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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기적', 그 진실은?

토론게시판

by 붉은_달 2012. 8. 27.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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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식 경제개발의 본질과 후과
김성훈 우리사회연구소 상임연구원






새누리당 유력 대선 후보인 박근혜가 516군사쿠데타를 평가한 것이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다. 박근혜는 자신의 아버지 박정희가 일으킨 516군사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으로, “불가피한 선택”으로 규정하고 유신독재시절 한국 산업화의 성과를 마치 박정희 개인의 공인 양 발언하고 있다. 516은 군사쿠데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박근혜가 516을 지금도 “구국의 혁명”으로 주장하는 배경에는 박정희 정권의 소위 ‘산업화’가 근거로 자리하고 있다. 

한국의 60년대부터 80년대에 이르는 기간은 흔히 ‘한강의 기적’으로 표현되는 시기다. 이 기간 중 박정희 정권 시기 국민 1인당 명목소득은 1962년 87달러에서 1979년 1693달러로 약 20배 증가하였고, 명목 국내 총생산은 통계가 작성된 시점인 1970년 2조 7751억 원에서 1979년 32조 494억 원으로 약 12배 증가했다. 

516 후 이루어진 경제 성장이 초헌법적 군사쿠데타를 합법 행위로 둔갑시킬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숫자들은 516을 “구국의 혁명”으로 미화하는 근거로써 작용하고 있다. 숫자에 가려진 박정희 정권의 경제 성장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 

미국의 세계전략과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세간에 박정희 정권의 경제성장 전략은 ‘계획 경제’식 성장 전략인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박정희가 516쿠데타 이후 발표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박정희 정권이 한국의 현실을 바탕으로 수립한 것이 아니다. 50년대부터 미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원조물자에 의존하고 있던 한국 경제는 미국의 대외정책 변화에 의해 크게 좌우되었는데, 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도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전략의 일환일 뿐이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탄생한 주요인은 50년대 후반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미국이 세계 각국에 대한 무상원조 정책을 포기하고 유상원조, 차관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 진영의 패권을 거머쥔 미국은 1950년대 말에 이르러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진영의 강력한 군사, 경제적 도전에 직면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미국은 국제수지적자가 매년 30억 달러에 달하고 있었으며, 금의 유출도 계속 늘어나 내적으로도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게 되었던 것이다.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 교수는『신동아』 2007년 2월호에서 이 당시 미국의 한반도 정책이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을 쌓고 한국을 자본주의 발전의 쇼윈도로 만들려는 것”이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이와 같은 미국의 전략에 따라 미 국방부 연구소인 ‘랜드 코퍼레이션(Rand Corporation)’의 찰스 울프(Charles Wolf, Jr.) 박사와 미 오리건대학교 경제자문단의 의견을 반영하여 50년대 후반 작성 되었다. 

미국은 정치경제적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아시아에서 전범국가 일본까지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계획을 세웠다. 미국은 한반도 전략에 난관을 조성하고 있던 적대적인 한일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친일 전력이 있는 박정희로 하여금 ‘한일협정’까지 졸속적으로 매듭짓게 하였다. 패전 후에도 여전히 세력을 과시해온 일본 군국주의 세력은 이와 같은 미국의 제안에 적극 호응하였다. 일본은 때마침 ‘후지’, ‘야하다’, ‘고오깡’ 등 일본의 3개 제철업체가 신공법 도입을 계기로 지금의 ‘신일본제철’로 통합하면서 쓸모없게 된 기존 노후 시설을 한국에 차관으로 제공하는 등으로 전쟁 배상 문제를 손쉽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당시 도입된 일본의 낡은 제철 설비가 바로 한국에 들어와 ‘경제 국보 1호’로 추앙받게 된 ‘포항제철 제1고로’다. 

