한 살포작업을 맡겼고, 미국군은 살포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고엽제 살포작전에 내몰린 한국군 하급장교와 사병들은 독극물 고엽제가 아니라 일반 제초제를 살포하는 줄로 착각하고 분무기를 사용하여 뿌리거나, 분무기마저 없는 부대의 사병들은 고엽제를 가득 담은 철모를 들고 다니면서 맨손으로 뿌렸다. 고엽제 살포작전에 동원된 한국군 병력은 4개월마다 교체되었고, 때로 최전방 지역의 주민들도 동원되었다. <한겨레> 2011년 5월 25일 보도기사에서 강원도 철원군 생창리 민간통제선 인근에 사는 권종인 씨는 “71-21년 봄에 군부대 요청으로 비무장지대 철책선 주변에서 제초작업을 했다. 해골과 우산이 그려진 시멘트 포대 비슷한 용기에 담긴 수수가루 같은 분말을 군인들이 줬고, 이를 물에 풀어 분무기로 살포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201년 5월 27일 보도에 따르면, 강원도 철원에 있는 한국군 제6사단에서 1968년에 군복무를 한 김태진 씨는 최전방 초소에서 내려다보면 비무장지대에 설치된 철조망 앞뒤로 300-500m 정도 땅이 고엽제로 황폐화되었던 것을 기억하였다. 일반 제초제를 뿌리면 이듬해에는 풀이 다시 자라는데, 독극물 고엽제를 뿌린 비무장지대에는 그가 군복무를 하였던 3년 동안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비무장지대가 독극물 고엽제로 범벅이 된 죽음의 땅으로 변하였음을 뜻한다. 군복무 시절 중장비 운전병이었던 김태진 씨는 고엽제 살포작전에 동원된 적이 없었는데도 40대에 접어들어 고엽제가 유발한 고혈압, 당뇨, 협심증, 골다공증 같은 각종 질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고엽제 살포작전에 동원된 한국군 하급장교와 사병들, 그리고 지역주민들 가운데 독극물 고엽제가 유발한 질병으로 사망하거나 고통을 겪는 피해자는 얼마나 많을까? 보훈처로부터 고엽제 후유증 환자라는 인정을 받은 보훈대상자는 제대자 919명밖에 되지 않는다. 이 땅에 고엽제 피해자가 1,000명도 되지 않다는 정부당국의 판단은, 누가 봐도 피해사실과 동떨어진 착오로 보인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에 주한미국군 제2사단과 제7사단에 배속되어 임진강 이북지역에서 군복무를 한 미국군 제대자 4,000여 명이 고엽제가 유발한 질병에 걸렸으므로, 그보다 훨씬 더 많은 한국군 제대자들과 지역주민들이 고엽제가 유발한 질병으로 목숨을 잃거나 병고를 겪었을 것이다. 독극물 고엽제를 이 땅에 불법반입하고 불법살포한 미국의 범행이 은폐된 것처럼, 독극물 고엽제가 이 땅 곳곳에서 사망과 질병을 유발한 참사도 은폐되어 있는 것이다.
북태평양 해상소각장을 오간 특수선박
미국군 지휘부가 독극물 고엽제를 폐기하라는 명령을 내린 때는 1977년이다. 1977년부터 1978년까지 주한미국군 제2사단에서 군복무를 한 래리 앤더슨은 2011년 5월 25일 <동아일보>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1977년 여름 미 육군 2사단 사령부에서 2사단 전체 창고에 남아있던 모든 다이옥신을 창고에서 꺼내 본부로 반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고 하면서, “나는 미군이 다이옥신을 일제히 폐기할 당시인 1977년 2사단 사령관의 ‘스페셜 에이전트’(특수요원이라는 뜻-옮긴이)로 일하면서 2사단 전체 창고를 돌아다니며 다이옥신을 모두 없앴는지 확인하는 작업을 했다”고 말했다. 그들이 왜 1977년에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를 말해주는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바로 그 해 1월에 카터 정부가 출범한 미국 정치권의 변동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카터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1975년에 미국의 패전으로 끝난 베트남 전쟁의 ‘흔적’을 지우는 은폐작업을 시작하였는데, 미국군이 보관 중인 독극물 고엽제를 폐기하는 것도 은폐작업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독극물 고엽제를 폐기하라는 명령은, 화학무기를 사용한 전쟁범죄의 흔적을 지워버리는 범행은폐 명령이었다.