당시 일본은 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잃어버린 한반도 식민지를 우회 경로로 회복하고자하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일본은 ‘한일협정’ 체결 후 한국생산성본부와 일본경제조사협회의 공동보고서 ‘한일경제협력의 방향과 그 배경’을 발간하면서, “일본과 후진국인 한국과의 사이에 수직적인 국제 분업관계를 설정하여 저생산성, 대외의존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 한국의 경제구조 및 노동력시장구조를 이것과는 대조적인 일본경제에 결부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일본경제가 당면하고 있는 구조적인 제 모순을 처리하는데 이바지 한다.”고 하여 한국의 저임금 노동력을 일본경제에 결합시켜 한국 경제를 하청 생산기지로 이용할 것을 공개적으로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박정희정권이 독자적으로 추진한 것처럼 알려져 있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그저 미국의 한반도 전략에 따른 결과물이며 또 다른 민족 수난의 시작일 뿐이었다. 

‘박정희’식 경제 개발은 하청 생산기지화, 군사기지화 정책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미국과 일본 등지에서 들어온 차관은 철저하게 한국에 파견된 미국 경제 관리들에 의해 통제되고 분배되었다. 차관 설비를 불하받는 것은 50년대 원조물자를 불하받는 것처럼 그 자체로 엄청난 특혜였다. 

차관으로 들어온 낡은 설비는 삼성 창업주 이병철 등 소수 자본가에게 헐값에 넘겨져 재벌 형성 확대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 당시 차관을 통해 들어온 생산설비로 설립된 기업에는 섬유업계에 제일합섬, 선경, 코오롱, 흥한(현 원진레이온) 등, 화학 업계에 삼성석유화학, 호남석유화학, 럭키석유화학(현 LG석유화학) 등, 정유 업계에 경인에너지(현 SK에너지), 극동정유(현 현대오일뱅크) 등이 있다. 이와 같은 대규모 정유 화학시설들은 당시 한국 경제 규모나 국민 생활에 대한 고려 없이 도입된 것들이다. 

차관 설비 중에는 부산, 마산, 서울 당인리 등지로 이전된 화력발전소 시설도 있었다. 이 발전 시설은 모두 석유를 원료로 하는 발전 설비였다. 이 때문에 당시 한국의 에너지원은 무연탄에서 급격하게 석유로 전환되었다. 석유를 미국 메이저 석유회사를 통해 수입해야 했음은 물론이다. 

왜 이 같은 설비들이 한국에 들어온 것일까. 한국에 들어온 공업 설비의 특징은 한마디로 낡은 공해 유발 설비, 단순 가공 설비다. 미국과 일본의 입장에서는 자기 나라에서 공해를 유발하여 주민들의 반발을 사게 된 화학, 섬유, 정유 설비들을 제3국으로 이전하고 한국에서 저렴한 노동력과 결합하여 생산한 제품들을 다시 수입해 감으로써 자기 나라의 골치 아픈 문제들을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또 미국과 일본은 단순 가공 설비만을 한국에 넘겨줌으로써 원자재와 중간재, 그리고 사소한 기계 설비 부품들까지 덤으로 한국에 수출하게 되었다. 차관을 주고 원금과 이자만 받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이익을 얻게 된 셈이다. 이러한 결과로 60~70년대 한국으로 수입되는 상품 중 원자재와 부품의 비중은 60~70%에 달했다. 

이렇게 시작된 ‘수출주도형’ 경제는 국민 생활과는 동떨어진 미국 일본의 ‘하청경제’일 따름이며 미국 일본 경제에 의존하는 ‘대외 의존 경제’일 뿐이었다. 

미국은 한국에서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도로와 항만 등 사회간접자본을 마련하는 ‘국토종합개발계획’도 이미 입안해 둔 상태였다. 만약 미국이 의도한 대로 한국에 하청경제가 순조롭게 건설된다 하더라도, 생산된 제품을 다시 가져갈 기반시설이 한국에 부족했던 것이다. 미국은 한국에 차관을 제공하여 ‘경부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를 비롯한 도로망을 조기에 건설하려 하였으며, 70년대에 부산과 인천 등지의 항만도 확충하려 하였다. 일제가 수탈을 위해 만들어 놓았던 도로와 철도, 항만이 복구된 것도 이 때였다. 한강철교가 완전 복구된 것도 1969년의 일이다. 