고엽제를 폐기하라는 명령이 하달된 1977년 당시, 미국산 독극물 고엽제를 쌓아놓은 저장고는 지구 위에 세 곳밖에 없었다. 미국 미주리주 걸프포트(Gulfport)에 있는 해군공병대센터(NCBC)에 저장되어 있었고, 하와이에서 서쪽으로 1,390km 떨어진 북태평양의 미국령인 산호섬 존스톤 환초(Johnston Atoll)에 저장되어 있었고, 주한미국군 기지들에 저장되어 있었다. 당시 해군공병대센터에는 독극물 고엽제 약 14,400드럼(300만ℓ)이 저장되어 있었고, 존스톤 환초에는 독극물 고엽제 약 12,500드럼(260만ℓ)이 저장되어 있었다. 당시 주한미국군 기지들에 얼마나 많은 독극물 고엽제가 저장되어 있었는지는 비밀에 묻혀있다.
미국은 저장고에 쌓여있던 막대한 분량의 독극물 고엽제를 어떻게 폐기하였을까? 미국 군부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독극물 고엽제를 땅에 파묻은 것이 아니라 소각폐기하였다. 미국 연방정부기관 환경보호국(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은 존스톤 환초 서쪽 북태평양 해상을 화학폐기물 해상소각장으로 정해놓았다. 1977년에 미국 공군은 에이전트 오렌지 52,000드럼(10,400t)을 대형 소각선박(incinerator ship)에 세 차례 나누어 싣고 존스톤 환초 해상소각장으로 가서 소각폐기하였다. 거기에 동원된 특수선박은, 대형 유조선을 개조한 싱가포르 선적의 소각선박 불카누스(Vucanus)였다. 독성 화학물질을 먼 바다에 가지고 나가서 소각폐기하는 소각선박은 두 척밖에 없다.
미국이 1977년에 북태평양 해상소각장에서 소각폐기한 독극물 고엽제는 해군공병대센터에 저장하였던 것과 존스톤 환초에 저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미국은 주한미국군 기지들에 저장하였던 막대한 분량의 독극물 고엽제를 언제 어떻게 폐기하였을까?
그 많은 독극물 고엽제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소각선박을 이용한 폐기작업을 꿈도 꾸지 않았던 미8군사령부는 막대한 분량의 독극물 고엽제를 이 땅 곳곳에 불법폐기하였다. 미국이 자국 영토에 보관하던 고엽제 52,000드럼을 1977년에 소각폐기한 것을 생각하면, 미8군사령부는 1977년부터 1-2년 동안 이 땅에서 독극물 고엽제 약 10,000드럼(208만ℓ)을 불법폐기한 것으로 추산된다.
독극물 고엽제를 대량으로 불법폐기한 범행의 일각이 드러난 곳이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 있는 미국군기지 캠프 캐럴(Camp Carroll)이다. 1968년 6월부터 2001년까지 33년 동안 왜관 미국군기지에서 군무원으로 일한 구자영 씨는 2011년 5월 27일 <연합뉴스> 기자와 대담하면서, 미국군 제44공병대대가 1978년에 왜관 미국군기지 안에 고엽제 매립장을 “아주 대규모로 만들었다. 내가 있는 곳에서 멀리서 목격할 수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당시 왜관 미국군기지에서 중장비 기사로 일한 리처드 크레이머(Richard Kramer)는 2011년 5월 26일 <연합뉴스> 기자에게 개당 208ℓ가 들어가는, 무게 200kg 이상 되는 드럼통에 사용하지 않은 고엽제가 꽉 차 있었다고 하면서, 약 250드럼(52,000ℓ)을 파묻었다고 말했다.
독극물 고엽제를 불법매립한 지역은 독성에 오염되지 않을 수 없었다. 2003년에 삼성물산이 공주대학교에 의뢰하여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왜관 미국군기지 지하수에서 두 종류의 발암물질이 먹는 물 기준치보다 각각 31배, 33배나 더 많이 검출되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주한미국군이 독극물 고엽제를 불법매립한 왜관 미국군기지에서 약 600m밖에 떨어지지 않는 곳에 낙동강 본류가 흐른다는 사실이다. 왜관취수장은 250만 명이 사는 대구광역시에 공급하는 물을 취수하는 낙동강 본류 주요취수장 가운데 하나다. 대구의 영아사망률이 비교대상 16개 도시 가운데 가장 높고, 선천성 기형아 출산도 대구가 가장 높은 비율을 기록하였다는 <한겨레> 2011년 5월 25일 보도는, 왜관 미국군기지에 불법매립한 고엽제의 독성오염과 대구의 높은 발병율이 관련되었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런데 미국군은 왜관 미국군기지에 불법매립한 화학폐기물들을 1979년부터 1980년까지 다시 파내 다른 곳으로 반출하였다. 구자영 씨는 <연합뉴스> 기자와 대담하면서, “그 후 그곳에 매몰된 것을 수거하는 것도 목격했다. 수거작업도 상당히 오래 걸렸다. 그것도 공병대대가 직접 했다. 묻는 것보다 수거하는 것이 더 힘든 것 같았다. 1-2개월 정도 되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또한 미8군사령관 존 존슨(John D. Johnson)은 2011년 5월 26일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대담하면서 1978년에 파묻었던 각종 화학물질과 오염된 토양 40-60t을 다시 파내서 “반출했다”고 인정하면서도 어디로 반출하여 어떻게 폐기하였는지는 모른다고 하였다. 미8군사령부가 화학폐기물과 오염토양을 소각선박에 실어 부산에서 6,376km나 떨어진 북태평양 해상소각장으로 운반하여 소각폐기하였을 가능성은 전무하다. 만약 그렇게 하였다면, 미국 환경보호국 기록에 남아있어야 하는데 이 땅에서 반출한 화학폐기물을 해상소각장에서 소각폐기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주목하는 것은, 1979년부터 1980년까지 왜관 미국군기지에서 다시 파내어 다른 곳으로 반출한 것이 독극물 고엽제가 아닌 화학폐기물이라는 점이다. 그 기지에는 독극물 고엽제를 불법매립한 곳도 있고, 다른 화학폐기물을 불법매립한 곳도 있는데, 그들은 화학폐기물만 다시 파내어 오염토양과 함께 반출한 것이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당시 미8군사령부는 주한미국군 기지들에 저장하던 독극물 고엽제 전량을 왜관 미국군기지에 불법매립한 것이 아니다. 전후방에 산재한 수많은 미국군 기지들에는 고엽제 드럼통을 높이 쌓아놓은 독극물 야적장이 있었다. 1977년에 주한미국군 사병으로 군복무를 한 데이빗 애퍼슨(David Apperson)은 2011년 5월 26일 <연합뉴스> 기자에게 “당시 엄청난 숫자의 드럼통이 있는 것을 봤지만 기름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 많은 독극물 고엽제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 땅 곳곳에서 몰래 불법폐기한 것이다. 왜관 미국군 기지에서 그런 것처럼 불법매립하기도 했고, 항만에 있거나 또는 해안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미국군 기지들에서는 몰래 바다에 버리는 불법해양투기를 하였다. 미국군은 한반도에서 화학무기를 사용한 자기들의 전쟁범죄 흔적을 그렇게 지워버렸다.
그 동안 은폐해온 미국의 고엽제 만행과 범죄에 충격과 분노를 느끼지 않을 사람이 없다. 고엽제 사태를 알고 있는 주한미국군 출신 재향군인 데이빗 애퍼슨은 “한국 국민은 당연히 고엽제 사태에 분노해야 한다”고 말했다. 베트남 국민 100만 명을 사망과 병고의 대참사에 몰아넣은 독극물 고엽제를 이 땅에 불법반입하여 무더기로 불법살포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강토와 바다에 불법폐기한 미국의 만행과 범죄를 반드시 밝혀내 처벌해야 한다. 미국이 이 땅에서 저지른 고엽제 만행과 범죄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병고에 신음하는지도 밝혀내 미국으로부터 보상을 받아야 한다.
미국이 저지른 고엽제 만행과 범죄가 이 땅과 이 땅의 사람들을 짓밟았는데도, ‘주둔군지위협정(SOFA)’이라는 족쇄에 손발이 묶인 남측 정부는 미국에게 항변 한 마디 하지 못한다. 남측 정부에게는 고엽제 만행과 범죄를 처벌할 사법권은 고사하고 조사권도 없고 발언권마저 없다. 한미동맹을 고무, 찬양해온 이명박 대통령은 고엽제 사태를 조사하라고 지시하기는커녕 고엽제라는 말조차 입 밖에 꺼내지 않고 있다. 미국은 이 땅의 주권 일부를 훼손한 것이 아니라 통째로 앗아간 것이다. 미국에게 빼앗긴 주권을 찾아야 죽음과 고통에서 벗어나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살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