그런데 미국이 ‘국토종합개발계획’을 적극 추진했던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미국은 한국에서 미군 기지를 원활하게 운용하기 위해 군사용 시설도 확충해야 했던 것이다. 미국 국방장관 슐레진져는 한국을 “전선방위지역, 전방기지”로 지목하고 미국이 주도하는 냉전체제의 동북아 군사 전초기지로 한국을 이용하려 하였다. ‘반공’을 국시로 삼은 박정희 군사정권이 이러한 미국의 군사 계획을 반대할 리 없었다. 이 당시 건설된 고속도로와 항만 등 사회기반시설 건설이 무리하게 추진된 이유도 대북 군사작전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공공연한 군사기밀로, 경부고속도로나 호남고속도로를 한번이라도 달려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경부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에는 유사시 군용비행기가 뜨고 내릴 수 있는 비상활주로가 여덟 곳이나 있었다. 지금도 미 공군기지가 있는 수원-오산 간 1번국도 비상활주로 등, 국도 상에 총 5개의 비상활주로가 여전히 남아있다. 

한국 국민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시 한국은 미국과 일본의 하청생산기지, 군사기지로 전락하고 있었다. 박정희가 제시한 ‘수출만이 살 길’이라는 구호는 결국 ‘미국과 일본의 하청생산기지’, ‘미국의 군사기지’가 되어버린 한국의 본질을 은폐하는 것에 불과했다. 

‘박정희’식 경제 개발의 참담한 후과 

미국에 의존한 ‘박정희’식 경제 개발의 후과는 심각했다. 첫째로 한국 경제는 대외 의존 경제로 굳어져 갔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1962년 한국은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각각 수입의 52.2%, 25.9%를 의존하였고, 1976년에 각각 22.4%, 35.3%를 의존하여 전체 수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편, 한국의 대미 수출 비중은 1962년 21.9%에서 1970년에 42.8%까지 상승하였다. 통계수치는 미국 일본으로부터 기계를 비롯한 중간재와 원자재를 수입하여 저렴한 노동력으로 가공한 후 다시 수출하는 전형적인 한미일 삼각무역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이때부터 한국 경제는 미국 경제 상황에 따라 출렁이기 시작했으며 세계 경제 환경이 급변한 80년대 후반 3저 호황 직전까지 만성적 무역 적자에 시달리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 시기 구축된 대외 의존 경제는 30여년이 지난 오늘 날 개선되기는커녕 더욱 심화되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12년 현재 한국 경제의 무역 의존도는 국민총소득 대비 113.2%에 달하여 세계 최고 수준이다. 경제 자체가 직접적인 국민 경제생활과 크게 연관이 없다는 의미다. 

작년 한 해 한국과 중국, 동남아지역의 무역이 전체 무역의 45%를 차지한 것과 같이 한국 무역구조가 예전과는 달리 다각화되었다고는 하지만 국제 무역관계를 보면 이 또한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이 중국, 동남아로 수출하는 제품은 주로 중간부품이 많고, 이는 다시 중국, 동남아에서 저임금 노동과 결합되어 미국, 일본 등지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한미일 삼각무역에서 중국과 동남아가 추가되었을 뿐이다. 

둘째로, 한국은 경제 개발과정에서 외국자본을 빚을 내어 씀으로 하여 대외 채무가 끊임없이 불어났다. <표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국은 80년대에 이르기까지 전체 소모되는 자본의 30~40%를 외국에 빚을 내어 조달했다. 빚은 경제가 호황일 때 수입이 많으면 별 문제가 없이 갚아나는 것처럼 보이나 불황이 닥치면 경제를 무겁게 짓누르게 된다. 차관을 통한 설비 도입은 장기 할부 구매와 비슷한 개념이기 때문에, 한국은 1978년에 149억 달러에 이르는 빚을 떠안게 되었다. 때마침 중동 전쟁으로 인하여 석유 값이 폭등하고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시장이 불황으로 치닫게 되자, 주로 미국과 일본의 하청을 받아 생산하여 수출하는 한국으로서는 불황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5년 후인 1983년 한국의 외채는 401억 달러로 두 배 넘게 증가하였다. 당시 외채는 1983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약 46.7%에 달하여 한국 경제에 심각한 원금 이자 상환 부담을 안겨주게 되었다. 



경제 개발을 위한 자본 조달을 외국에 의존하는 경향은 이후로도 지속되어 결국 1997년 외환위기를 불러오고 말았다. 한국은 심각한 외환위기를 겪었음에도 교훈을 찾기는커녕 오히려 자본시장을 완전히 개방하여 2011년 약 973조 4256억 원에 달하는 외국자본이 한국에 들어와 있다. 이 중 83%가 단기성 투기자본이다. 대외 채무도 계속 늘어 2011년 한 해 동안 일반 은행을 제외한 민간 기업과 비은행 금융회사가 외국에서 빌려온 자금은 3878억 200만 달러, 이 중 한국에서 외국으로 빌려준 자금을 뺀 순대외채무만 해도 1073억 300만 달러에 이른다. 

셋째로, 박정희정권 말기 한국은 차관에 대한 이자만 한 해에 1조원 이상씩 지급해야 할 정도로 자본 유출이 심각했다. 게다가 만성적인 무역적자 때문에 수출을 통해서는 빚을 갚아나갈 방법이 없었다. 재벌이 특혜를 본 차관에 대한 원금과 이자 상환은 고스란히 국민의 몫으로 되고 말았다. 재벌은 차관 원금과 이자를 갚기 위해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을 더욱 억제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정부는 예산의 일부를 빚 갚는데 사용하고, 농산물 시장을 개방하여 곡물가격을 낮게 유지하는 방식으로 노동자 임금인상을 억제하는데 동참했다. 한국 농업이 피폐해진 것도 박정희 개발 정책의 필연적 결과인 셈이다. 결국 국민의 세금과 저축이 미국과 일본으로 지급된 셈이고, 국민은 이중 삼중의 고통을 감당해야만 했다. 

이러한 자본 유출은 방식만 변화하였을 뿐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자본시장을 개방한 결과 외국자본이 한국 재벌 주요 계열사 주식의 50%를 넘나드는 지분을 차지하여 배당금만 한 해 5조원이나 받아가고 있다. 또 투기자본에 의한 주식매매 차익으로 한 해에 약 20조원이 유출되고 있으며, 미국과 일본 등에 지급하는 기술 로열티도 5조원 이상이다. 

국민의 고통 역시 여전하다. 차관을 받아먹고 비대해진 재벌은 대다수 중소기업을 하청기업으로 거느리며 노동자들을 저임금과 세계 최고 수준의 장시간 노동에 가둬놓고 있다. 국민들은 재벌과 외국자본에 이중 삼중으로 억눌려있는 셈이다. 

‘박정희’식 경제 성장, 이래도 옳은가?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박정희 정권 시절의 경제개발은 경제 발전과 국민 생활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게 한다. 과연 박정희 정권의 경제 성장은 누구를 위한 성장이며 개발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 국민소득이 증가했음을 인정하더라도, 2012년을 살아가는 국민들의 삶을 고려하면 당시 한국 정부가 밀어붙인 성장전략이 옳았는가, 반드시 ‘박정희’식으로 했었어야만 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살아갈 후대들에게 국민 대다수가 겪고 있는 처참한 인생을 답습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수치상 생산력이 발전하고 소득이 증가했다고 문제점과 근본 한계를 도외시 한다면, 이는 일제의 조선 강점을 당시 생산력 발전의 동력인 양 미화하는 것과 같은 모순에 빠진다. 박근혜가 자기 아버지의 경제성장 전략이 성과적이었으며 정당했음을 주장하려 한다면,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강점 시기 생산력 발전도 그 자체로 성과적이었으며 정당했음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516은 “구국의 혁명”이 될 수 있다. 





이 글은 '민족문제연구소' 정기간행물 '민족사랑' 7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2012.8.21.

* 출처 : 우리사회연구소 http://urisociety.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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